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188
65화 즉위식 (1) >
정파 무림의 성지라 불리는 호북성의 무한시.
이곳은 무림 연맹의 성 내 본단 건물의 소회의실이다.
가운데 상석에 앉아 있는 위엄이 넘치는 중년인은 이곳 정도 무림 연맹의 수장인 무한제일검 백향묵이었다.
그리고 맹주 백향묵의 우측 편에는 훤칠한 미중년의 사내, 이군사 사마중현이 앉아있었다.
그의 맞은 편이자 백향묵의 좌측 편에 앉아서 위축된 얼굴로 있는 중년인은 바로 삼군사 백위향 장로였다.
“거듭 송구합니다.”
백위향 장로가 머리 숙여 맹주 백향묵에게 사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혈교의 잔당들이 일어서는 것을 뿌리 뽑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되려 무림 연맹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침묵하는 맹주 백향묵을 보며 백위향은 내심 초조해졌다.
‘아아아….이번 기회로 전공을 세워 총군사의 직책을 얻으려 했건만.’
그것이 수발자국 멀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총군사에 가까워지는 자는 이군사 사마중현이었다.
내군사 직을 맡으며 맹주를 가까이서 보필했던 자가 아닌가.
‘빌어먹을.’
화가 났다.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새로운 혈마가 말이다.
머리를 숙여 사죄를 하던 백위향이 고개를 들고서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맹주 기회를 주십쇼. 이제 놈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백 군사.”
그때 이군사 사마중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
삼군사 백위향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 부른 것이오?”
“당장 직책을 내려놓고 물러나야 할 만큼 심각한 우를 범하셨소. 한데 이 상황에서 또 다시 기회를 달라니 참 뻔뻔하기 그지없소.”
“말이 과하시오. 사마 군사.”
“과하긴 무엇이 과하단 말이오? 광서성을 통으로 내어준 것도 모자라 본 맹의 이름으로 혈교의 개파식을 만인의 앞에서 축하해주신 분이 말이오.”
“큭!”
“그뿐이오? 반환받은 포로들의 독을 완전히 해독할 때까지 한동안 혈교와의 전면전이 힘들어졌소. 무슨 낯으로 기회를 달라는 것이오?”
이군사 사마중현의 말대로였다.
포로를 받았지만 그들은 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혈교에 주기적으로 부분 해독제를 받아야만 목숨을 이어갈 수 있기에 사천당가에서 자체적인 완전한 해독제를 만들기 전까지는 혈교를 건드리기 힘들어졌다.
결과적으로 삼군사 백위향은 완전히 패배한 셈이었다.
“부끄러움을 아신다면 자중하도록 하시오. 백 군사.”
그를 너무 밀어붙였던 걸까?
삼군사 백위향은 오히려 반감이 생겨났다.
‘사마중현 이 작자가 지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군사의 직위를 얻기 위해 맹주로 하여금 나를 내치게 하려는 구나.’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여기서 실각되게 되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이 본 군사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소이까? 본 군사가 맹에 자리를 비웠을 때 돌아가신 총군사와 사마 군사 자네가 혈마검을 빼앗기면서 이런 사태까지 이어진 거라 할 수 있지 않나!”
“뭐요?”
그 말에 이군사 사마중현이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입을 다물어도 모자랄 판국에 이미 한참 전에 벌어졌던 일까지 들먹이며 책임을 회피하려들 줄은 몰랐다.
그와 대화를 섞어봐야 소용없다고 여긴 이군사 사마중현이 맹주에게 말했다.
“맹주. 아무래도 백 군사가 이번 실책으로 감정적으로 동요가 심한 것 같습니다. 잠시 책무를 내려놓고 쉬게 하는 편이….”
“사마중현!”
“언성을 낮추시오. 백 군사.”
두 사람의 신경전이 커지려하자 이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맹주 백향묵이 입을 열었다.
“그만.”
묵직한 한 마디에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에 두 군사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맹주 백향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은 모두의 책임이오. 어찌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 될 수 있겠소.”
“매, 맹주!”
그 말에 삼군사 백위향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무랄 것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덮어주려는 분위기로 보였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맹주 백향묵의 말에 두 사람 모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총군사의 부재가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소이다.”
정사 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간 장본인이자, 그 오랜 세월을 무림 연맹을 중원 무림 최고의 단체로 만들었던 제갈원명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무림 연맹은 커다란 힘의 한 축을 잃은 셈이었다.
두 군사도 그리 자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맹주 백향묵이 보기에 그들의 역량은 천재라 불렸던 제갈원명에 비하면 부족했다.
