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179
62화 혈마 대전 (4) >
굳어진 얼굴의 삼존 혈사왕 구제양.
이윽고 그가 얼굴을 풀더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해골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알 수 없구려. 공자. 혈주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역시 시치미를 뗀다.
하긴 공개적인 곳에서 내가 자신에게 혈주라고 했는데, 이를 덥석 인정할 리는 없었다.
구제양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한 채 계속 손가락이 지팡이의 머리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천철검의 검 끝을 그에게 겨냥하고서 말했다.
“지팡이에서 손 떼.”
그런 나의 경고에 혈사왕 구제양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공자가 내게 왜 이런 적대감을 드러내는지 모르겠지만, 노부는 공자를 혈마로 인정하지 않았소. 계속 그런다면 노부로서도 유감을 표현할 수밖에 없소.”
-스스스스!
구제양의 해골 지팡이의 뻥 뚫린 눈 부근에서 보랏빛 아지랑이가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역한 냄새가 났는데, 아무래도 독(毒)인 것 같았다.
그때 귓가로 해악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나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악천이 예전에 사존 칠혈성들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해악천은 그들 중에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로 혈사왕 구제양을 꼽았었다.
중원에서 세 손가락에 든다는 독수의 달인이자 손짓 한 번으로 수십,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자라고 했다.
어떤 의미로는 팔대 고수 이상으로 괴물의 영역에 있는 자들이 독공의 달인들이었다.
“공자. 검을 내리시오.”
구제양이 살기를 풀풀 흘리며 내게 말했다.
이에 나는 눈짓으로 치켜들고 있던 검을 내리고 있는 백련하를 가리켰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 웬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하오? 아…..설마 공자는 노부가 적통을 이은 아가씨를 지지하여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이오?”
능글맞게 대응하는 구제양.
그는 어떠한 동요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치 혀로 나를 편협한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
“공자의 심정은 이해하오. 적통이 아닌 그대가 유일하게 백련하 아가씨를 앞설 수 있는 방법은 혼자 혈마검의 인정을 받은 것인데, 그게 아니게 되었으니 말이오. 하나 이런 식으로…..”
“하하하하하하핫.”
나는 그의 말을 끊고서 웃음을 내뱉었다.
구제양이 그런 나의 태도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웃음을 멈춘 나는 백혜향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때 그 가짜 놈을 기억합니까?”
나의 물음에 백혜향이 고운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말했다.
“그놈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놈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를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혈사왕 저 자가 그 가짜 놈과 한 패이니까요.”
“뭐?”
백혜향이 날카로워진 눈으로 혈사왕 구제양을 쳐다보았다.
구제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해골 지팡이를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공자. 지금 그대는 선을 넘고 있소.”
“무악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텐데?”
그런 나의 말에 지팡이를 들어 올리던 구제양의 손이 잠시 멈칫 했다.
내 입에서 무악이 거론될 줄은 몰랐겠지.
구제양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지만 그는 일부러 이를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무악이 대체 누굴 말하는 거요?”
나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오대 악인 중 한 사람이었던 무악을 모른다니 시치미를 뗄 거면 그럴 듯하게 해야지.”
그 말에 주변이 술렁였다.
존성들이 과거 오대 악인이라 불렸던 백면귀인 무악을 모를 리가 없었다.
놈이 동요하기는 했나 보다.
차라리 나라면 ‘오대 악인 무악을 말하는 거요?’ 이런 식으로 되물었을 것이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의식했는지 구제양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걸 노부가 몰라서 하는 소리요? 무악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한 둘이 아닐 터인데,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자를 말하면 그 자라 생각할 것 같소?”
“같은 금안의 조직 사람인데, 이렇게 매정해서야 쯧쯧.”
비꼬는 듯한 나의 말투에 놈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자극 받을수록 나야 좋았다.
그때 입을 다물고 상황을 관망하던 일존 파혈검제 단위강이 입을 열었다.
“방금 금안이라고 하셨소?”
뭐지?
나는 구제양을 동요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일부 존성들이 금안이라는 말을 꺼내며 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잘린 팔을 지혈하고 있던 일혈성 장룡도 그것에 관심을 보였다.
“금안의 조직이라니 무슨?”
영문을 몰랐지만 나는 계속 말을 했다.
이번에는 존성들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얼마 전 무쌍성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무악이 사대 무종 중 하나인 가짜 천무성으로 분해, 혼란을 야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나와 백혜향 아가씨가 놈과 얽히면서 실패로 돌아갔죠.”
