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109
42화 혈마검 (1) >
선홍빛으로 물들었던 검이 다시 은빛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핏물에 젖어있는 덕분에 검은 여전히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백혜향의 주위로 토막토막 난 시신들이 끔찍한 형태로 널브러져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원하던 검을 손에 넣었는데도 그녀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심쩍은 눈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혈천대라공을 견디다니. 과연 혈마검이 틀림없군요.”
그런 그녀의 곁으로 의원으로 분했던 사내가 다가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한데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왜 그러시는지?”
“……듣던 것과는 달라.”
“네?”
백혜향이 말없이 사내에게 검을 던졌다.
이에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검을 받지 않고 피했다.
검이 땅바닥에 꽂혔다.
“……어찌?”
혈마검이 희대의 요검이라는 사실은 정파뿐만이 아니라 혈교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 저주를 받게 된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검병을 잡아봐.”
“네?”
“잡아보라고.”
그녀의 강경한 명에 머뭇거리던 사내가 결국 검병을 잡아보았다.
검병을 잡은 사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려했던 요검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백혜향이 물었다.
“심 장인은 개봉으로 보냈지?”
“네. 화월상단의 본단으로 보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화월상단의 본단.
일혈성의 뇌혈검 장룡의 근거지였다.
“왜 그 자의 솜씨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 말씀은?”
“…….진짜 혈마검이 아니야.”
그녀는 확신했다.
당가의 무사들 앞에서는 진짜를 탈환한 것처럼 허장성세를 펼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검은 진짜 혈마검이 아니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군사 제갈원명. 놈의 수작이겠지. 재밌네. 이십 년이 지나도 건재하다는 거네.”
“제 불찰입니다.”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사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백혜향의 심기를 달래주기 위해서였다.
백혜향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됐어.”
이미 기회는 물 건너갔다.
지금쯤이면 무림 연맹에서도 어느 정도 사태를 수습시켰을 거다.
가짜 혈마검을 들고 도망 다니던 자들도 전부 잡히고 폭약으로 아수라장이 된 성내도 안정을 되찾았다면 재잠입은 무리다.
애초에 이 정도 수에 흔들릴 무림 연맹이 아니었다.
“끝났어.”
“……..”
“하나 그 아이 쪽도 마찬가지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백혜향의 말대로 이번 사건으로 무림 연맹은 더 이상 틈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내부 방어선을 구축할 게 틀림없었다.
그리 된다면 재차 침입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백련하 측도 마찬가지였다.
‘백련하 아가씨가 보낸 애송이 놈들도 철수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양동작전을 펼친 것이기도 했다.
혈마검을 얻지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의 목적은 완수한 셈이었다.
-슥!
사내가 백혜향에게 검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바쳤다.
그리고 말했다.
“아가씨. 혈천대라공을 견딜 수 있는 검이라면 설사 모조라고 한들 한없이 혈마검에 가깝지 않습니까?”
사내의 말에 백혜향의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런 그녀에게 사내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때로는 가짜가 진짜가 되는 법이죠.”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혜향이 가늘어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장룡.”
인피면구 속에 감춰진 사내의 정체.
그는 바로 일혈성 뇌혈검 장룡이었다.
* * *
참 신기하다.
그 오싹할 정도로 한이 서려있던 목소리를 따라서 이곳에 왔다.
그런데 지금 검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부적을 붙여놓은 것만으로 이런 효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게. 하나도 안 들려. 너도 그렇지?
-그렇다.
소담검과 남천철검 역시도 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진짜가…..맞겠죠?]조성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음으로 물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모조 혈마검을 들고서 도망치던 녀석을 한 명 발견했었다.
그래서 확신하기 어려운가 보다.
하지만 총군사인 제갈원명이 뒷통수까지 맞아가며 지키려던 검이었다.
하지만 확인해볼 필요는 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살짝 검을 뽑아보았다.
그 순간 부적이 붙여진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며 머릿속으로 광기에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여라! 전부 죽여야 한다!
