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123
45화 피의 근원 (4) >
“……스승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해악천을 불렀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클클. 왜 싫으냐?”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건가.
“제게 그분의 피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같은 혈족이 아닙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느냐?”
“상관이 있지요. 먼 친척이자 먼 형제, 자매…”
“후대에서 둘로 나뉘어져서 촌수로 치면 수십 세대나 떨어졌는데 무엇이 문제라는 것이냐?”
“하나 시초가 같지….”
“이놈아. 예부터 가문의 혈속을 단단히 하기 위해 먼 혈계끼리의 결합은 종종 있는 일이다.”
“…….”
“황족들도 그렇고 정파의 당가나 모용세가만 하더라도 당가타나 연족마을을 이뤄 직방계들끼리 맺어져 피를 잇곤 하느니라. 무엇이 대수라고 정색까지 하느냐?”
구구절절 틀린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혈속을 강화하기 위해 정략 혼인을 할 생각이 없다.
더군다나 백련하나 백혜향이 그걸 받아들일 것 같은가.
-죽이려 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소담검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심각한 상황인데 너는 이게 재밌나 보네.
아무래도 해악천에게 여기에 따른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편이 나을 듯 하다.
“스승님.”
“왜 또 할 말이라도 있느냐?”
“혈속을 강화하는 것을 논하기 전에 두 아가씨들이 더 문제이지 않습니까?”
“아가씨들?”
“제가 혈마검을 얻었다고 그분들까지 선뜻 납득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놈아 율령이 괜히 있는 줄 아느냐?”
“그분들의 입장은 다르지요.”
애초에 그들의 목표는 혈교의 교주, 즉 혈마가 되는 것이었다.
한데 갑자기 교주가 아니라 혈속 강화를 위해 교주 배필이 되라고 한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떻게 나올까?
“적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원래부터 호전적인 백혜향은 둘째 치고 백련하도 적이 될 공산이 너무 높았다.
그녀에게는 믿었던 이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크흠.”
그런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해악천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썼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을까?
그때 해악천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고 노부가 네 녀석을 선택했을 것 같으냐?”
“각오를 하셨다고요?”
“그래. 이놈아. 그럼 제자 녀석이 혈마의 길을 걷겠다고 공언하는데, 아가씨를 위한답시고 네놈을 내치기라도 하길 바랬던 것이냐?”
‘!?’
해악천의 본심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가 혈교의 부흥을 더욱 우선시해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여겼다.
한데 그 역시도 척을 지는 것을 각오했다고 한다.
-……미친 노친네가 갈수록 의외네. 운휘 너를 진짜 아끼는 것 같은데.
소담검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나 역시도 느끼고 있다.
그래서 흔들린다.
‘망할……’
혈교에 충성해서가 아니라 그가 나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만큼 보답을 하고 싶어진다.
해악천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는데 해악천이 말했다.
“흥. 까탈스러운 녀석. 제자 시절 같았으면 혼구녕을 내주고 싶다만, 이제는 네녀석 말을 무시할 수 없으니 서로 한 발 물러나자꾸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부가 네게 혼인 얘기를 꺼낸 것이 단순히 혈족의 피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 같더냐? 네 말대로 두 아가씨들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해결하기 위함이라뇨?”
“어차피 두 아가씨들과는 부딪치게 되어 있다. 하나 가장 좋은 것은 어떠한 피도 흘리지 않고 너를 중심으로 혈교가 통합되는 것이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이파전도 아니고 삼파전으로 나뉘어져 내분이 벌어지면 결국 혈교 자체의 전력을 깎아먹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혈교의 재건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백혜향, 백련하 측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율령이 있다고는 하나 네놈 말대로 백련하 아가씨 곁에 있는 혈수마녀나 백혜향 아가씨 곁의 장룡 같은 놈들은 오래전부터 두 아가씨들을 모셔왔기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
“부딪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현재로서 가장 불리한 것은 네 녀석이다.”
해악천이 말하는 것은 각 파벌의 세력의 구도인 듯 했다.
현재 백혜향의 산하로 일존, 일혈성, 오혈성, 칠혈성 등이 따르고 있다.
그리고 백련하 아가씨의 산하로 이존, 삼혈성, 육혈성 등이 있다.
-네가 제일 불리하네.
당장에는 그렇다.
스승님과 사혈성 도장호가 있지만 세력에서 현저히 밀린다.
