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163
57화 아버지와 아들 (3) >
참 기분이 묘하다.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서 친부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야 진정한 소종주를 만났다는 듯이 풍영팔류종의 몇몇 유파장들은 감격스러운 표정마저 짓고 있었는데, 이런 광경에 얼떨떨하기마저 했다.
-뭘 부담스러워해. 다 네 자리를 찾은 거지.
‘내 자리?’
-그러고 보면 너도 참 전생에 지지리도 운이 없었네. 어쩌다가 그렇게 비참해 진 거냐?
소담검의 말이 맞다.
회귀 전에는 여러 사건들로 인해 불운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무쌍성에서 무림 연맹과 동맹을 맺지 않았다거나, 내가 단전이 파훼되지 않았다거나 여러 불운한 요소들이 모여서 회귀 전의 끝이 비참했다.
사실 회귀 전에 그런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지. 우리가 있어서 극복한 거지. 안 그래 남천?
-흠흠. 그 정도까지야. 우리는 그저 거들 뿐이다.
-뭐가 거들어. 성인군자 납셨네.
녀석들이 투닥거리고 있는데, 어떤 이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팔대고수의 공동제자 이정겸과 열왕패도의 손자 진용이었다.
워낙 사태가 급작하게 돌아가던 찰나라 나 역시도 이들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쟤네 풍영팔류종의 후계자 자리 노리고 있었잖아.
‘아!’
원래부터 친부를 만나기 위해 후계자 시험에서 질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나니 저들은 실컷 시험을 치르고 헛물을 켠 셈이 되어버렸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었다.
과연 그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그때 이정겸이 포권을 취하며 친부 진성백에게 말했다.
“아드님을 찾게 된 것을 감축드립니다. 선배님.”
“고맙네.”
“하 형도 부친을 만나게 되어서 축하드립니다.”
의외로 이정겸은 담담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물론 두 사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종주님. 한데 이렇게 되면 시험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진용은 다가올 때부터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성백에게 항의를 했다.
-쳐다보는 표정이 엄청 띠꺼운데.
원래부터도 감정을 잘 드러내는 녀석이다.
기껏 힘들게 시험을 치렀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충분히 이해는 된다.
진성백 역시도 이를 염두 했는지 미안함을 드러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아들을 찾게 되면서 자네들의 노고가 헛되이 되었군.”
“아닙니다. 좋은 날에 어찌 그것을 탓하겠습니까?”
대범하게 말하는 이정겸.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니, 오히려 무슨 꿍꿍이가 있어보였다.
하지만 진성백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를 좋게 보았는지 말했다.
“여기까지 고생한 것도 있으니, 무언가 대가는 있어야겠지. 본 종의 후계자 자리는 일인전승이기에 기회를 줄 수 없지만 원한다면 팔류의 무공 중 원하는 한 가지를 전수해주겠네.”
그런 그의 제안에 진용이 못내 아쉬워하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종주님.”
사실 이 제안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후계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팔대고수 중 한 사람인 무정풍신에게 무공을 전수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제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네. 저 녀석.
마지막 시험을 치렀어도 가장 떨어질 확률이 높았던 진용이다.
어찌 본다면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면서 가장 득을 봤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정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선배님의 배려에 감사드리지만, 저는 사양토록 하겠습니다.”
“배우지 않겠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스승님의 명으로 오기는 했으나, 지금 익히고 있는 무공조차 아직 대성하지 않았기에 욕심을 부려선 안 될 것 같습니다.”
“허어.”
진성백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도 그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쉽게 포기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기는 했다.
‘……대성이라.’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현재 가지고 있는 무공들 중 극성으로 대성한 것은 없었다.
팔뢰단검술, 섬영비도술, 성명검법, 해왕명륜권, 진혈금체.
그리고 상단전을 개방해야만 펼칠 수 있는 혈천대라공.
배운 것들 중 절반 이상이 최고의 무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 끝을 본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라. 운휘.
‘응?’
-전 주인께서도 다양하게 무공을 접해보는 것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하셨다. 애초에 무공은 끝이라는 게 없다고 들었다.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내 근간을 발전시켜 나가라. 그렇다면 길이 보일 거다.
