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117
44화 피 (3) >
안개로 자욱한 장강.
부둣가에 정박해 있는 한 커다란 배.
배 위로 비치는 하나의 불빛이 밤안개를 은은히 밝혔다.
선두의 갑판 위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미남자가 있었다.
“받으십쇼.”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검은 두건을 쓰고 있는 중년인이 일어나 공손하게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런 곳까지 납시어주셔서 영광입니다. 사혈성.”
미남자의 정체는 바로 사혈성 도장호였다.
도장호가 술잔을 들이키며 입을 여었다.
“겸사겸사 오게 되었지.”
“겸사겸사라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있어서 얼굴을 볼까해서 말일세.”
그 말에 검은 두건의 중년인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도장호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뭐. 별 일은 아닐세. 그저 궁금한 소형제 한 명이 있어서 말이야. 아무튼 아쉽게 되었어. 오랜만에 황 형을 보려했건만.”
“오혈성께서도 아쉬워하실 겁니다.”
오혈성 권퇴혈우 황강.
검은 두건의 중년인은 오혈성의 산하의 파경단을 맡고 있는 문율이라는 단주였다.
단주 문율이 그에게 술잔을 채워주었다.
술잔을 받던 도장호가 넌지시 물었다.
“한데 자네는 가보지 않아도 괜찮나?”
“네?”
“상대는 다른 자도 아닌 기기괴괴 사존 어르신일세.”
그 말에 문율이 씨익하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쇼. 아무리 어르신이라고 해도 산공독에 당한 이상 적어도 반 시진 이상은 꼼짝하실 수 없을 겁니다.”
“과신하는 것 같군.”
“광마 단주와 대주 다섯 명, 상급 무사 열두 명, 중급 무사 육십여 명이 포진했습니다.”
한 단의 주요 전력들이 투입된 상황이었다.
문율이 자신만만해 하는 이유였다.
그런 그에게 도장호가 말했다.
“늘 변수란 게 있기 마련일세. 방심하지 말게.”
계속되는 그의 경고에 결국 문율은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
“……명심하겠….”
그때 갑판 위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올라왔다.
복면을 쓰고 있는 무사였다.
“무슨 일이느냐?”
“단주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
단주 문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물었다.
“설마 사존께서 산공독을 피하기라도 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 말에 문율이 순간 안도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기기괴괴 해악천이 산공독에 걸리지 않았다면 정말 변수가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라는 게야?”
“광마 단주께서 당하셨습니다.”
“뭐야?”
놀라하는 문율을 보며 사혈성 도장호가 실망스러워했다.
오혈성 소속의 단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존도 아니면 누가 그랬다는 거야?”
“사, 사존의 제자입니다.”
“소운휘?”
문율이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혈교에서도 명성이 높은 광마 단주가 아무리 사존의 제자라고 해도 후기지수나 다름없는 애송이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장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소운휘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사존의 제자와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안가를 막고서 지키고 있는데, 놈들을 생포하려다보니 저희 쪽의 희생이 늘고 있습니다.”
무사히 데려오라는 명이 발목을 붙잡은 것이었다.
안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분명 기기괴괴가 내공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키는 게 틀림없었다.
시간을 끌수록 위험해진다.
“멍청한 놈들! 당장….”
“잠깐.”
‘!?’
문율이 다급히 나서려고 하는데, 사혈성 도장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같이 가도록 하지.”
사혈성이 대동한다는 말에 단주 문율의 표정이 밝아졌다.
* * *
-채채채챙!
동시에 덤벼드는 두 명의 복면인의 검을 받아낸 나는 그들의 심장과 목을 찔렀다.
심장을 노린 복면인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러나 다른 복면인이 검을 위로 쳐내는 바람에 목을 노렸던 복면인은 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팍!
나는 검을 쳐낸 복면인의 가슴을 발로 차냈다.
그리고서 놈의 미간을 찔렀다.
“컥!”
미간이 찔린 복면인이 비틀거리다 뒤로 쓰러졌다.
뒤로 피한 다른 복면인도 처리하려 했는데, 세 명의 복면인이 동시에 다른 방위로 요혈들을 노려오는 바람에 보법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파파팍!
‘까다롭다.’