‘적의 손에 휘둘렸던 것이 얼마만이던가.’
근 이십여 년 만의 일이었다.
무쌍성과의 동맹 파기부터 혈마검 사태, 그리고 혈교의 부활까지 유래 없던 일들이 한 해에 모두 이뤄졌다.
조금씩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동안 오만하고 나태했다.’
마땅한 적이 없이 보내온 이십여 년의 세월.
하늘이 마치 이를 꼬집어 다시 무림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밀어넣는 듯 했다.
맹주 백향묵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전의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맹주?”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맹주 백향묵이 말했다.
“본 맹주와 더불어 연맹의 한 축을 담당하던 총군사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순 없을 것 같소.”
그 말에 두 군사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총군사의 직책.
그것은 명실상부 무림 연맹의 이인자의 자리였다.
커다란 실책으로 자신이 불리하다고 여긴 삼군사 백위향은 질투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군사 사마중현을 노려보았다.
이에 사마중현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도 이 상황에서는 자신이 그 중임을 맡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애초에 제갈원명 역시도 이군사인 내군사를 역임하다가 총군사의 직위로 오르지 않았던가.
“총군사는…..”
사마중현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포권을 준비했다.
“이 분이 맡으실 것이오.”
‘이 분?’
둘 중 한 사람이 맡을 거라는 예상이 빗나가며 두 군사의 인상이 굳어졌다.
맹주 백향묵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굳게 닫혀있던 소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한 인영이 보였다.
“군략은 무엇이냐?”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군사 사마중현과 삼군사 백위향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 스승님!”
“총군사!”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림자를 통과하며 들어오는 인영.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는 완고한 인상의 한 노인이었다.
겉모습만 봐도 장장 여든에서 아흔은 되어보였다.
“군략이 무어냐고 물었다.”
노인의 물음에 삼군사 백위향이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적을 효과적으로 몰아붙이고 아군이 승리하기 위한 책략입니다.”
백위향이 어떻느냐는 듯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이군사 사마중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마중현이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조직과 단체의 목표를 위하여 모든 전략과 기술, 병력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말에 노인이 정답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위향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런 그를 노인이 쳐다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이 어찌하여 커다란 우를 범했는지 알 것 같구나. 이십여 년이 지나도 불 같기만 하고 모자란 것이 채워지지 않았다.”
“큭…..”
‘빌어먹을 늙은이…..아직도 이런 훈계를….’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노환으로 쓰러질 것만 같은 저 늙은이는 무림 연맹의 전대 총군사인 방덕현이었다.
제갈원명과 사마중현의 스승이기도 했다.
맹주 백향묵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방 노사. 오셨습니까?”
“맹주께서는 기어코 이 노구를 부르시는구려.”
“당금의 사태는 절대 가볍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노사께서 복귀하시여 부디 중심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이 백 모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거듭 허리를 숙이며 부탁하자 방덕현이 못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늘그막에 증손주나 돌보며 지내려 하는데 노구를 끝까지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구려.”
“노사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앉으시죠.”
덕분에 우측에 앉아있던 이군사 사마중현은 옆 자리로 옮겨야만 했다.
순차적으로 한다면 총군사의 맞은 편에 그가 앉아야 했지만 삼군사 백위향과 당장에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방덕현이 자리에 앉자 맹주 백향묵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는데,
“혈교 건이라면 귀에 딱지가 얹을 만큼 들었소.”
“하면?”
“당장 시급한 것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겠소.”
“노사께서 고견을 주시지요.”
그런 맹주 백향묵의 말에 총군사가 된 방덕현이 소회의실의 책상에 올려진 중원 전도의 꽂혀진 푸른 깃발들을 뽑아서 옮겼다.
푸른 깃발들은 광서성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건?”
“광서성을 거점으로 시간을 벌은 혈교가 다음으로 할 일은 당연히 세력을 넓혀나가는 것이지요.”
“사파 규합!”
“그렇소. 이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오.”
그 말에 이군사 사마중현이 말했다.
“이미 광서성 주변으로 각 지부의 전력들을 배치시켜 이를 차단토록 했습니다.”
이에 방덕현이 혀를 차며 나무라듯이 말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하면?”
“종선 진인을 움직이시지요. 맹주.”
팔대고수의 일인이자 태극검제 종선 진인.
그를 움직이라는 말에 맹주 백향묵 역시도 난감함을 금치 못했다.
맹주의 입장이라고 하나, 그는 무림의 명숙이었기에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자신조차움직이기 힘들었다.
난감해하는 백향묵에게 방덕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종선 진인을 움직이는 것은 노부가 해결할 터이니 걱정 마시오.”
