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119
44화 피 (5) >
무릎을 꿇지 않은 복면인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화근을 제거하겠다는 말은 그들을 죽이겠다는 소리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믿음직한 우군이 한순간에 적으로 돌변했으니 황당하기마저 할 것이다.
한데 이 상황이 껄끄러운 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생사여탈권을 넘기다니.’
서있는 복면인들만 하더라도 사십여 명이 넘었다.
허락만 떨어진다면 저들은 죽는다.
-지금까지 네 손으로 저 녀석들을 죽여 놓고 새삼 착한 척할 셈이냐?
혈마검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봐.
나는 사람의 목숨으로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거나 필요에 의해서 살인을 한 것이지 아무 이유없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여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이 그 필요한 상황이지 않나? 저들은 네게 충성을 거부했다.
‘나를 거부했으니 전부 죽여라?’
-그게 피의 길을 걸어가는 자의 숙명이다.
좀 작작해라.
그것도 어느 정도 상황에 맞춰가면서 하는 거다.
저들은 충심을 지킨 자들이다.
원래 모시던 주군을 위해서 혈교의 율령마저 어겨가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충의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멍청한 놈. 그래서 봐주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운휘가 선택하는 거다. 혈마검. 자네가 운휘에게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충심을 지킨 자들을 따르지 않았다고 무작정 죽이는 것이 그게 현명한 우두머리의 자질이라고 보나?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남천철검이 나를 두둔했다.
의(義)를 중시하는 남천검객의 검다웠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하고 있는 사혈성 도장호.
도장호의 눈빛은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저 눈빛……’
그의 눈빛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혈교의 우두머리로서의 자질을 시험해보려는 것만 같았다.
선택지를 고작 하나만 주고서 내 입으로 저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을 내리는 결단력을 보이길 원하는 것인가.
‘…….그러시겠다 이거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는 도장호를 지나쳤다.
“혈마이시여?”
의아해하는 그를 뒤로 한 채 나는 큰 소리로 무릎을 꿇지 않은 복면인들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의 충의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
뜻밖의 말에 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런 반응들만 봐도 혈교의 후계자로서 백혜향이 지금껏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여러분들의 충심을 높이 삽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충심을 지킨 복면인들뿐만 아니라 복종한 복면인들도 술렁였다.
“지금 무슨….”
뒤에서 사혈성 도장호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기대한 것과 다르다면 미안하지만 난 백혜향도 아니다.
그리고 백련하도 아니다.
“그대에게 묻겠습니다.”
나는 서있는 복면인들 중 한 사람을 지목하여 말했다.
“그대는 본교의 교인입니까? 아니면 백혜향 아가씨의 심복입니까?”
그런 내 말에 복면인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나는 일부러 대주 급의 인사를 지목했다.
중급 무사들까지는 혈고에 의해서 억지로 끌려다니는 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복면인이 힘겹게 입을 뗐다.
“…….교인입니다.”
“본교 그 안에서 아가씨를 모시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개인을 향한 충심을 사사로이 내세우는 겁니까?”
“그건…..”
“당신이 모시는 자를 교주로 모시고 싶어서이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 말에 복면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복면인들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한데 혈마는 무엇입니까?”
“그. 그것은…..”
“율령에 의하면 혈마야말로 혈교 그 자체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신물이 내 손에 들어왔고 신물에 선택받은 이상 지금 저는 혈마입니다. 율령대로 혈교 그 자체이겠군요. 하면 여러분들은 지금 혈교의 교인이기를 포기하는 겁니까?”
“어찌 그런!”
역시 대주급의 인사다웠다.
평생을 혈교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그것을 부정당하면 얼마나 모독감을 느끼겠는가.
그들 정도 되면 혈교의 교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높다.
-뭘 어쩌려고 자극하는 거야?
‘어쩌긴 어째. 이러려고 하는 거지.’
나는 무릎을 꿇지 않은 복면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교인이기를 포기하고 죽을 겁니까?”
절반 정도 되는 이들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만큼 혈교 자체에 충성심이 높은 자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같은 교인들끼리 뜻이 어긋날 때마다 하나씩 배척해간다면 그 안에 남아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목숨을 끊고 아가씨를 향한 충심을 지킨다? 저는 그러길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그게 혈교입니다.”
“우리가…..모여서 혈교?”
웅성거림이 여기저기로 번져나갔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얘기한 혈교의 수장들은 없었겠지.
왜냐하면 강요나 협박에 의해 시작되니까.
위에서 시작한 자들의 눈에는 이런 일반 교인들은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그저 장기말에 불과하다.
나는 그런 밑바닥에 있는 자들의 불안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언제든지 희생당할 수도 있다는 압박감.
그것에 시달리게 되어 있다.
“저도 여러분들처럼 밑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제게는 여러분들도 혈교 그 자체입니다.”
-하!
혈마검이 기가 막혀했다.
-언변술…..아니 말솜씨가 능구렁이처럼 기가 막히구나. 인간.
-운휘의 특화된 능력이지.
뭐가 특화되었다는 거냐.
오랫동안 첩자 생활을 하면서 늘은 게 이것뿐이지.
술렁거리면서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 적기였다.
이제 쐐기를 박아야 겠다.
“누구를 모셨든지 개의치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셔야 혈교가 다시 부흥할 수 있습니다. 함께 합시다!”