우리가 키운 전력의 대다수가 백련하의 곁에 있기에 숫적으로는 두 세력 어디에도 견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율령만을 믿고 안일하게 대처한다면 오히려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
가령 혈마검을 빼앗아 반전을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력 구도를 맞춰야 겠군요.”
“그래. 지금 상황에서는 구제양 놈과 유백 녀석을 네 휘하로 끌어들여야만 어느 정도 격을 맞출 수 있지.”
삼존 혈사왕 구제양, 이혈성 수라도 유백.
두 존성은 아직까지 누구의 밑으로도 들어가지 않았다.
“제 놈들 입으로 혈마검을 얻은 자를 따르겠다고 공언했으니, 녀석들과 접촉해서 산하로 거둬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한데 서로 한 발자국 물러서자는 말씀은 무슨 의미이십니까?”
무엇을 흥정하려는지가 궁금했다.
해악천이 비학월패를 내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네 녀석이 직계인지 아닌지 알아내서 만약에 직계라면 노부도 아가씨들과의 혼인을 통한 결속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마.”
“……그 말씀은?”
“만약 네 모친이 비월영종 출신이라면 네 녀석도 한 발 물러서거라.”
“한 발 물러서라는 게 혼인이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하!’
너무 저를 바보로 아시는 거 아닙니까?
이건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아닌가.
“스승님. 어차피 직계라면 굳이 아가씨들과 혼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엇이 스승님께서 한 발 물러서신다는 건지?”
나의 말에 해악천이 심드렁한 표정을 중얼거렸다.
“흥.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들이 싫다니까.”
‘!?’
이거 하마터면 당할 뻔 했다.
해악천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내게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두 사람까지는 바라지 않으마. 한 사람이라도 시도해보자꾸나.”
“시도요?”
“그래. 강제로 하라는 게 아니라 접촉을 해보자는 거다.”
“……그 한 사람이 누굽니까?”
“백련하 아가씨다.”
아아…..
어떻게 짐작을 벗어나지 않는 걸까?
“백련하 아가씨는 전대 교주님의 남은 혈육이다. 정통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가장 네놈에게 호의적이기도 하지.”
“……어떤 점이 호의적이라는 거죠?”
“노부가 눈치가 없는 줄 아느냐? 아가씨가 네놈에게 대하는 태도와 쳐다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느니라.”
이렇게 눈치가 빠른 분이 여태 혼자이신 이유가 궁금하다.
한데 여기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스승님. 가져오라는 혈마검을 제가 취했는데, 백련하 아가씨가 저를 달갑게 여길 것 같습니까?”
아까도 그리 이야기 했건만.
그런데 해악천이 딱 잘라서 말했다.
“만약 아가씨께서 거절한다면 노부도 더는 말하지 않으마.”
이 이상은 양보를 할 수 없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백련하 아가씨가 만의 하나라도 해악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상황이 된다면 나는 꼼짝없이 그녀와 혼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에구구. 우리 사마영이 어째? 그 불여우랑 백련하와 엮일 일이 없다고 좋아했는데.
소담검의 그 말에 나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해악천이 혼인에 관해서 더는 말을 꺼내지 않게 할 방법을 말이다.
“스승님.”
“받아들일 것이냐? 받아들이지 않을 거냐? 그것만 이야기 하거라.”
“하나만 말씀드려도 괜찮습니까?”
“흥! 이놈아. 잔머리를 굴려도 소용없느니라.”
“들으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그런 나의 말에 해악천이 의아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사마 소저가 절 좋아합니다.”
“사마 소저? 사마영을 말하는 것이냐? 걔가 너를 왜 좋아….뭣?”
해악천이 화들짝 놀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나와 오직 그뿐이었다.
사대 악인 중 하나인 월악검 사마착의 딸이라는 것을 알기에 해악천 역시도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대했었다.
해악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호통을 쳤다.
“네놈이 제정신이 있는 것이냐?”
“스승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그런 내 말에 선실 바깥을 의식했는지 해악천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놈아. 사대 악인이다. 사대 악인!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 줄 아느냐?”
당연히 모를 리가 있나.
악인이라는 칭호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가 틀리면 사람을 죽이는 일을 예사로 여기는 자들이었다.
누구에게도 통제되지 않고 제멋대로이기에 무림인들을 물론이거니와 중원인들 모두가 사대 악인을 두려워했다.
“뭘 했길래 그 아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게야?”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의 대답에 해악천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 아이는 사대 악인의 여식이야. 괜히 함부로 건드렸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정을 붙이지 않게 거리를 두거라.”
“계속 거리를 뒀습니다.”
“그런데 너를 왜 좋아하는 게야!”