방덕현이 무당파라 적혀 있는 작은 깃발을 빼들어 호남성과 광서성의 경계면에 두었다.
그리고는 광서성에 있는 다소 커다란 붉은 깃발 두 개 중 하나를 빼들어 마찬가지로 경계면에 가져가 꽂았다.
“필시 혈교 측은 종선 진인을 견제하기 위해 파혈검제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게 할 것이오.”
파혈검제는 현 혈교에 있어 최고의 전력이었다.
“저들이 끊임없이 경계하도록 만들려는군요.”
이군사 사마중현의 말에 방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는 정파보다 힘의 논리가 더욱 강하다. 그들을 복속시키려 한다면 그만큼의 힘을 기울여야 하는데, 파혈검제의 발목만 묶어도 혈교는 규합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에 맹주 백향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방덕현의 수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방덕현이 옆에 앉아 있는 이군사 사마중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지금 즉시 귀주성에 있는 우군도독부로 가거라.”
“우군도독부로 말입니까?
“들으니 혈교에서 우군도독부의 도지휘첨사에게 뇌물을 바쳐 승인을 얻어냈다지?”
그의 반문에 방덕현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군도독부의 장 도독은 삼공을 노리기에 흠결이 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자이지.”
* * *
광서성 무림 연맹의 부지에 세워놓은 임시 본단의 교주 집무실.
“우호법의 자리는 비워주시죠.”
당당한 송좌백의 요구에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교주 즉위식을 앞두고 녀석은 꽤나 초조했는지, 뻔뻔하게 내게 요구를 하고 있었다.
낯짝이 두꺼운 녀석이다.
“아직 그 정도 실력은 안 되어 보이는데?”
호법의 자리에 어울리는 무위를 지녀야 그 자리를 줄 것 아닌가.
적어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다면 고려해볼 만한 사안이다.
“지금 임명해달라는 게 아니라, 이 년, 아니 일 년만 비워달라는 겁니다.”
일 년 안에 자신 있다는 건가.
하긴 지금의 성장세를 보면 경이로울 정도다.
“…….너 이 자리에 스승님이나 좌호법이 있었다면 꽤 혼났을 거다.”
“그러니까 독대 신청을 했잖습니까?”
-얘는 사람이 한결 같아서 좋네.
소담검이 녀석의 말에 키득거리며 좋아했다.
나도 녀석이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서 마음에 들기는 한데, 참 고집도 대단하다.
사실 직위 관련 문제로 찾아왔던 이는 이 녀석만이 아니었다.
삼혈성 혈살귀 양전이 독대를 신청했었다.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오랫동안 백련하의 산하에 있었던 그는 백혜향을 비롯해 그녀의 측근들이 권력을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말이 가관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서 머리가 지끈거렸었다.
육혈성 한백하가 축출되어서 이제 그런 문제로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는데, 여전히 내부의 파벌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
어쩐지 스승님이 내부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백혜향의 직위 책봉을 미루라니 뭐니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지금 다른 문제로도 골머리가 아프니까. 그만 가봐라.”
“약조하실 때까지 못갑니다.”
-털썩!
송좌백 녀석이 무릎을 꿇고서 자리에서 버텼다.
내 입에서 확답이 나올 때까지는 아주 여기서 버티고 앉아 있을 작정처럼 보였다.
“끌려 나갈래?”
그런 나의 말에 녀석이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의지가 그리 확고하진 않구나.
그때 집무실 밖에서 호위 대주 노성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혈마이시여. 일존이 독대를 신청하였습니다.”
“일존?”
그 말에 송좌백 녀석이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이외에는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천하의 일존 단위강 앞에서는 별 수 없구나.
-너한테도 안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지.
같은 동문 출신이라 자존심 때문에 인정을 안 하는 것뿐이지.
그래도 녀석이 한결 같이 굴어준 덕분에 권좌에 앉아 있어도 이 자리에 깊이 빠져들지 않게 되어서 좋다.
자리란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십상이니까
“아, 아무튼 주청드린 것을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송좌백 녀석이 황급히 포권을 취하고서 집무실을 나갔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일존 파혈검제 단위강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단위강이 포권을 취하며 기품 있게 인사를 했다.
“혈마를 배알합니다.”
“어서 오시죠. 일존.”
일존 단위강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혈마시여.”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이런 독대 자리에서까지 위엄이니 그런 것을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사사로이는 무림의 대선배이니 대우를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의 말에 단위강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의외라는 듯 한 얼굴이었다.
