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26
14화 하선부설초 (1)
혈마(血魔).
온갖 흑도와 사파 무림인들을 규합하여 혈교를 탄생시킨 거인이다.
그로인해 열세에 밀리던 정파인들은 무림 연맹을 출범하게 되었고, 단일 규모로 최고의 전력을 갖추고 있던 무쌍성마저 손을 잡고서 정사 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치열했던 정사 대전에서 혈교의 교주인 혈마는 수많은 절세 고수들의 합공을 당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때 무림 연맹과 무쌍성은 혈교가 다시는 부활할 수 없도록 그 중심이었던 혈마의 모든 혈족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찾아 그 씨를 말려버렸다.
나 역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교주님의…..손녀께서 살아계신 겁니까?”
해악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사이에 놀랄 일이 참 많이 일어난다.
혈마의 핏줄이 아직 남아있다니.
“운이 좋구나. 네놈은 귀하신 분을 가까이서 영접했던 거다.”
운을 떠나서 놀랄 일이다.
수많은 정파 무림인들이 그 씨를 말리려고 했던 혈마의 핏줄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쩐지 이 미친 노인네가 순순히 만사신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이상하다 싶었다.
“네 사제들에게는 말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찾아라. 네 단전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안위와도 관련 있는 일이다.”
혈마의 핏줄.
혈교에 있어서 그녀의 안위는 매우 중요하다.
어쩐지 수련 생도들까지 동원해가며 약초를 찾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운휘야. 내가 말했지?
‘뭘?’
-사람이 줄을 잘 타야 한다고. 빨리 약초 찾아.
소담검이 들떠서 말했다.
맞는 말이다.
어쩌면 차기 교주가 될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 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 *
해악천은 약초를 찾기 위해 쌍둥이들도 불렀다.
듣기로는 이곳 육혈곡 소속의 혈교인들과 혈수마녀가 데리고 온 혈교인들이 대부분 동원되어 약초 수색을 한다고 했다.
패혈 단주인 구상웅이나 혈수마녀 역시도 눈에 불을 켜고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무조건 찾아야 한다며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었다.
하긴 함께 붙어서 찾아봐야 인력 낭비이긴 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뭐하는 거냐?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남천 검객의 유골이 있는 동굴이었다.
약초를 찾기는커녕 모닥불 앞에 앉아서 선천심법을 운기하고 있으니, 소담검이 답답해하며 물었다.
‘운기 하고 있잖아.’
-그러다가 약초를 다른 사람이 먼저 찾으면 어쩌려고?
‘못 찾아.’
나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소담검이 혀를 찼다.
-빨리 찾는 게 좋을 텐데. 괜히 늦장부리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빼앗기면 억울하지 않겠어?
‘못 찾는데도.’
-왜 못 찾아?
‘지금은 약초의 꽃망울이 파묻혀 있어서 발견도 못해.’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 약초를 찾는데, 중급 수련 생도들까지 동원해놓고도 사흘이나 더 걸렸겠어?’
-회귀는 네가 했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기다려. 어차피 만사신의조차도 하선부설초의 꽃망울이 언제 피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해가 중천에서 살짝 기운 것을 보면 아직 미시(未時) 경이다.
아직은 움직여봐야 추운데서 한참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따뜻하게 있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붉은 노을이 지면서 해가 지려고 했다.
-이제 움직일 거야?
‘조금만 더 살펴보고.’
해가 완전히 지자 산밑으로 작은 불빛들이 보였다.
횃불의 불빛이었다.
불빛들이 여기저기서 움직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여들며 육혈곡의 본당 방향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됐다.’
이때를 기다렸다.
나는 남천철검을 챙겨서 산봉우리를 내려갔다.
산봉우리를 내려오니 깜깜한 어둠에 인기척조차 없어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으스스하네. 다른 사람들은 다 철수했나봐.
‘어두우니까.’
-일부러 기다린 거구나.
횃불에만 의존해서 약초 수색을 하기에는 지금 날씨는 곤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방이 흰 눈으로 덮여 있는데 한밤중에 무슨 수로 찾겠는가.