마지막 어조는 일부러 강하게 내뱉었다.
마치 영웅의 풍모를 풍기듯이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고 얼마 있지 않아 내가 지목했던 대주 급 복면인이 무릎을 꿇었다.
“혈마께…..혈마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분위기라는 것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쿵! 쿵!
그것을 기점으로 파장이 퍼져나가듯 복면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
“충성을…..”
끝끝내 버틴 자는 일곱 명에 불과했다.
“명예를 지킬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자결을 권했다.
살려둘 수는 없었다.
이들을 보내게 된다면 백혜향에게 정보가 넘어가 후환이 될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백혜향도 우두머리로서 난 사람이긴 한가 보다.
아무리 잔인하고 제멋대로인 성정을 지녔어도 저렇게 목숨마저 던져가며 따르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뜻을 달리했어도 본교의 교인들입니다. 저들의 시신을 잘 수습해주기 바랍니다.”
“충!”
나를 보는 복면인들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호의로 가득했다.
나는 뒤를 돌아 사혈성 도장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이게 제 방식입니다.”
그런 내 말에 도장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경고했다.
“정말로 혈마로 모실 생각이면 저를 시험하지 마십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사마영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안가의 반대 쪽으로 돌아갔다.
* * *
“흔적을 남기지 마라.”
“충!”
사혈성 도장호는 주변을 수습하게 복면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들이 바쁘게 움직일 때 도장호에게 해악천이 다가왔다.
“어이. 도장호.”
“어르신. 오랜만에….”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해악천의 주먹이 도장호의 안면을 강타했다.
철퇴를 맞은 것처럼 도장호의 몸이 한바탕 바닥을 뒹굴었다.
도장호가 시뻘겋게 부은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여전히 손부터 움직이시는군요. 어르신의 주먹을 무방비로 맞으면 저라도 위험합니다.”
“닥치거라! 혈마 이전에 본좌의 제자다. 누가 네놈 멋대로 녀석을 시험하라고 했느냐?”
그런 해악천의 말에 도장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옷을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본좌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만 어설프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혈마가 되는 것이라면 그 자질을 확인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도장호의 말에 해악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까? 정말 혈마로서 포부를 가졌다면 처음부터 그 정체를 밝혔겠지요. 놀라는 기색이 서로 입을 맞추지 않은 것 같더군요.”
“네놈이야 말로 여전히 속이 시꺼멓구나.”
“통찰력이 깊다고 해주시지요.”
“흥!”
해악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다 물었다.
“그래서 시험해본 결과는 어떻느냐?”
도장호가 안가 건물의 뒤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상 밖이더군요. 답을 정해놓고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가늠하려 했더니, 오히려 저들을 설득할 줄은 몰랐습니다.”
“잔머리와 입으로는 입신의 경지에 오른 녀석이지. 클클.”
해악천이 웃음을 흘렸다.
그 역시도 소운휘가 어찌 나올지 궁금하긴 했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백혜향이 되었든 백련하가 되었든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내분의 끝은 숙청이다.
그녀들이라면 불복하는 자들을 남김없이 죽였을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만약 후환거리를 남겼다면 어설프게 입만 놀린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소운휘는 세치 혀로 후환이 될 자들조차 스스로 자결하게 만들고서 그것으로 다른 교인들의 호의마저 샀다.
그것이 정말로 천성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의도한 거라면…..’
여태까지의 혈마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혈마가 탄생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계마저 갖춘 혈마라.’
하지만 도장호는 이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아직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 * *
배의 후미에 걸터앉아 안개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과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왜? 네 미래 같아?
‘…….’
소담검의 익살스러운 목소리에 대꾸할 기운도 없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인생이라는 것이 뜻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지만 해도 너무 하다.
한 치 앞을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영광스러워 해라. 다 이 몸이 너를 선택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혈마검의 말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누가 너더러 선택해달라고 부탁한 적이라도 있나.
-은혜도 모르는 녀석.
은혜는 무슨 은혜야.
네 녀석 덕분에 내가 원래 계획했던 것과 완전히 멀어졌다.
-웃기는 녀석이로군. 뭐가 계획이라는 거냐?
‘넌 몰라도 돼.’
-그래 몰라도 돼!
소담검이 내 편을 들었다.
-조그만한 게 성질만 곤두서서는. 쯧쯧.
-뭐가 어쩌고 저째?
또 이런다.
한 시도 싸우지 않으면 덧이라도 나는 거냐.
아무튼 간에 원래의 계획대로 백련하를 교주로 만들고, 그 울타리 안에서 목표로 하는 힘을 얻어 자립하는 것은 물 건너갔다.
그걸 위해서 백련하에게 면죄부를 얻었는데 헛수고가 되었다.
이래서야 백혜향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백련하와까지 척을 지게 생겼다.
‘내가 미쳤지.’
살아남자고 기지를 발휘한 게 발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걸터앉았다.
“사마 소저?”
옆에 앉은 자는 사마영이었다.
나와 달리 그녀는 기분이 괜찮은지 표정이 생각보다 밝았다.
“……기분이 좋아보이는 군요. 소저.”
그런 나의 물음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헤헤. 가지고 싶은 것을 뜻하지 않게 독점한 기분이랄까요.”
‘…….!?’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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