-명색이 혈마가 되었으면 공이든 사이든 만인한테 오만하고 위엄 있게 굴어야지. 쯧쯧.
혈마검이 내게 혀를 찼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거든.
위엄은 필요할 때만 갖춰도 충분하다.
시시각각 상대를 억누르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존 단위강과 같은 자는 충분히 대우를 받을 만한 혈교의 충신이자 절세고수였다.
그런 그의 진심어린 충성을 얻으려면 차별성이 필요하다.
단위강이 내게 말했다.
“……다르군요.”
“어떤 것이 말입니까?”
“신은 삼대 째 혈마를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권좌에 앉으셨던 분들은 한결 같았지요.”
“그렇습니까?”
반문했지만 그럴 만도 하다.
혈마검을 계승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혈마 조사의 백(魄)이 그 주인의 인격을 침범했다.
그 영향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포악하고 오만하게 바뀔 수밖에 없다.
일종에 제 이, 제 삼의 혈마가 되는 것이다.
물론 원래 성정 자체가 백혜향과 같은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그 분들과 다른 환경에서 커 와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정파 명문가의 자식으로 자라왔고, 혈교의 첩자로 평생을 몸을 낮춰서 살았다.
몸과 영혼까지 배어 있는 습관이 한순간에 사라질 리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독대를 신청하셨으니,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고 오신 건지 말씀해주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단위강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권위란 무릇 품격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노부의 우려가 쓸데없는 기우 같군요.”
봤지?
가는 만큼 오는 법이다.
-흥.
혈마검이 괜히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단위강이 웃음기를 지우고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혈마께 여쭙고 싶었습니다. 공께서는 본교를 어찌 이끄시려고 합니까?”
“어찌 이끈다라…..”
“본교의 교리는 피로써 세상을 씻는 것입니다. 하나 혈마께서 행하신 것들이나 말씀을 들으면 교리와 전혀 다른 이상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만.”
…….역시 이런 순간이 오는구나.
아마도 지금쯤이면 내가 이끄는 방향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나올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 시작이 일존일 줄이야.
예부터 혈교를 모셔왔던 중진이었으니 이를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혈마의 권위로 강제로 이끌어나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반발이 생길 수도 있겠지.
나 역시 진지하게 물었다.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본교의 교리대로 피로 세상을 씻으면 종국에 무엇이 남지요?”
“……..”
“피로 씻어낸 세상에 깨끗함이 남아있겠습니까? 결국 피로 얼룩져있겠지요.”
그런 나의 말에 단위강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역시 골수부터가 혈교인에게 교리를 정면으로 받아치는 말을 한 것은 심사를 건드리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일까?
단위강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조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본교는 만인의 적이었습니다. 전부 조사께서 세우신 피의 교리 때문이지요.”
“교리를 부정하시는 겁니까?”
“네. 부정합니다.”
‘!!!’
일존 단위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교리가 교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데 어찌 그것을 따를 수 있습니까?”
“…….교주이신 혈마께서 교리를 우습게 여긴다면 누가 이를 따르고, 장차 나아가 교인들이 혈마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 어쩌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낡고 부패한 관습이나 교리는 없애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권위를 저해한다면 저 스스로 이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자리를 내려놓는 것마저 거론하자 일존 단위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이를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해나갔다.
“피의 교리를 지키느라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 계속해서 망조를 걸었다가 부활했다가를 반복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까?”
“……..”
“본교가 가야 할 길은 악(惡)의 주축이 되어 나락으로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혈교를 부흥시켜 모두가 따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감정이 꽤 격해졌나 보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일존 단위강이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혈마께서 만드실 본교입니까?”
“……그렇습니다.”
굳은 결의를 담았다.
그러자 갑자기 일존 단위강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갑자기 흐트러졌다.
왜 이렇게 웃는 것일까?
호탕하게 웃어대던 일존 단위강이 이를 그치고서 말했다.
“삼대를 모셨지만 공과 같은 혈마는 처음입니다. 어느 혈마께서도 교리를 이렇게 무참히 짓밟을 생각을 하셨던 자는 없었습니다.”
“말씀처럼 그들과는 다르니까요.”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그때 일존 단위강이 내게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서 내게 말했다.
“전대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이 단위강이 구질구질한 늙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것도 전부 공을 만나기 위함인가 봅니다.”
“일존?”
“여기서 다시 맹세하겠습니다.”
“맹세라니….”
“혈마로서가 아닙니다.”
‘!?’
일존 파혈검제 단위강이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며 내게 말했다.
“공께서 만드실 새로운 본교를 위해 이 한 목숨을 바쳐 지키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그 한축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끝
ⓒ 한중월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