벌써 열 명이 넘는 복면인들이 내 손에 죽자, 복면인들이 포위를 하고서 더욱 신중하게 덤벼들고 있었다.
이들이 생포가 아닌 죽일 각오로 덤빈다면 더 힘들었을 거다.
‘……아직 멀었나?’
시간조차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각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인 것 같다.
-운휘 건물 위로 올라간다!
“어딜!”
-팟!
남천철검의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경공으로 뛰어올라 건물 위를 향해 은연사로 고정한 소담검을 날렸다.
암기처럼 날아간 소담검이 건물 위로 오르던 복면인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푹!
“큭! 젠장!”
그 상태에서 나는 은연사를 잡아당겼다.
안가 건물의 천장 위로 잠입하려 했던 복면인이 기와를 잡고 버티려 했지만, 애초에 공력에서 밀렸기 때문에 그대로 기와와 함께 끌려 내려와 지고 말았다.
“흐압!”
나는 은연사의 줄을 회수함과 동시에 복면인들을 향해 줄을 매단 추를 던지듯이 소담검이 박혀 있는 복면인을 휘둘러 던졌다.
-부웅!
“피해라!”
받아줄 만도 했는데, 복면인들은 그를 포기했는지 그대로 피해버렸다.
단주급이 아니라서 그런가? 냉정한 녀석들이다.
덕분에 그대로 곤두박질 친 복면인은 꿈틀거리다 움직임이 멈춰졌다.
“후우…..후우….”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개인의 무위로 친다면 내가 저들보다 뛰어난 것은 확실하나, 인원이 너무 많았다.
합공으로 쉴 틈 없이 덤비는데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사마 소저는 괜찮을까?’
일단 반대편 쪽은 여전히 격렬한 쇳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걸 보면 아직까지 사마영이 잘 막고 있는 듯 했다.
그녀와 나 둘 중 한 명이라도 뚫리면 끝장나고 만다.
‘서두르십쇼.’
해악천이 빨리 산공독을 몰아내야만 승산이 있다.
-팟!
복면인들이 또 다시 세 명이서 동시에 신형을 날리며 덤벼들었다.
“곡지! 거골! 위중!”
어떻게든 제압하려 난리구나.
우측 팔꿈치 관절과 왼쪽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 무릎 쪽의 혈들을 노려온다.
전부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마혈들이다.
-채채채챙!
나는 성명검법의 제 3초식 비추형검(泌鰍形劍)을 펼치며 이들의 공격을 동시에 정신없이 막아냈다.
그리고 변초를 써서 가운데에 있는 복면인의 미간을 노리는 순간,
-머리 젖혀!
소담검의 외침에 나는 다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슉! 푸푸푸푸푹!
바늘 같은 암기가 다섯 개가 안면 위로 스쳐지나가 안가의 벽에 꽂혔다.
암기를 날린 복면인이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눈이 여기저기 달린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있다.
그 덕분에 어떻게든 너희들이 안가로 진입하는 걸 막고 있는 거고.
그런데도 정신이 분산될 것 같다.
차라리 여기저기 활개 치며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이라면 나을 것 같다.
‘지키는 게 곤욕이구나.’
차륜전으로 합공을 하면서 안가를 노려대니 지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혀가 바짝 마른다.
이 자리를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다.
반면 놈들은 조금이라도 시선이 벗어나면 여러 방위로 안가로의 진입을 노리고, 나를 다양한 방법으로 제압하려 들었다.
그때마다 놈들을 한 명씩 줄여나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 버티….!?’
날카롭게 찔러오는 기운이 나를 자극했다.
명백하게 나를 노리고 있었다.
복면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강렬한 감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포위하고 있던 복면인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복면을 쓰지 않은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더 많은 복면인들마저 나타났다.
하지만 내 시선은 오직 한 곳으로만 향했다.
‘!!!’
검병의 끝에 묶여진 흰 가죽 묶음의 장신구를 보는 순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년의 미남자가 입 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소형제. 참 오랜만이로군.”
‘……사혈성.’
그는 바로 사혈성 도장호였다.
회귀 후에 처음으로 대면했던 존성들 중 한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 존재감은 여느 존자들이나 혈성들 못지않을 만큼 강렬했다.
‘혈성까지 나타나다니.’
제대로 낭패였다.
