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219
75화 장강수로십팔채 (2) >
이런 일을 대비해서 늘 악귀 가면을 목갑에 넣어두었다.
나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겉옷을 뒤집자 회색 면 안쪽에 붉은 면이 드러났다.
거꾸로 입으면 전혀 다른 옷처럼 보인다.
언제든지 혈마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게 미리 준비해둔 것이었다.
그럼 정파인이 아닌 혈마로서 본연의 목적을 시작해볼까나.
-슥!
나는 목갑 안에서 혈마검을 꺼냈다.
* * *
표물선의 상갑판 위.
턱수염을 기른 근육질의 사내가 도를 겨냥하며 소리쳤다.
“어이, 거지 노친네. 우리가 호의를 베풀었을 때 받아들여라.”
그런 그의 외침에 거지 차림의 노인의 인상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는 개방의 방주인 홍구가였다.
‘천하의 이 홍구가가 어찌 이런 굴욕을 당한단 말인가!’
명색이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의 방주이자 무림 연맹의 장로였다.
평소의 그라면 수로채가 쳐들어와도 겁은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이들이 아무리 강맹해도 고작 수적에 불과했다.
이런 곳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쳐부술 수 있는 것들이 포위를 하고서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배를 버리고 물에 뛰어내리라고 한다.
-으득!
절로 이가 갈렸다.
[조부님. 저들이 호의를 베풀 때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손주인 홍걸개가 그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멍청한 녀석.’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의 손주라고는 하나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구나.’
앞서 배에서 뛰어내렸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정황상 답이 없었다.
낭왕 혁천만조차 적에게 당해서 강물에 빠져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적들은 자비조차 보이지 않고 배 위의 모든 자들을 죽이려들었다.
애초에 승기는커녕 희망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뛰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의 뒤에 금화평 상단의 세 상단주들 중 한 명인 호진각이 있었다.
그는 총 상단주인 호진웅 노사의 셋째 아들이다.
수적들의 배가 나타나자 이 셋째 아들 호진각이 어떻게든 표물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적들과 맞서기는커녕 협상조차 하지 않고 도망친다면 무림에서 자신은 우스꽝스러운 처지가 될 것이다.
홍구가가 턱수염의 사내에게 말했다.
“벽양채의 곽 채주라고 하셨소?”
“그렇다. 늙은이.”
사파에 강도 짓이나 하는 수적이 아니랄까봐 말이 거칠기 짝이 없다.
예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방주 홍구가는 평정심을 유지하고서 말했다.
“노부가 알기로 수로채의 호걸들은 표물선에서 일정 상납금을 주면 배를 보내준다고 들었소. 한데 어찌 이렇게 표물선을 통째로 내놓으라는 것이오.”
“그건 늙은이 네놈이 알 바가 아니다.”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홍구가는 좀 더 강하게 나갔다.
“이 배는 본 방에서 보호하고 있소. 그것은 곧 무림 연맹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귀하들이 기어코 이 배의 모든 것을 앗으려 든다면 그 뒷감당을 지셔야 할 것이외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런 홍구가의 말에 곽 채주라는 자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댔다.
“크하하하하하핫.”
주위 수적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한참을 웃어대던 곽 채주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할 수 있다면 해보거라. 이번에도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줄 터이니 말이다.”
애초에 그런 협박이 통할 리가 없었다.
이미 과거에도 토벌을 하러 왔던 무림 연맹의 전력을 이겨낸 바가 있었다.
강 위에서만큼은 누구와 상대해도 이길 자신이 있는 그들이었다.
‘조금도 겁을 먹지 않는구나.’
이래서야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홍구가는 문득 저들이 배를 덮쳐 올 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들이 노리는 배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장강 위에서 검은 돛을 달고 다니는 배들은 오직 수적들 뿐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을 노렸던 자들은 이들의 배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과 원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홍구가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듯이 던졌다.
“하면 쓸 만한 정보를 주는 것이 어떻소이까?”
“정보?”
“가령 그대들의 배를 탈취한 자들에 관한 것이라든지.”
“뭣!”
뜻밖에도 곽 채주를 비롯한 수적들이 반응을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진 것이었는데, 그을 물자 신이 난 홍구가가 말했다.