한(恨), 살의, 분노, 광기 모든 것이 어우러진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멀리서도 오싹할 지경이었는데, 가까이서 듣자 그 복합적인 최악의 감정 집합에 머리가 깨질 듯 한 고통이 느껴지며 나도 모르게 검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헛!”
조성원이 다급히 떨어지는 검을 잡았다.
그것을 잡은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사마영이 살짝 열려있던 검집의 끝을 쳐서 강제로 닫아버렸다.
“헉….헉….”
조성원이 거친 호흡을 뱉어냈다.
녀석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만 보더라도 검에서 흘러나오는 요기는 사람의 정신을 제대로 갉아먹고 있었다.
-운휘……많이 위험한 녀석이야.
-이렇게 한이 많은 검은 나 역시도 처음 본다.
소담검과 남천철검이 우려를 표했다.
검인 그들조차 이럴 정도면 정말 요검이 틀림없었다.
이런 검과는 제대로 대화가 통할지도 의문이었다.
조성원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내게 물었다.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부적을 붙여도 이 정도라면 이걸 떼었을 때는 과연 어떨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문제는 들키지 않게 검집을 버리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사마영에게 물었다.
검과 접촉하지 않은 자는 이를 못 느낀다라.
그렇다면 검신에 붙여진 부적만 유지한 채로 미리 준비해둔 검집에 넣기만 하면 된다.
-우, 운휘.
남천철검이 굉장히 꺼려하고 있었다.
뭐든 접촉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정말 불길한 검이다.
사마영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미치겠다.
보통 사람은 접촉만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데 나는 이 녀석의 소리를 듣는 게 문제였다.
차라리 듣지 않는다면 모를….
‘아!’
순간 머릿속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검의 이명들이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선천진기를 머리로 집중했다.
이를 좀 더 높인다면 검의 소리가 일시적으로 차단되지 않을까?
-운휘. 그렇게 되면 우리의 소리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별 수 없잖아.’
조금이라도 혼란스러울 때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스승님인 해악천에게 검을 넘기기만 해도 임무의 절반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
그런데 검의 광기로 차질이 생기게 할 순 없었다.
-알겠다.
-너야말로 괜찮겠어? 남천. 저 괴물같은 녀석이랑 같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고 걱정하는 소담검이다.
-안 그러면 현 주인이 곤란하게 생겼는데 어쩌겠나.
맞는 말인데, 뭔가 되게 미안해지네.
나중에 검날이라도 갈아줘야 겠다.
-흠흠. 약속 꼭 지켜라.
‘그래.’
녀석에게 약속을 한 나는 선천진기를 더욱 끌어올려 머리로 집중시켰다.
그러자 주위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이명들이 차단되었다.
‘소담? 남천?’
심지어 소담검과 남천철검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녀석들이 재잘거리던 소리를 듣다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니, 조용하면서도 뭔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이었다.
얼른 검을 옮겨놓고 차단한 것을 열어야 겠다.
* * *
남천철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한 공간을 차지하던 모조검이 빠져나오고 이윽고 부적으로 검신을 감싼 혈마검이 안으로 들어왔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남천철검을 괴롭혔다.
-죽인다! 모든 것을 죽여 버릴 거다!
광기가 어린 한.
그것은 남천철검조차 겪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사람이었다면 이 녀석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버텨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다. 이게 정녕 검의 자아가 맞는 건가?’
남천철검은 의문이 들었다.
검의 자아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복합적인 한이 느껴졌다.
말 그대로 귀기가 서린 느낌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남천철검이 혈마검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이보게. 나 남천철검이야. 잠시지만 같은 검집에 지내게 되었는데, 우리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나?
-죽인다! 모든 것을 죽여 버릴 테다!
-후우.
완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오직 살의와 한, 광기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이 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운휘. 많이 쓰다듬어줘야 한다.’
고생한 만큼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남천철검의 귓가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다른 이명 소리.
-옥죄이던 사슬이 드디어 약해졌구나.
광기가 서린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의아해하고 있는데, 남천철검은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파스스!
‘!?’
혈마검의 검신에 붙어있던 부적들이 조금씩 찢겨지고 있었다.
아니 타들어가듯이 부식되어갔다.
그것은 독이 퍼지듯이 부적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런!