‘끝이 없다라……’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마음이 확고해진다.
지금 내가 무공으로 가야 할 길이 말이다.
-가야 할 길?
가장 내 무공의 토대가 되는 것은 성명신공이다.
과거 남천검객조차 오르지 못한 성명신공의 7성의 초입을 어렴풋이나마 보았지만, 아직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정겸은 전음으로 무언가를 진성백에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성백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모든 걸 다 이야기했는지 이정겸이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부디 무쌍성과 본 맹이 다시 좋은 관계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생각은 해보겠네.”
“감사합니다. 혹시 바쁘지 않다면 하 형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저와 말입니까?”
갑자기 나와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지?
진성백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우리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풍영팔류종의 성탑 뒤편으로 도착하자마자 난 물었다.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런 나의 말에 이정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한 동안은 이런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길 것 같지 않아서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이정겸이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형은 무림 연맹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단도직입적인 그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이것을 묻는 이유는 내가 혈교와 관련이 있다고 내몰려진 비월영종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제가 만약 하 형의 입장이라면 무림 연맹이 굉장히 싫을 것 같더군요. 어찌 보면 하 형의 집안을 풍비박살 내는데 일조를 한 원인이니까요.”
제대로 인식하고 있긴 하구나.
무림 연맹의 동맹 요청이 없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나는 처음부터 풍영팔류종의 소종주로 커왔을 지도 모른다.
이정겸을 보니 애써 포장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솔직히 그리 좋은 감정은 없습니다.”
그런 나의 말에 이정겸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역시군요.”
“그렇다고 이 형을 특별히 싫어하거나 원한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가 그때의 일과 관련이 있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정겸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저도 하 형이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할까요?”
음.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굳이 이것까지는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겠지.
이정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의아하게 그 손을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예전에 스승님을 따라서 서역에 갈 일이 생겼는데, 서역인들은 친분이 있고 상대를 존중할 때 이렇게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하더군요. 우리말로 하면 악수라고 하겠군요.”
특이한 인사법이었다.
나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이런 인사법을 청하는 듯 했다.
이에 나도 손을 내밀고 이정겸의 손을 잡았다.
이정겸이 손을 잡고서 내게 말했다.
“부디 이 관계가 유지되었으면 좋겠네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요?”
“오늘 치르지 못했던 마지막 시험을 목숨을 걸고 치르게 되겠죠.”
게슴츠레 뜨고 있는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냥 호의적인 것만이 아니라 나와 승부를 겨루고 싶다는 호승심이 보였다.
-꽉!
붙잡고 있는 서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게선 어떠한 방심도 없었다.
그러니 목숨을 건다는 표현을 썼겠지.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나 역시 바람을 담아서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 모두가 서로 어렴풋이 다가오는 먼 훗날을 직시하고 있었다.
언젠가 부딪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 *
섬경무종의 성탑 꼭대기.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집무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온 종주 구양경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젠장.”
그는 장식장으로 걸어가 그곳에 놓여 있던 화주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잔에 따르지 않고 화주를 들이켰다.
“하아…..이렇게 꼬이다니.”
가짜 무천검제 사건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는지 구양경이 다시 화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그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숨을 구제하려는 모습이 구차하기 짝이 없구나.”
‘!?’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구양경이 내공을 운기하며, 뒤를 향해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장법을 펼치려는 순간 그의 손목을 어둠 속에 있던 존재가 단번에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 손목을 비틀었다.
“크윽!”
구양경이 이를 뿌리치려다 눈앞의 존재를 확인했다.
“당신은?”
“쉿.”
얼굴이 반쯤 어둠에 가려진 정체 모를 자의 말에 구양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 모를 존재가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구양경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면 이 자를 매우 두려워하는 듯 했다.
그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남으려고 관계가 없는 척 연기를 잘하더군.”
질책하는 말에 구양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상대는 무정풍신입니다. 게다가 이미 그 자, 아니 무악이라는 자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무슨 수로 이를 저지한단 말입니까?”