“정체불명의 복면인들이 타고 있던 그 배가 맞나보구려.”
그 말에 곽 채주가 성큼성큼 다가와 도를 겨냥하며 말했다.
“당장 말하거라! 놈들을 어디서 보았느냐?”
이에 홍구가가 재빨리 허리춤에서 타구봉을 뽑았다.
그리고는 타구봉으로 전광석화처럼 발구조천(撥狗朝天)의 초식을 펼쳤다.
이것은 봉을 뻗어 도나 검의 끝을 쳐내서 날려보내는 초식이었다.
-챙!
“헛!”
방심하고 있던 곽 채주의 도를 쳐낸 홍구가가 금나수의 수법으로 그의 팔을 꺾은 뒤에 안구저두(按狗低頭)의 초식을 펼쳐 앞으로 고꾸라뜨려서 타구봉으로 목을 짓눌렀다.
“이 거지 놈이!”
“어허. 가만히 있어라. 안 그러면 목이 부러진다.”
성이 난 수적들을 상대로 홍구가가 소리쳤다.
목이 짓눌려서 끅끅거리는 채주의 모습에 수적들이 어쩔 줄 몰라했다.
‘강 위의 강도 놈들이 꼴에 동료애를 아는 것이더냐.’
방주 홍구가가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그리고는 수적들에게 소리쳤다.
“가장 우두머리와 교섭을 하고 싶소!”
이렇게 많은 채의 수적들이 모였다면 분명 총채주가 왔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적들이 총채주의 명에는 죽고 못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면 그와 교섭만 한다면 이 위기를 타파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수적들이 주위를 포위하고서 서로를 쳐다보면서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방주 홍구가가 다시 한 번 외쳤다.
“총채주와 교섭을 하고 싶소! 이곳에 없는 것이오?”
바로 그때였다.
표물선으로 연결된 밧줄로 경공을 펼치며 넘어오는 세 인영이 있었다.
그들의 몸놀림은 여느 수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럴 수가….’
방주 홍구가는 속으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척 봐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비교해도 절대 떨어지지가 않았다.
‘수적들 중에 이런 고수들이 있었단 말인가?’
수로채의 우두머리라 불리는 장강사객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들이 합공에 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각각이 뛰어난 무공을 지녔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한데 세 명이었나?’
장강사객은 사형제라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자들은 세 명에 불과했다.
물론 이 세 명만으로도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저놈이 총채주인 갈용인가?’
세 명의 한 가운데 서있는 장신에 휘어진 갈고리 형태의 도를 들고 있는 근육질의 중년인이 보였다.
기세가 남다른 것이 누가 보아도 그가 우두머리 같았다.
이에 홍구가가 그에게 말했다.
“귀하가 수로채의 총채주인 갈용이오?”
“흥! 본좌가 갈용이다.”
‘응?’
뜻밖에도 전혀 다른 자가 자신을 갈용이라고 밝혔다.
그는 세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체구를 가진 자로 고작 해야 네 척(尺) 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대머리 사내였다.
두 손에 짐승의 발톱처럼 생긴 장갑을 끼고 있는 걸로 보아 조법의 달인인 듯 했다.
‘참으로 괴이한 자들이로구나.’
다른 한 명은 상당한 거구에 체구가 나가는 덩치를 가졌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가시가 달린 쇠구 덩어리를 들고 있었는데, 저걸 휘두르면 머리가 박살날 것만 같다.
스스로를 갈용이라 밝힌 자가 소리쳤다.
“늙은 거지 놈이 겁을 상실했구나. 감히 본좌를 오라가라 하다니.”
“노부가 이렇게 보여도 십만 방도를 이끌고 있는 방주외다. 격이 맞는 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오.”
“격이라. 거지 주제에 별 걸 따지는군.”
갈용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더니 그에게 날카로운 발톱들을 겨냥하며 말했다.
“당장 그 망할 막대기를 치우지 않는다면 이 배에 있는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릴 테다.”
갈용의 그 말에 수적들이 표사들과 선원들에게 도를 들이댔다.
당장에라도 휘두를 기세다.
“목숨에 위협을 가할 생각은 없었소. 가랏!”