이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 검신에 붙어있는 부적들이 전부 없어지게 생겼다.
당황한 남천철검이 외쳤다.
-운휘! 운휘!
하지만 소리를 차단한 소운휘에게 이것은 들리지 않았다.
* * *
혼란을 틈타 나와 일행들은 무림 연맹의 성을 빠져나왔다.
의심 받지 않기 위해 잠시 남아있는 것도 고려했지만 혈마검을 가지고 있는 것부터가 위험부담이 컸다.
일단은 스승님인 해악천과 접선해서 검을 넘기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무림 연맹에 다시 돌아간다면 백혜향 측이 벌인 사태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꾸밀 수 있다.
그나저나 송좌백과 송우현 쌍둥이들은 이 틈에 제대로 탈출했을까?
‘녀석들이 접선지로 제대로 갔는지 모르겠어.’
아…….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속으로 말을 걸었다.
녀석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선천진기로 차단해놓고서 말이다.
이거 은근히 허전하네.
우리는 접선하기로 한 남서쪽 숲으로 향했다.
원래 접선지는 아니었고 백혜향 측에서 도중에 농간을 벌일지도 모르기에 해악천이 새롭게 정한 접선지였다.
‘있으려나.’
걱정되었다.
지금 무림맹 성 밖도 난리였다.
성 내에서 빠져나온 이들도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 정도 사태라면 해악천 역시도 안에서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알 것이다.
부디 알아차리고 접선지로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젠장.’
접선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기척을 숨기고서 어딘가에 숨어있어야 할 듯 싶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무림 연맹에서도 성내 사태를 수습할 텐데 걱정이다.
“일단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죠.”
이곳은 숲이 우거지고 이목도 적어서 몸을 숨기기는 적합한 곳이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수풀을 뚫고서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는데, 스스로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어보였다.
‘스승님?’
아니다.
그러기에는 보폭과 족적의 소리가 달랐다.
무거움보다 오히려 가볍다.
이렇게 가까워지고 있는데,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걸 보면 분명 고수였다.
그때 수풀을 뚫고서 그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북영도성?’
전혀 예상지 못한 자였다.
외팔의 북영도성 곽형직이 왼손으로 도를 비스듬하게 어깨에 걸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형제.”
사마영과 조성원이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해하며 힐끔 쳐다보았다.
이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곽 대협을 뵙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북영도성 곽형직이 내게 물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겐가?”
그저 묻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의구심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갈 군사께서 세작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추포해달라고 부탁하셔서 그 자를 쫓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거참 이상하군. 무림 연맹에서부터 자네들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이동하던데 그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묻고 싶네.”
‘…….하아.’
그로 인해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북영도성 곽형직은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게 아니라 우리를 뒤따라온 게 틀림없었다.
주위를 최대한 살피면서 이동했는데 그를 놓쳤다.
괜히 남천검객과 비견되는 게 아니었다.
그 정도 되는 고수니까 나로서도 기척을 감지하는 게 어려웠다.
‘젠장.’
난처해하고 있는데 곽형직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누군가 내 뒤를 밟고 있더군. 그래서 확인해보니 제갈 군사가 감시하라고 붙여둔 일군사부의 무사들이었네.”
하!……북영도성에게도 사람을 붙였구나.
일군사 제갈원명.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연을 맺고 있던 자조차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의심하다니.
“그래서 나는 물어보았지. 왜 내게 사람을 붙였냐고 말일세. 그러자 제갈군사가 정보가 노출된 것 같다고 순순히 이야기해주더군.”
“…….”
“당연히 나는 그 정보를 노출한 사람이 아니지. 그렇다면 내부에서 새었거나 자네거나 둘 중 하나란 말인데……나는 당연히 자네는 아닐 거라 생각하네. 천하의 남천검객의 제자가 세작일 거라고 누가 상상하겠는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북영도성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자네를 믿고 있네.”
“…….”
“그러니 자네를 향한 나의 의심을 거둬줄 수 있겠나?”
“…….어찌 말입니까?”
“자네의 검집을 좀 살펴봐도 되겠나?”
‘!!!’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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