이렇게 아무도 수색하지 않는 지금이 적기였다.
-탓!
어두웠지만 약초가 나는 위치를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향해 파죽지세로 경공을 펼쳤다.
해악천의 신묘한 경신술 만큼은 아니더라도 남천검객의 경신법 역시도 쓸 만 했다.
‘기분 좋다.’
차갑게 스치는 바람마저도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전생에서 무공을 익힌 자들에게 가장 부러워했던 것이 이 경공이었다.
은은한 달빛을 벗 삼아 눈 위를 달리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탁! 탁!
귓가를 울리는 이질적인 소리.
그것이 어디선가부터 내 뒤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운휘.
‘알고 있어.’
남천철검의 말에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모두 철수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누군가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아무래도 따돌려야 할 것 같았다.
“후우.”
수련할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성명신공을 3성까지 운기해보는 것 같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며, 발바닥의 용천혈로 이어졌다.
그 순간 경공의 속도가 배로 가속되었다.
-팟!
주변의 경치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가 일류고수 이상이 아니라면 내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어려우리라 여겼다.
그런데,
-탁! 탁! 탁!
여전히 귓가로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누가 내 뒤를 따라오는 거지?
이 정도로 따라붙는다는 것은 그럼 적어도 상급 무사란 말이다.
‘남천 누군지 보여?’
등에 매고 있는 남천철검에게 물어보았다.
-…….대단하다.
‘뭐가?’
-웬 뚱뚱한 여자가 운휘 너와 버금가는 속도로 경공을 펼치고 있다.
‘뭐?’
순간 내 머릿속에 낮에 뒷간에서 보았던 면사의 여인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하는 마음에 뒤를 힐끔 쳐다봤는데,
‘하!’
진짜로 그 면사의 여인이었다.
-탁! 탁! 탁! 탁!
살이 워낙 쪄서 경공을 펼칠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다.
뒤를 쫓아오는 그녀가 소리쳤다.
“거기서요!”
그녀는 나더러 멈추라고 하고 있었다.
미치겠다.
의외의 복병이었다.
여기서 멈추면 오늘 약초를 찾는 것은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버텨봐. 저 정도 살집이면 오래 뛸 수 없을 거야.
소담검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경공을 빠르다고 해도 저 몸으로 오래 유지하기는 힘들 거다.
조금만 시간을 더 끈다면 따돌릴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운휘! 뒤를 조심해라!
남천철검의 외침에 놀라서 뒤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경이로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뚱뚱한 면사의 여인이 눈 위를 한 마리의 매처럼 수평으로 미끄러지듯이 뻗어서 오는 것이 아닌가.
‘저게 뭐야?’
대체 무슨 경신법이지?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한순간에 나를 따라잡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서 금나수를 펼치려 했다.
‘칫!’
나는 최대한 몸을 비틀어 그녀의 손을 피했다.
그런데 그녀의 손이 붉게 변하며 괴이한 방향으로 꺾어 들어왔다.
-팍!
다급히 남천철검으로 이를 막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이 더 빨랐다.
왼쪽 어깨로 붉은 손이 닿자, 싸늘한 기운과 함께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으악!”
-쿠당탕!
거의 열 바퀴 가량을 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너보다 고수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몸으로 체험했다.
한바탕 굴렀더니, 온 만신이 쑤셔서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위로 누군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멈추라고 했죠.”
‘아…..’
뚱뚱한 여자의 면사가 벗겨져 있었다.
경공을 펼치느라 벗겨진 건지 얼굴이 드러나 있었는데, 생각보다 예뻤다.
새하얀 피부에 둥근 눈망울.
살이 찌지만 않았다면 꽤 미인이라고 불릴 상이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왜 쫓아온 겁니까? 놀랐잖아요.”
“네?”
내가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내가 따돌리려고 한 이유라도 이야기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가.
미간을 찡그리던 그녀가 입술을 실룩거리다가 말했다.
“한 밤 중에 혼자 어딘가로 바삐 가니까 쫓아왔죠.”
“제가 어디로 가든 소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강하게 나가자.