이에 홍구가가 곽 채주의 목에서 타구봉을 뗐다.
곽 채주가 얼른 그에게서 벗어나 갈용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홍구가가 갈용을 보며 말했다.
“노부가 원하는 교섭은 간단하오. 정보를 넘기면 배를 무사히 보내주시오.”
“배를 보내달라고?”
“이렇게 장강의 호걸분들이 전부 모였다는 것은 귀하들에게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오? 이렇게 평범한 표물배를 상대로 시간을 낭비해서야 되겠소이까?”
그런 홍구가의 말에 갈용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림짐작으로 한 말이지만 이들에게는 정말 심각한 일인가 보다.
이들 삼형제는 전음까지 해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갈용이 입을 열었다.
“배를 보내줬는데 네놈의 말이 거짓이면 어쩔 테냐?”
홍구가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관심을 보이는 걸로 봐서는 잘하면 교섭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홍구가가 대범한 척 소리쳤다.
“본 방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소. 노부의 말에는 일절 거짓은….”
바로 그때였다.
홍구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갈 총채주. 그대가 찾는 배들은 이미 폭발하여 없다.
모두가 그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육합전성?’
육합전성(六合傳聲).
그것은 전음 중에서도 상위 수법으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져 자신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이런 육합전성에 방주 홍구가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거짓말이외다. 귀하들이 찾는 배는….”
-폭발했다.
또 다시 들리는 육합전성에 홍구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랏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제대로 방해하고 있었다.
“누구냐! 감히 누가 총채주와 본 방주가 나누는 대화를 방해하는 것이냐!”
홍구가가 내공을 실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홍구가가 입술을 질끈 깨물다 갈용에게 말했다.
“총채주. 본 방주를 믿으시오. 이 배에 옮겨타기 전까지 노부가 다른 배에서 직접 보았소이다. 총채주가 찾는 그 배는…”
-폭발했다.
“으아아아아!”
홍구가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소리쳤다.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숨어서 어디서 이간질을 하는 것이냐!”
이런 그와 달리 총채주 갈용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육합전성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기감을 집중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 형제들 누구도 이 자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고수다. 이 강 한복판에 누가 모습을 숨겨서 육합전성을 펼치고 있단 말인가?’
자신들의 배에 타고 있던 자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소리의 진원지는 당연히 한 곳 밖에 없었다.
총채주 갈용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홍구가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 대체 뭘 데리고 온 것이냐?”
홍구가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총채주. 보면 모르시겠소? 노부도 지금 이 육합전성을 펼치는 자가 누군지 알 수 없소이다.”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교섭이 진행되려던 찰나에 이게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다.
“네놈 배가 아니면 이 강 한복판에 누가 이런 육합전성을 펼친단 말이더냐?”
“아니. 말하지 않았소. 노부도 전혀….아!”
“왜 그러는 것이냐?”
“알 것 같소이다! 이 표물선 역시도 귀하들이 찾고 있는 그 배와 마주쳤었소이다. 다른 배들과 달리 무사히 탈출했지만 아무래도 이 배에 우릴 습격했던 그 정체불명의…..”
홍구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또 다시 육합전성이 울려 퍼졌다.
-거지 두목 놈과 무림 연맹에서 표물함 안에 무인들을 숨겨두고서 수로채를 섬멸하려 했는데, 알려나 모르겠군.
‘!!!’
이죽거리 듯이 들려오는 육합전성에 화를 내려하던 홍구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림 연맹의 일급 기밀이나 다름없는 정보였다.
그것이 육합전성으로 사방으로 울려 퍼진 것이다.
토벌하려 했던 당사자들인 수로채의 모든 수적들이 모인 곳에서 말이다.
‘빌어먹을!’
변명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걸개야! 뛰어내리거라!]홍구가는 다급히 손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틀어 경공을 펼쳐 갑판을 넘어 강물로 뛰어내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푹!
“헉!”
경공을 펼치려던 그의 앞으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떨어지며 갑판 위에 박혔다.
‘이, 이게 대체…아닛?’
그것은 다름 아닌 검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혀, 혈마검!”
홍구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에 배 전체가 술렁였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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