그 말에 일존 단위강을 비롯해 혈성들이 백혜향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백혜향이 무쌍성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천하의 그녀가 감금당한 것도 모자라 목숨마저 위태로웠었는데, 그걸 주절주절 이야기할 위인도 아니었다.
“맞아. 무쌍성에서 그랬지.”
애써 내가 그걸 들춘 것은 아니었기에 백혜향이 내 말에 동조해주었다.
백혜향이 동조해준 덕분에 내 말에 신빙성이 붙었다.
혈사왕 구제양을 쳐다보니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계속 지팡이 머리에서 움직이는 게 초조함이 드러났다.
이 초조함 때문인지 구제양도 마냥 내 입을 열어둘 수 없다고 여겼는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이 무쌍성에 있었던 것이 대체 노부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요! 계속 이런 식으로나온다면 노부도….”
나는 놈의 말을 끊고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때 붙잡혔던 무악이 한 가지를 실토했습니다.”
“이 자가 정녕!”
구제양이 한 발자국 나서려는데,
-쾅!
해악천이 바닥을 향해 크게 진각을 내려찍으며 말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혈마께서 하시는 말을 경청한다고 네놈에게 해가 될 게 있느냐? 구제양.”
“기기괴괴! 애초에 저 자와 네놈은 한 패가 아니더냐? 한데 노부의 명예를 더럽히려고 하는데, 그건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냐!”
구제양이 노성과 함께 해골 지팡이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때 날카로운 예기가 좌중을 휘어 감았다.
그게 기운이 어찌나 살벌한지 주변에 있던 모두가 그 진원지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일존.’
예기를 일으킨 자는 다름 아닌 파혈검제 단위강이었다.
그가 내뿜는 강렬한 기운에 모두가 위압감에 사로잡힐 지경이었다.
-엄청 강해 보이는데?
‘……벽을 넘었어.’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다.
감고 있는 금안으로 보는 그의 기운은 환한 빛 그 자체였다.
운기 경로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한 빛을 가진 자는 아버지 무정풍신 진성백과 월악검 사마착 외에는 본 적이 없다.
“…….일존.”
구제양도 그의 무력을 가벼이 여길 수 없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일존 단위강이 그에게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도 공자의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네. 하면 자네의 독수를 받아야 하는 겐가?”
“……..”
구제양의 눈알이 좌우로 굴러갔다.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여겼는지 이내 지팡이를 다시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내게 나지막하게 경고를 했다.
“이렇게 음해하여 노부의 결백이 드러난다면 각오해야 할 거요.”
“각오는 그대가 해야지.”
“뭐라!”
“왜 내 입을 막고 싶나?”
-으득!
구제양이 노기를 터뜨리려다 주위를 의식했는지 이를 갈면서 입을 다물었다.
독수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지 모르겠지만 입으로 나를 이기려면 더 갈고 닦아야 할 거다.
나는 다시 소리 높여 말했다.
“그때 무악은 혈마검을 탈취하는데 실패한 것이 혈교로 보낸 혈주가 백혜향 아가씨 한 사람만 움직이게 하지 않고 두 후보자들 모두를 움직여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
나의 폭로에 모두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바뀌었다.
백련하 측도 백혜향 측도 혈마검을 탈취하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었다.
반으로 나누어진 혈교를 통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진 것이 바로 혈마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발점이 혈사왕 구제양과 수라도 유백이었다.
이로 인해 두 파벌이 동시에 움직였었다.
나의 이런 폭로에 존성들의 시선이 둘로 나뉘어 구제양과 유백에게로 향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뜬금없이 의심의 화살의 일부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수라도 유백이 당혹스러워했다.
이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혈성은 아닙니다.”
그 말에 일존 단위강이 물었다.
“그걸 어찌 확신하는 거요? 공자.”
“이건 심증입니다.”
“심증? 심증만으로 두 존성들을 몰아붙이는 것이 옳다고 보오?”
“아뇨. 심증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백혜향 아가씨가 혈마검을 결국 들지 못했을 때, 이혈성께서는 실망했지만 체념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기색을 보였죠.”
수라도 유백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첫 번째 이유였다.
그는 백혜향이 혈마검의 인정을 받은데 실패했을 때, 그저 안타까워하는 모습만을 보였었다.
그런 나의 말에 구제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허술하기 짝이 없구려! 고작 그런 이유로 노부가 그 혈주라는 자고, 그 금안의 조직과 관련이 있다고?”
화가 난 것처럼 언성을 높이는데 그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이 발언만으로는 절대로 자신을 압박할 수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나 역시도 백련하 아가씨가 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실망했을 거요. 여기 계신 난마도제 서 형도 그렇고 삼혈성, 육혈성도 마찬가지요. 한데 고작 이혈성의 반응을 보고서 이 노부를 의심하고 음해해!”
