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92
989화. 구미천호
봉서궁.
임안은 수행 궁녀 2명과 함께 대원을 지나 차디찬 봉서궁에 들어왔다.
그녀는 문턱을 넘어 내청에 들어갔다. 내청 안도 마당처럼 적막했다. 궁녀와 상궁은 최소한의 인원만 유지되고 있었다.
임안은 어머니가 태후를 괴롭히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영흥제가 황위에 오른 이래, 태후는 완전히 성격이 죽었다. 어머니가 아무리 괴롭히고 무시해도 태후는 절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임안은 태후가 타협하고 패배를 인정한 줄로 알았다. 하지만 한 번은 어머니가 괴상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위연이 죽고 나니 그 빌어먹을 여인이 꼭 죽은 사람 같아서 정말 재미가 없다고.
점잖고 단순한 내청엔 평상복을 입은 태후가 별다른 표정 없이 탁자 옆에 앉아 있었다. 무심한 눈은 곧 들어오는 임안에게 향했다.
임안은 여러 해 동안 태후를 만난 적이 없었다. 기억 속 태후는 회경처럼 도도하고 누구한테도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냉담한 분위기만 흐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임안은 명목상 모친에게 공손히 예를 갖췄다.
태후는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젊은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세월이 더해졌다고 그녀의 미모가 퇴색되진 않았다. 외려 세월을 입고 더욱더 무르익은 미색이 가히 경국지색이라 찬탄할 만했다.
“폐하께서 방금 본궁을 찾아왔었다.”
태후는 눈앞의 임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동글반반한 얼굴, 곱고 다정다감한 도화안. 별다른 말이 없어도 사람을 매혹시킬 만한 여인이었다.
태후의 딸인 회경도 당연히 임안에 못지않은 뛰어난 미인이었으나 지나치게 차갑고 도도한 면이 있었다.
“오라버니께서요?”
임안은 약간 의아해했다.
태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임안도 혼인할 나이가 되었잖니. 폐하께선 네 혼사 때문에 오셨다.”
문득 임안의 안색이 급변했다.
황제는 황권을 안정시키고자 조정 훈귀와 타협해 어느 국공의 아들과 공주의 혼인을 추진한다.
임안이 태후의 말을 듣고 첫 번째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유 없는 추측이 아니었다. 실제로 전에 임안의 어머니가 이 방면 일을 언급하면서, 정국공의 차남과 임안을 혼인시키고 싶다고 말했었다.
계속해서 태후는 가볍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궁은 어쨌거나 명목상 네 어미이니 네 혼인 대사는 본궁이 준비해야지. 선황께서 계셨을 때는 너희 혼사에 전혀 관심을 두질 않아 본궁 역시 안일했지만, 새 황상께서 그런 계획을 갖고 계시니 본궁 역시 책임을 져야겠지.”
‘오라버니는 내가 개자식과 가깝게 지내는 걸 뻔히 알잖아. 내가 지금껏 그를 흠모한다고 인정한 적은 없지만, 오라버니가 설마 눈치채지 못했다고?’
임안은 속으로 화를 참았다. 한순간 표정이 어두워진 그녀는 여전히 공손한 태도였지만 매우 냉랭하게 답했다.
“이 일로 태후마마께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소녀가 직접 폐하와 말씀 나누겠습니다.”
태후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임안을 쳐다보았다.
“혼인하고 싶지 않은 것이냐?”
임안이 정색했다.
“소녀는 아무와도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태후도 상관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황상 말씀을 들어보니 너와 허 은라가 아주 가깝게 지내고 감정이 좋다던데. 알고 보니 황상께서 착각하신 것이로구나.”
‘……???’
임안은 멍한 얼굴로 태후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약 몇 초간 굳어 있던 임안이 말까지 더듬으며 이야기했다.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후가 담담히 말했다.
“황상께서 너와 허 은라의 혼사를 정하실 거라고 하더구나. 만약 네가 원치 않으면 돌아가서…….”
“폐,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설령 소녀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당연히 따를 수밖에요. 번거로우시겠지만 태후마마께서 잘 준비해주십시오.”
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임안이 냅다 큰 소리로 외쳤다.
태후는 임안을 몇 번 쳐다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니 너도 많이 성숙해졌구나. 본궁이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니 물러가거라.”