사실 내가 이 여자한테 죄를 지은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 그녀가 예상지 못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아. 그래요? 그런데 사존의 제자 분께서는 단전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경공을 잘도 펼치네요?”
“……..”
이래서 모두가 철수할 만한 시간을 노린 건데, 운도 없었다.
그래도 핑계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선천진기로 경공을 펼친 겁니다.”
“네? 선천진기요? 설마 원기를 소진해서 경공을 펼쳤다는 거에요?”
그녀가 놀라서 반문했다.
누구라도 선천진기라고 하면 원기 소진을 떠올린다.
그만큼 선천진기의 과용은 위험한 짓이었다.
“못 믿겠습니까? 확인해볼래요?”
손을 내밀었다.
내공을 다루는 자라면 진기를 불어넣어 상대의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다만 선천진기는 확인할 수 없겠지만.
당당하게 나오자 확인해볼까 망설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요.”
“어떡합니까? 단전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경공을 펼치죠.”
“미련스러운 짓이에요. 원기 소진으로 단명하기 싫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걱정해주는 건가?
그 악명 높은 혈수마녀의 수하치고는 사람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식탐은 꽤 강해보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단전을 치료하려고 스승님과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그녀가 살짝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원기를 소진해가며 경공을 펼쳤다고 하니까 불쌍해보였나 보다.
“의심이 풀렸으면 일어나도 됩니까? 눈밭에 누워있으니까 등이 얼 것 같습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 차가웠다.
너스레를 떠는 내 말에 그녀가 피식하고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떡할 거야? 오늘은 포기할 거야?
소담검이 내게 물었다.
그녀를 데리고 약초를 찾으러 가면 공로가 분산된다.
온전히 나 혼자 찾아야 신의의 각패도 받을 수 있고 혈교주의 손녀를 살렸다는 공을 세울 수 있다.
‘그래야 할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소…..운휘 공자라고 했나요?”
“저보다 누님이신 것 같은데 편하게 불러주십쇼.”
그 말에 그녀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전 주인께서 말씀하셨네. 여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 보여도 적게 봐주는 것이 세상 평탄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남천철검의 조언에 아차 싶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던 그녀가 뾰로통한 말투로 말했다.
“사존의 제자 분이신데 그럴 수야 있나요. 그리고 저 나이 별로 안 많거든요.”
“아……어쩐지 저보다 어려 보였는데, 무공이 뛰어나시기에 혹시 해서 해본 말입니다.”
“수습하지 마세요.”
눈치도 빠르네.
전생도 그랬지만 여자들은 참 어렵다.
“저는 육혈성 문하의 이제자인 하연이라고 해요.”
그녀가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예상대로 혈수마녀의 제자였다.
“어쩐지 손이 붉게 물드는 것이 범상치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육혈성의 문하셨군요.”
혈수옥(血手玉).
혈수마녀의 독문 무공이다.
그녀의 수공은 익히면 익힐수록 손이 붉게 물들어 핏빛을 띤다고 들었다.
‘역시 오늘은 무리겠다.’
혈수마녀의 제자라면 따돌리기도 어렵다.
괜히 힘을 뺄 바에 대충 둘러대고 내일을 노려야 할 것 같았다.
“후우. 약초를 더 찾아볼까 했는데 오늘은 날이 어두워져서 더는 힘들 것 같군요.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거짓말.”
“네?”
“소 공자님은 약초가 있는 곳을 알고 계시죠?”
허를 찌르는 그녀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힐 뻔했다.
순탄하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훅 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잡아뗐다.
“알고 있다면 이 한밤중까지 찾아다녔을까요.”
“글쎄요.”
“글쎄요라뇨?”
“오늘만 하더라도 근 여섯 시진 동안 돌아다녔어요. 그 사이에 사존 어르신만 두어 번 정도 마주쳤었거든요.”
아…….
살짝 불안해지는데.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공자님은 한 번도 뵙지 못했어요.”
“우연이겠죠. 제가 눈에 잘 띄는 유형이 아니라서.”
내 말에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가요. 약초 수색자들 중에 수련 생도의 복장을 하고 있는 분이 몇 명이나 된다고요.”