나는 이를 개의치 않고 모두에게 말했다.
“무악이라는 자는 가짜 천무성의 탈을 쓰고 무정풍신을 제거하고, 무쌍성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했죠. 내가 만약 그들이라면 어떤 식으로 혈교를 좌지우지 하는 방법을 택할까?”
일존 단위강이 무거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방법이오?”
“두 교주 후보자들이 여인이기에 무쌍성에서처럼 가짜를 내세우긴 힘들 테니, 유일한 방법은 하나죠. 둘 중 한 사람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만들면 됩니다.”
“꼭두각시!”
“특히 움직이기 쉬운 말일수록 좋겠죠.”
나의 그런 말에 백련하 산하의 존성들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그녀를 모욕했다고 여겨서일지도 몰랐다.
특히 백련하의 충실한 오른팔인 혈수마녀 한백하는 나를 찢어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과욕에 눈이 멀었군요. 공자! 아가씨께서 혈마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니 못하는 말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녀를 다그쳤다.
“한백하! 당신의 그 과도한 충정이 그녀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겠나?”
‘!!!’
공력을 실은 일갈이었기에 순간 그녀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한백하를 무시하고서 나는 서갈마를 비롯한 백련하 산하의 존성들에게 말했다.
“이미 혈마검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검을 잡지 못했던 백련하 아가씨가 느닷없이 검을 쥐어보겠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까?”
“그건…..”
내 물음에 난마도제 서갈마가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역시도 이것이 이상하다고 여겼나보다.
이미 선택을 받지 못했고 그녀 스스로가 내게 혈마로 충성을 맹세했었다.
한데 내가 살아서 돌아왔음에도 그녀는 무리해서 억지로 검을 잡으려 들었다.
일부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 구제양이 입을 열었다.
“혼자 망상에 빠졌구려. 공자. 그대는 정녕 혈마의 자격이 없소이다. 혈마검은 요검이오. 그런 검을 내가 무슨 수작으로 아가씨를 움직여서 잡게 한단 말이오? 안 그렇습니까? 아가씨.”
구제양의 부름에 백련하가 입을 열었다.
“…..공자. 제가 혈마검의 인정을 받은 게 그렇게 미덥지 못했나요?”
실망스럽다는 백련하의 목소리.
구제양은 나를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비웃음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도 그렇고 모두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게 있군.”
“뭐?”
“혈마검의 인정을 받았다는 게 그저 검을 들 수 있으면 인정을 받은 줄 아나?”
“지금 무슨 소리를?”
나는 백련하가 들고 있는 혈마검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했다.
“혈마검. 이제 참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아흑!”
백련하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손등이 검은 핏줄로 일렁이며 튀어나왔다.
혈맥이 폭주한 현상이었다.
“혈맥이?”
“아가씨!”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혈마검을 들고 있던 백련하가 혈맥이 폭주하는 현상이 벌어지자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구제양이 그러했다.
“이, 이게 대체….”
대체는 뭐가 대체야?
-기다리느라 지겨웠다. 인간.
혈마검의 그 말과 함께 백련하의 손등 핏줄이 터졌다.
핏줄이 터지면서 그녀의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놀랍게도 핏방울이 묻은 곳이 부식되는 것처럼 치칙 거리며 작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
떨어지는 핏방울들에서 역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독혈이 틀림없었다.
이게 그녀가 혈마검을 잠시나마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다.
“독수로 혈맥이 폭주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여겼나? 구제양, 아니 혈주!”
구제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겠지.
애초에 혈마검은 이딴 독혈로 수작을 부리면 자신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냐며 더욱 백련하의 혈맥을 폭주시키려 했다.
그때 나는 이 묘수를 떠올리고서 혈마검에게 잠시 멈추게 했었다.
그 결과 모두의 앞에서 놈의 수작이 드러났다.
이 자리에서 독혈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독에 능수능란한 자가 구제양 이외에 누가 있겠는가?
“네놈이 감히!”
-촥!
그때 백혜향이 어느새 놈을 향해 모조 혈마검을 휘둘렀다.
당혹스러워하던 구제양이 다급히 뒤로 신형을 날리며 그녀의 검을 피했다.
“네놈 따위가 저 아이를 건드려!”
나는 내심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정적이라고 여길 줄 알았는데, 그녀가 적의 손에 휘둘리는 것을 확인하자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다시 공격하려드는 백혜향에게 구제양이 다급히 소리쳤다.