“사마 소저의 마음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됐다. 아직까지 만난다거나 하는 교류가 없었다면 그 아이에게 괜히 여지를 주지…..”
“스승님.”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게야?”
“사마 소저가 아까 전에 제게 입맞춤을 했습니다.”
‘!?’
폭탄 같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해악천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두통이라도 난 것처럼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사마영을 방패삼아서 미안하긴 하지만 이런 강경한 수라도 써야지 해악천이 더는 혼인을 거론하지 않지 않겠는가.
해악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너란 녀석은 대체….”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우르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선실로 누군가 다가와 문을 두드렸다.
“이야기는 뒤로 미루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사혈성 도장호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배에 승선해 있던 교인들이 갑판으로 전부 나가고 있었다.
해악천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전방에서 커다란 배 세 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설마 수로채인가?”
해악천이 말한 수로채란 장강십팔수로채(長江水路十八寨)를 뜻할 것이다.
그들은 장강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수적이었다.
무림인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흑도의 무리들로 혈교가 없는 사파에서 녹림(綠林)과 더불어 가장 큰 규모의 세력을 자랑하는 단체 중 하나였다.
장강으로 이동하는 이상 그들과 조우할 수 있음은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었다.
“안개가 많이 걷히긴 했지만 아직 잘 보이지 않습니다. 수로채일 수도 있으니, 만약을 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나중에 이야기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나와 해악천, 도장호는 급히 선실 바깥으로 나갔다.
갑판 위에는 이미 교인들이 무장을 하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마영도 나와 있었는데,
-후다닥!
나를 보고서 얼굴을 붉히더니 멀리 도망가버렸다.
-부끄러운 가봐. 귀엽네.
본인이 저지르긴 했어도 입맞춤을 한 것이니 저런 반응도 이해가 간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저러니까, 괜히 나도 멋쩍여져서 그녀를 쳐다보기 힘들었다.
해악천은 그런 나를 보고서 혀를 찼다.
“이쪽으로 오십쇼.”
선미 쪽으로 가보니 과연 멀리서 배로 보이는 그림자와 불빛 등이 보였다.
“배의 깃발은 보이나?”
“어두워서 돛대의 위쪽은 보이지 않는군요.”
돛대가 보인다면 깃발로 수로채인지 확인할 수 있다.
한데 아직까지 새벽이라 어두웠고 안개가 완전히 걷히지 않아서 정확히 알기가 힘들었다.
도장호가 교인들에게 소리쳤다.
“북을 두드리고 대비해라.”
“충!”
그 말에 교인들 중 일부가 배에 설치된 북을 두드렸다.
-둥! 둥! 둥!
-왜 두드리는 거야?
상단의 배나 관련이 없는 운송 배들이라면 부딪치지 말라고 표시하는 거다.
밤이나 안개가 짙을 때 쓰는 신호수단이다.
안 그러면 배끼리 부딪쳐서 위험할 수도 있다.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멀리서 보이는 배를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둥! 둥! 둥!
저쪽 배쪽에서도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도장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수로채가 아닌 모양입니다.”
수로채였다면 북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뿔피리를 불고 전투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소리를 내지 않고 부딪치기 위해 다가오던가.
“흥! 그딴 수적놈들이 뭐가 두렵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해악천도 귀찮은 일을 피한 것 같아 표정이 한결 밝아보였다.
배를 지휘하고 있는 선장이 교인들에게 소리쳤다.
“배를 우현으로 이동시킨다!”
“충!”
선장의 지휘 하에 교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돛의 방향을 바꾸었다.
얼마 있지 않아 배의 방향이 조금씩 우측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배들도 마찬가지로 좌측으로 움직이며 서로가 부딪치지 않도록 떨어져갔다.
그렇게 배가 점점 가까워지며 서로 갈 길을 가나 싶었다.
배가 가까워지며 양옆으로 교차하려는 순간이었다.
“사존!”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응?”
해악천이 인상을 찡그리고서 성큼성큼 갑판 옆쪽으로 걸어갔다.
나 역시도 따라갔다.
외침 소리가 들린 상대편의 배 위를 쳐다본 나의 눈에 갑판 위로 흰 면사를 쓰고 있는 백색 경장의 여인들과 그 앞에 온통 시커먼 옷을 입은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
여인은 다름 아닌 혈수마녀 한백하였다.
그때 한백하의 옆으로 다가온 한 여인이 면사를 위로 걷어올렸다.
‘이런……’
그녀는 바로 백련하였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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