아직까지 스승님인 해악천이 회복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현 혈교의 최고수들 중 한 사람이 나타났다.
“……사혈성을 뵙습니다.”
나는 그에게 검 끝을 밑으로 향하게 한 후에 손을 모아 약식으로 예를 갖췄다.
도장호에게 내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를 보고 싶었다네.”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도장호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참으로 놀랍군. 고작 한 해하고도 몇 달 사이에 무공조차 펼칠 수 없던 몸에서 사존 어르신의 제자가 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장성하다니.”
그는 진심으로 내게 감탄을 하고 있었다.
“과연 아가씨께서 탐을 낼 만도 하군.”
“……과찬이십니다.”
잠깐만 차라리 이 상황을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볼까.
그렇게 여기고 있는 찰나였다.
사혈성 도장호가 옆에 서있는 중년인에게 말했다.
“문 단주. 여기는 본좌에게 맡기고 자네는 어르신을 모시게.”
“넵! 가자!”
“충!”
문 단주라 불린 자와 복면인들이 버젓이 나를 제치고 들어가려 했다.
‘젠장!’
역시나 시간을 끌게 내버려둘 리가 만무했다.
여기서 사혈성과 겨루게 된다면 다른 자들을 막을 수 있는 여력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는데, 허리춤에 차고 있는 혈마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참 재밌게 돌아가는 구나.
‘!!!’
그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해악천이 제압되면 이보다 최악일 순 없었다.
“잠깐!”
나의 외침에 그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칫했다.
나는 허리춤에서 혈마검을 빼냈다.
“이게 무엇으로 보입니까?”
“그건……”
이를 본 사혈성 도장호가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손에 쥐어져 있는 혈마검을 보던 그가 문 단주라 불린 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에 문 단주가 피식하고 웃더니 말했다.
“모조검입니다. 진짜 신물은 아가씨께서 탈취하셨다고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도장호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는군. 소형제.”
나는 문 단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가짜라면요.”
“하하하하하핫. 사존의 제자라 대우해주려고 했는데, 얼토당토하지 않은 소리를 해대는군. 그게 진짜 혈마검이라면 네까짓 것이 들고 있을 수나 있을 것 같으냐?”
“그래요?”
나는 문 단주를 향해 혈마검을 휙 하고 던졌다.
문 단주가 무심결에 그것을 받았다.
“이걸 왜 내게….”
그 순간이었다.
“억!”
문 단주의 오른 손등에서 핏줄이 불룩불룩 튀어나왔다.
당황한 문 단주가 검을 손에서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그의 손등의 핏줄이 터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푸슉!
‘!?’
갑작스럽게 벌어진 기이한 현상에 복면인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어 사혈성 도장호조차 눈살을 찌푸렸다.
“끄아아악! 이, 이게 대체!”
문 단주가 왼손으로 검을 억지로 떼어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혈마검을 향해 나는 황급히 왼손을 내밀어 은연사를 발사했다.
그러자 은연사의 줄에 묶인 검이 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문 단주가 창백해진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이, 이놈!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수작이라뇨. 진짜 혈마검을 쥐는 영광을 누려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십니까?”
“뭐?”
-웅성웅성!
복면인들이 술렁였다.
나는 그들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다.
진짜 혈마검이라면 그 검을 내가 쥘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혈마검을 쥘 수 있는 자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모두가 알 거라 생각합니다. 사혈성께서도 그렇지요?”
모두의 시선이 혈마검으로 향했다.
사혈성 도장호가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 나오며 날카로워진 눈매로 입을 열었다.
“검병에 가령 독이라든지 수작을 부리지 않은 것인지 어찌 안 다는 겐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렇다면 마지막 방법 밖에 없구나.
나는 혈마검을 쥐고서 상단전의 염(念)을 집중했다.
그 순간 손등에 있는 북두칠성의 네 번째 점인 천권(天權)이 붉게 물들었다.
‘돼라. 돼라.’
반신반의 하고 있는 그때였다.
복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중얼거렸다.
“머, 머리카락이?”
“붉게 변하고 있어.”
변화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혈마검의 검신이 점점 선홍빛으로 바뀌어갔다.
방금 전까지 냉철함을 잃지 않고 있던 사혈성 도장호의 눈동자가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도장호는 믿기 힘들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그분의 피를 이었다고?”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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