“백련하 저 년이 죽어도 좋느냐!”
“뭐?”
“환마독에 중독된 자가 노부의 해독약이 없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느냐?”
그 말에 백혜향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특유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놈 팔 다리를 전부 잘라버리면 그 입에서 해독제가 튀어나올지 아닐지 알 수 있겠지.”
“그건 저랑 같은 생각이네요.”
그때 어느새 몰래 옆으로 다가간 사마영이 구제양의 요혈을 노렸다.
기척이 슬금슬금 움직인다 싶었더니 놈을 노린 거였구나.
“이 년들이!”
구제양이 기묘한 신법을 펼치며 그녀들의 공격을 피하더니, 도주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곳엔 그녀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썩어빠질 놈! 대갈통을 부숴주마!”
어느새 진혈금체를 펼친 해악천이 구제양의 머리로 커다란 주먹을 날렸다.
“큭!”
구제양이 다급히 몸을 뒤로 회전하며 이를 피했다.
바닥에 해악천의 주먹이 꽂히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쾅!
굉장한 위력이었다.
외공으로는 가히 정점에 이른 해악천이다.
주먹 한 대 잘못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 판국이었다.
“도망갈 생각은 버려라!”
그가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려 하자 그 앞을 난마도제 서갈마와 내가 가로막았다.
그야말로 퇴로가 전부 막힌 꼴이었다.
구제양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세게 흔들었다.
그러자 이상한 방울 소리가 같은 것이 울렸다.
-딸랑! 딸랑!
“아아아악!”
백련하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이마에 핏줄들이 보랏빛으로 팽창했는데, 그 상태가 굉장히 나빠 보였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독을 폭주시키려는 듯 했다.
구제양이 위협을 가하듯이 방울을 들고서 소리쳤다.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저 계집이 당장에 죽는 꼴을 보게 될….”
“그렇게 내버려둘 것 같나.”
“아니?”
어느새 백련하의 뒤에 일존 파혈검제 단위강이 서있었다.
뭘 하려나 싶었는데, 단위강이 양쪽 손으로 백련하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심후한 내력을 불어넣었다.
“아으으윽!”
“참으십쇼.”
단위강의 내공이 어찌나 심후했는지, 그녀의 코와 입, 그리고 귓구멍에서 보랏빛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머리로 파고든 독기를 몰아내는 일존이 소리쳤다.
“빨리 놈을 제압해라!”
“크하하핫! 수작질도 실패했구나!”
해악천이 광소를 터뜨리며 놈에게 신형을 날렸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비롯한 백혜향, 사마영, 난마도제 서갈마 등.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달려들으니 도저히 도망칠 방법이 없어보였다.
그 순간 구제양이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 타혈을 했다.
-타타타타탁!
“어지간히 나를 우습게 여기는구나. 독의 정수를 보여주마!”
타혈을 마친 순간 그의 얼굴이 검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더니 놈이 입고 있는 옷들이 전부 녹아내리며 검보랏빛으로 물든 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이한 현상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걸 본 백혜향과 해악천이 동시에 소리쳤다.
“독인이다!”
“물러나라!”
독인(毒人).
그것은 말 그대로 독으로 경지에 오른 자가 지향하는 신체였다.
수백, 수천 독을 조합하여 자신의 신체에 적응시켜 체외와 체내 모두를 극독이 흐르게 만드는 비술인데, 섣불리 접촉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었다.
이를 알기에 두 사람이 일단 물러서라고 외친 것이었다.
“늦었다. 나를 이렇게 몰아 붙인걸 후회하게 해주마!”
-슈우우우우!
독인이 된 구제양의 몸에서 매캐한 냄새와 함께 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뿌연 연기가 닿는 바닥에 변색되는 것으로 보아 역시 독무(毒霧)가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독무가 그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려 했다.
“이놈! 동귀어진이라도 할 작정이느냐!”
해악천의 일갈에 독무 속에 있는 구제양이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자신 있으면 이 안으로 들어와 보거라! 크하하하핫.”
그러는 사이 독무가 사방으로 점점 퍼지고 있었다.
저곳으로 들어간다면 필시 독기와 싸워야 하기에 불리해지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내버려둔다면 독무를 피하기 위해 놈을 놓칠 수도 있었다.
“흥!”
해악천의 근육이 점점 붉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진혈금체의 비기인 적혈금신을 펼쳐서 몸을 보호하여 독무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그보다 내가 먼저 몸을 던졌다.
“공자님!”
“멈춰!”
사마영과 백혜향이 동시에 외치며 나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나는 독무 속으로 들어왔다.