“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임안은 아무 내색 없이 예를 갖춘 뒤, 궁녀 둘과 봉서궁을 나섰다.
* * *
봉서궁 대문을 벗어나자마자 임안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
“공주마마!”
다행히 눈썰미도 있고, 동작이 민첩한 궁녀들이 빠르게 임안을 붙잡았다.
“공주마마, 어디 편찮으십니까? 소인이 어서 태의를 부르겠습니다!”
왼쪽에 있는 궁녀가 다급하게 뛰어갔다.
임안은 다른 궁녀에게 힘없이 기대 넋을 놓았다.
그 모습에 궁녀는 더욱 초조해졌다.
“공주마마, 공주마마! 왜 그러십니까?”
임안은 지금 심장이 미친 듯 쿵쿵 뛰는 소리를 들었다. 아까는 한동안 눈앞이 캄캄했었다. 그녀도 웃고 싶었지만, 눈에선 눈물이 흘러나왔다.
“본 공주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 * *
남강 십만대산 외곽에 ‘청풍애(淸風崖)’라는 높은 산이 있었다.
깊은 밤, 이곳에 빽빽한 형체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높이 뜬 달빛에 비춰보면 겉보기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자도 있고, 사람 형태이나 짐승의 특징을 한 자도 있고, 순전히 짐승 형태를 한 자도 있었다.
단 하나 이들의 공통점은 짐꾼이라는 것이었다.
한창 수많은 요족들이 큰 구덩이에 생물을 던지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생물들이었다.
생물들 모두 마지막 남은 숨을 고르거나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곧 닥칠 운명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고공에서 이를 굽어보던 허칠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성대한 제사네요.”
현재 낙옥형은 비검을, 허칠안은 태평도를 밟고 있었고, 백희는 허칠안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저 생명들이 수집된 목적은 신수의 나머지 사지 힘을 일차로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신수는 500년간 봉인돼 있었기에 기혈이 쇠약해졌다. 이건 아무렇게나 토납하고 수행한다고 회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초범경의 힘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같은 차원의 힘을 빨아들여야 했다.
허칠안이 보기에도 역량 보존에 부합하다 생각했다. 초범경의 혈단은 지나치게 희소하기에,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끌어내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 의협심 강한 허 은라는 밑에 있는 생명이 헛되이 목숨을 잃는 걸 차마 보기 어려운가?”
낙옥형이 경박한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조롱했다.
허칠안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고 개탄하며 말했다.
“제후로 봉하겠다는 일을 다신 언급하지 마세요. 장군 한 명이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는 데 얼마나 많은 장병이 목숨을 잃는 줄 아십니까? 사람은 요령 있게 대처할 줄 알아야지요. 반드시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어떠한 원칙을 따르는 건 지혜로운 자가 할 일이 아니지요.”
낙옥형이 해죽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바로 넓은 소매가 미끄러지며 새하얗고 백옥같은 손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대로 허칠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네는 지금껏 진부한 자가 아니었어.”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래쪽 밀림에서 거대한 울림이 전해졌다.
이후, 나무가 덩어리째 무너져 내렸다.
허칠안의 각도에선 그 광경이 바로 보였다. 검은 비늘의 거대한 뱀이 천천히 기어 올라오면서 도중에 나무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슥슥…….
거대한 뱀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의 둥근 달을 향해 서신을 뱉었다.
“사호법(蛇護法)이다, 사호법이 왔어.”
“사호법은 예전과 다름없이 몸이 방대하군. 아니, 더 커진 건가?”
밑에 있는 요족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거대한 뱀이 허리를 꿈틀거리자 둥근 공이 볼록 튀어나왔다. 둥근 공은 천천히 위로 움직여 거대한 뱀의 목구멍에 도달했다.
“풉……!”
공은 뱀 목구멍에 도달하자마자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건 기기에 싸인 거대한 육구(肉球)였다.
“이익!”
청월한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거대한 물체 2개가 밤하늘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몸길이가 2장(丈)에, 깃털이 불꽃처럼 새빨간 거대한 붉은 새 한 마리와 몸길이가 1장(丈) 3척(尺), 갈색에 금빛을 띤 깃털의 독수리였다.