말하는 투로 보면 그 역시도 무악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된 듯 했다.
아니 사실은 정말로 그 정체를 처음 알았다.
가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전 오대 악인 중 한 사람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림자로 가려진 존재가 혀를 찼다.
“기껏 공들였던 것들이 모두 무산되었군.”
“…….그 자리에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쌍성 사대 종주 중 한 사람이라는 작자가 무능하기 짝이 없군.”
“큭.”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구양경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고수였다.
‘그럼 네놈이 직접 진성백을 상대해보면 알 것 아닌가.’
차마 그 말은 내뱉을 수가 없었다.
섣불리 자극했다가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던 존재가 무언가를 그에게 내밀었다.
검은 복주머니였다.
“이건?”
“지금부터 네놈이 해야 할 일이다.”
그 말에 구양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악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저도 노출될 수 있는데.”
“그건 내가 처리할 것이다. 네놈은 주어진 일에 집중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구양경이 대답하자 그림자 속의 존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집무실의 문으로 이동했다.
그가 입고 있는 복장은 섬경무종의 무사들이 입고 있는 옷이었다.
속으로 빨리 나가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는데, 그 자가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말했다.
“깜빡할 뻔 했는데, 천무성이 살아있더군.”
“저, 저도 몰랐습니다. 그때 죽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
“무악이 우릴 속였군.”
“…….”
“무엇이 놈에게 있기에 지금껏 살려뒀을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체 모를 자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구양경은 힘이 풀렸는지 벽에 기대어 미끄러져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쥐어있는 검은 복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끈으로 묶여있는 그것을 풀자, 접혀져 있는 서지와 갈색 빛깔의 작은 환단이 들어 있었다.
접혀 있던 서지를 펴서 읽어 내려가는 구양경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 * *
그 날 해질 무렵,
나는 풍영팔류종의 집무실에서 친부인 진성백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장내를 정리하고 사로잡은 가짜 천무성, 즉 무악의 단전을 폐한 후에 그를 가둬두는 과정이 있었기에 이렇게 대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자를 심문하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아니다. 왕 종주가 맡기로 했으니 괘념치 않아도 된단다.”
사대 무종 중 하나인 해왕성종의 종주 왕처일이 그를 심문하기로 했나보다.
아마도 나와 친부가 해후를 가지라고 배려한 듯 했다.
진성백이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그 인피면구는 벗어도 된다.”
역시 그는 내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나는 안대를 먼저 벗고서, 귀밑을 조심스럽게 잡고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떼어냈다.
안대와 인피면구를 벗자 진성백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게 네 얼굴이구나.”
내 진짜 얼굴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친부인 그 자신과 어머니를 어떻게 닮았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많이 닮은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는데, 소담검 녀석이 닮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소익헌을 만났을 때도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놓고선.
이제 그와 둘만 있게 되었으니 물어도 될 것 같다.
“……어머니가 익양소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이게 제일 궁금했다.
그가 나에게 정파에 있어야 할 아이라고 말했던 것 때문이다.
그런 나의 말에 진성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미안하구나.”
“……왜…..왜 알고 계셨는데 어머니를 그렇게 내버려두신 겁니까?”
나는 이것을 너무나도 알고 싶었다.
그런 나의 말에 목이 메었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비월영종의 축출되던 그 날…..나는 성탑의 지하에 감금되었다.”
“성탑의 지하에?”
이건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자그마치 일 년이었다.”
“일년씩이나 말입니까?”
그렇게 길게 누가 아버지를 가둬두었단 말인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진성백이 말했다.
“네 조부, 즉 내 아버지께서 나를 그곳에 가둬두었다.”
“어째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거다. 내가 네 어미와 함께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던지. 아니면 유일한 성탑의 후계자가 비월영종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각 종파에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아아…..
이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아버지 역시도 비월영종의 사위가 되었으니, 노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 년이 지난 후 금옥에서 나오게 된 나는 네 어머니의 행방을 찾았다. 사대 무종을 비롯해 본 성의 감시가 있었기에 대놓고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이해가 간다.