뿌연 독무 속으로 들어오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치이이이.
역시 피부가 따끔거린다.
독기가 어찌나 강한지 피부에 닿는 순간 체감이 된다.
구제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놈. 나를 방해한 주제에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오는 구나. 독기로 네놈 몸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즐겨주마!”
놈이 독무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기감을 교란시키려 했다.
시야도 보이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끈다면 당연히 독에 갈수록 중독되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놈이 모르는 게 있다.
-스륵!
“헛?”
나는 풍영보를 펼치며 단숨에 경신법을 펼치는 놈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독무로 시야가 뿌옇다고 해도 바로 코앞에서 대면하니, 놈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네놈이 어떻게?”
실망해서 미안하다만 내 금안을 속일 수가 없다.
독무로 시야를 가려도 빛으로 일렁이는 기운의 움직임은 숨길 수 있을 것 같나.
앞을 잡힌 구제양이 다급히 얼굴로 독수를 날렸다.
나는 남천철검으로 그의 독수를 쳐냈다.
-챙!
단순히 독만이 다가 아닌 것 같다.
닿는 피부가 철이 된 것 마냥 단단하다.
“독인을 우습게 보는구나. 내 피부는 금강불괴에 가깝다. 네놈이 내게 털끝이라도 상처를 낼 때면 독에 중독되어…..”
구제양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검보랏빛이 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 어째서 멀쩡한 거지?”
여전히 멀쩡한 내 모습에 놈이 의아해했다.
“왜 독에 빌빌거리며 눕기라도 할까봐?”
기관 장치에서 환골탈태를 한 이후로 내 육신의 회복력은 보통사람들과 확연히 달라졌다.
게다가 어지간한 독도 피부 이내로 침투하지 못한다.
내게 독을 중독시키고 싶다면 직접 상처를 내서 체내로 손을 집어넣는 수밖에 없을 거다.
놈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심장부를 향해 창처럼 독수 찔러왔다.
나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소용없다고 했을….”
-촥!
“끄억!”
안타깝게도 놈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달리 팔목이 잘려나갔다.
“잘렸네?”
놈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는 남천철검을 보고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끄으으…..그건 대체….”
신검합일(身劍合一)이다.
검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
네놈이 벽을 넘은 고수가 아닌 이상 내 검을 막을 순 없다.
“빌어먹을 놈! 그렇다면!”
-파파팟!
놈이 내게 잘린 팔에서 흘려 나오는 피를 흩뿌리며 경신술을 펼쳤다.
피에서 더욱 지독한 독기가 느껴졌기에 이를 피하고서 따라잡으려고 풍영보를 펼치는데, 놈의 몸에서 독무가 더 심하게 뿜어져 나왔다.
해악천의 말대로 더 많은 자들에게 피해를 주려는 듯 했다.
네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팟!
나는 놈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축아광회검!’
신로 성명검법의 제 6초식 축아광회검(逐亞廣回劍).
비기 십이천경검을 제외하고 신로 성명검법 중에서 가장 광활한 범위의 위력을 가졌다.
검이 빠르게 회전을 하며 회오리를 일으키며 놈을 노렸다.
“큭!”
구제양이 있는 힘을 다해 신형을 비틀며 이를 피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축아광회검은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콰아아앙!
‘!?’
축아광회검이 바닥에 닿는 순간 갑자기 검에서만 일어나던 검세의 회오리가 강렬한 풍압을 일으키더니 이내 나를 중심으로 하나의 태풍이 되었다.
평범한 바람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예기의 회오리였다.
-차차차차차창!
“끄아아아아악!”
예기에 휩쓸린 놈의 몸에서 검보랏빛 피들이 튀었다.
경로를 바꿔 검의 궤적을 위로 뻗자, 회오리가 이내 위를 향해 솟구쳤다.
-파파파파파파파파!
그와 함께 주변에 휩싸였던 뿌연 독무가 회오리에 휩쓸리며 위로 솟구쳤다.
독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대부분의 독무들은 회오리의 풍압 때문에 위로 빨려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슈우우우우우!
“아니. 이게…..”
어느새 독무 사이로 들어온 해악천의 모습이 보였다.
얼른 나를 돕기 위해서 들어왔는데, 검초에 의한 풍압으로 독무가 하늘 높이 솟구치자 놀란 얼굴로 위를 쳐다보았다.
“독무가….”
백혜향이나 사마영을 비롯한 가까이 있던 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쿵!
그때 예기의 회오리에 높이 솟구쳤던 구제양이 바닥에 떨어졌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고통스럽게 꿈틀대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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