두 마리 거대한 새는 발톱에 각자 철사를 한 가닥 쥐고 있었는데 철사 가운데에는 길이, 너비, 높이가 각각 2장(丈)인 나무 새장이 있었다.
나무 새장 안에는 잡다한 동물이 갇혀 있었다. 초식 동물, 육식 동물까지 전부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이내 거대한 새 2마리는 군요 상공을 스쳐 지나가다가 갑자기 발을 느슨하게 풀어 거대한 새장을 떨어트렸다.
‘사호법’은 긴 꼬리를 흔들어 나무 새장을 손쉽게 감아 바닥에 매우 안정적으로 내려놓았다.
뒤이어 길게 울부짖는 소리가 달밤에 메아리치더니, 무려 몸길이 3장(丈)에 달하는 거대한 개 한 마리가 나는 듯이 달려와 평지를 걷는 것처럼 사지로 허공을 디뎠다.
아래쪽 군요들이 중얼대는 소리를 통해 허칠안은 그것이 만요국의 견호법(犬護法)임을 알았다.
* * *
다음 한 시진 동안 요족 호법이 분장한 후, 무대에 등장했다.
18명이 왔는데 모두 4품 요족이었다.
큰 구덩이 속의 생명들 역시 쌓일수록 높아졌다.
‘요족의 요구(妖口)로 말하면, 강자의 비율이 아주 좋지. 게다가 만요국은 분명 4품 요족 18명에 그치진 않을 거야. 야희가 오지 않았다는 건 다른 4품 요족이 다른 곳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거지…….’
500년간 잠복하며 와신상담한 만요국에 이 정도 규모의 세력은 충분히 있을 법했다. 허칠안은 이를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초범 고수는 구미천호와 곰 한 마리뿐이네.’
허칠안도 참 유감스러웠다. 초범 강자의 수가 너무 희소했다.
만요국 전봉 시기에 초범경 대요의 수는 불문에 버금갔다. 대봉조차도 이에 미치지 못했다. 어쨌든 남요는 요족 정통을 상징하며 요족 전체의 기운을 응집했었다. 그에 반해 북방 요족은 그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이때, 아래쪽에서 소요가 소리쳤다.
“청희(淸姬) 장로님!”
허칠안은 즉시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청풍애 꼭대기에 남색 치마를 입은 늘씬한 여인이 서 있었다. 얼굴은 비단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생기가 도는 매혹적인 눈이 아래쪽의 군요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나타났어? 암고부 잠행이랑 비슷한 천부적인 신통력이 있는 건가?’
이내 허칠안은 깜짝 놀란 백희가 기쁘게 소리치는 걸 들었다.
“이야, 청희 언니네!”
‘그래, 잊을 뻔했네. 이 자식도 버젓한 백희 장로지…….’
허칠안이 물었다.
“저 사람이 너랑 야희의 자매야?”
백희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청희 언니를 못 본 지 아주 오래됐어요. 언니 음식이 참 맛있는데.”
‘너 도대체 자매가 얼마나 있는 거야…….’
허칠안은 한번 떠보듯 물었다.
“예뻐?”
그리고 그는 백희의 대답이 있기 전, 진지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예뻐도 국사만큼 예쁘지는 않겠지요.”
낙옥형은 그제야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칠안 목에 댄 검을 도로 거뒀다. 이것이 바로 허 색마가 살아남는 비결이었다.
곧이어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젊은 여인이 아래쪽 군요들을 굽어보며 소리를 높였다.
“마마를 모십니다!”
소리의 질감은 아주 깨끗했다. 곱지도, 거북스럽지도 않았다. 꼭 은방울처럼 투명하고 깔끔했다.
“마마를 모십니다!”
자리에 있는 모든 요족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목소리는 모여 해조를 이뤘다.
땡그랑…….
맑고 깨끗한 은방울 소리가 모든 요족의 귓가에 울렸고, 허칠안과 낙옥형도 그 소리를 들었다.
이때, 순간 달빛이 어두워진 듯했다. 무언가에 가려진 것 같았다.
‘구미천호가 왔다……!’
허칠안은 번뜩 든 생각에 옆으로 고개를 돌려 둥근 달을 바라보았다.
호족은 미모로 유명하여 하나같이 출중한 미인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구주 대륙에 유일한 구미천호는 얼마나 아름다운 경국지색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