당시에 아버지는 팔대고수가 아니었다.
무쌍성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겨우 네 어머니를 찾았을 때는 익양소가의 첩이 되어 아이를 낳고 지내고 있더구나.”
눈시울이 붉어진 진성백의 눈동자에서 그리움이 보였다.
진성백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못난 애비는 몰랐다. 네가 내 아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머니를 원망했던 겁니까?”
“아니다.”
“아니라고요?”
“그때 너를 안고 있는 네 어미와 소익헌이라는 남자는 너무도 행복해보였다.”
“…….”
“이 애비는 네 어미를 지켜주지 못하고 무력하게 갇혀있을 때, 그 자와 행복한 모습을 보니 차마 나는 네 어미를 볼 낯이 없었다.”
진성백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모습에서 진심으로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살아남아 행복을 되찾은 네 어미를 다시 수렁 속으로 나는 데려올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 애비가 너무 무력했다.”
나도 조금씩 목이 메었다.
친부인 진성백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후로 그가 얼마나 무공에 매진하고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지가 짐작이 갔다.
“다시는 본 종에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하기 위해 나는 무공에 매진했다. 폐관에 들어가 밤낮으로 무공만을 단련했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할 만 한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네 어미의 부고를 들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겨우…..겨우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었을 때 네 어미는 세상에 없었다.”
그가 얼마나 실의에 빠졌을지 알 것 같다.
그러니 지금까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살아왔겠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당장에라도 목숨을 던지고 네 어미를 만나고 싶었단다.”
“어찌!”
이런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을 줄이야.
순간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진성백이 내 손등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그때부터 애비의 머릿속은 오직 복수로만 채워져 있었다. 네 어미의 핏줄인 너를 조금도 생각지도 못했다.”
비월영종과 어머니를 그렇게 몰고 간 자들을 향한 복수심.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내 손등을 잡고 있는 진성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령, 아니 네 어미가 너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살았을 지를 생각하니, 이 애비는 죽어서도 네 어미와 너를 볼 낯이 없구나.”
슬픔이 극에 달한 그를 보며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처음에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는 마냥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책임감이 강하다는 사람이, 그렇게 강해졌다는 사람이 끝끝내 어머니를 찾지 않은 것인가 증오스럽기마저 했다.
그러나 이렇게 고통 속의 세월을 살아왔을 줄은 몰랐다.
무정풍신이라는 별호는 그가 살아온 실의의 세월을 뜻했던 것이다.
“…….이 애비가 원망스럽지 않느냐?”
그의 물음에 나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내 손등에 얹고 있는 손등 위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원망스럽습니다.”
“…….”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에 나는 말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셨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제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너.”
“아버지.”
나의 그 말에 진성백이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라는 말에 나 스스로도 왈칵 올라왔는데,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마주보고서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니 서로 겸연쩍었는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진성백이 내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어미가 나보다 낫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이렇게 훌륭하게 너를 키워내지 않았느냐? 남천검객의 후계자로 정파 무림의 신성이 되었다니. 이 애비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그 말에 나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진성백은 나를 그저 정파의 새로운 신성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당연했다.
그 이면에 감춰진 것을 어찌 알겠는가.
“비록 네가 사대 악인인 월악검의 여식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라기는 했다만, 이 애비는 네가 원한다면 누구와 만나도….”
“아버지.”
“왜 그러느냐?”
“저도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뭇 진지한 나의 목소리에 진성백이 의아해했다.
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외조부께서 살아계신 것도 말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운을 떼면 좋을까?
역시 그것부터 말해야 겠지.
“그 전에…..아버지께서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애비에게 더는 놀랄 일이 없을 것 같구나.”
확답을 내리는 모습에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왼쪽 눈을 감고서 염(念)을 일으키며 상단전을 개방했다.
그 순간 내게 변화가 일어났다.
무덤덤하게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 진성백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이……게 대체…..”
피처럼 붉게 물든 머리카락과 선홍빛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진실을 밝혔다.
“제가 당대 혈마입니다.”
“뭐엇?”
더 이상 놀랄 게 없다던 아버지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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