쌍둥이를 포함해 나까지 셋이다.
이 여자가 겉보기와 다르게 영리하다.
“참 신기하죠. 모두가 철수할 쯤에 나타나서 약초를 찾는다는 게 말이죠.”
“이것 참. 우연이지만 오해받을 만하네요.”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한다.
괜히 여기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공자님은 약초를 찾는다는 사람이 쌓인 눈을 한 번 쓸어보지도 않고 확인이 가능한가 봐요?”
“………”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게 공자님의 뒤를 쫓다가 느낀 건데, 꼭 목적지가 있는 사람마냥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경공을 펼치시던데요.”
소담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라고 둘러댈 거냐?
뭐라고 핑계거리를 대기에는 이 여자 너무 똑똑했다.
더 이상은 소용없을 듯 하다.
“하 소저께서는 정말 영특하시군요.”
“인정하시는 건가요?”
“후우. 그 정도까지 살펴보셨다면 제가 뭐라고 변명할 여지가 없군요.”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뻐하는 눈치였다.
“약초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거 맞죠? 맞죠?”
“확실하지는 않지만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그럼 같이 가요!”
그녀가 신이 나서 말했다.
이에 내가 급 정색을 하면서 답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네?”
“저는 신의 어르신의 각패도 필요하고, 귀인 분을 도왔다는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굳이 그걸 둘로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치사해요!”
“뭐가 치사합니까? 본인 힘으로 찾지 않고 가마에 무임승차하려는 소저가 더 치사하죠.”
“……..”
“어차피 오늘은 공친 것 같고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실 건가요.”
“네. 이렇게 나올 겁니다.”
“흥! 그럼 저는 지금부터 공자님이 약초를 찾을 때까지 계속 따라다닐 거에요.”
“……..그렇게까지 공을 세우고 싶습니까?”
“공이라뇨. 하!”
내 말에 그녀가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답했다.
“공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모시는 분을 꼭 살리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그 정도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건가요?”
모시는 분은 아마도 혈교주의 손녀일 거다.
육혈성 혈수마녀가 그 동안 그녀를 호위했을 테니 말이다.
하연 소저라면 그녀와 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공은 내거다.
“제가 살릴 건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무하네요.”
얼굴까지 달아오른 그녀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설득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공자님. 신의 어르신의 각패와 공은 공자님께 전부 몰아드릴 테니까. 같이 가요.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각패와 공을 몰아주신다고요?”
“네. 어차피 둘이 같이 찾았다고 해도 공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운이 좋으면 신의 어르신께서 각패를 저와 공자님 둘 다 줄지?”
그럴 확률이 없지는 않았다.
둘이 같이 찾았다고 하면 만사신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입으로 공언 했으니 지켜야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가 받은 각패도 공자님께 드릴게요. 그럼 두 개씩이나 가지게 되잖아요.”
그녀의 말에 귀가 간질거렸다.
만사신의의 각패를 하나도 아니고 둘을 가지게 된 다라.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 정도면 괜찮네. 받아줘라. 어차피 계속 쫓아다닐 것 같은데.
‘일단 뜸 좀 들이고.’
너무 바로 덥석 물면 속물 같아 보이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속물 같아 보일걸.
사람이 욕심을 부릴 수도 있지.
어쨌든 이 정도 조건이면 그녀를 데리고 가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살짝 고민하는 척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고 말했다.
“후우, 소저를 믿을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칫. 사람이 무슨 의심이 그렇게 많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그냥 바로 받아들이기 뭣해서 그런 건데 의심은 무슨.
그녀가 초조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공을 같이 세우고 싶은 건가.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도망치거나 따돌릴 생각하지마세요. 이렇게 보여도 제가 공자님보다 훨씬 빠른 거 알죠?”
‘!!!’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왜 웃는 거죠?”
“소저.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라뇨?”
“우리의 신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신의 어르신의 각패 말고 하나만 더 얹읍시다. 각패는 혹시 못받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를 더 얹어요? 대체 뭘요?”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괜히 불안해하는 눈치다.
“아까 전에 그 수평으로 날아오듯이 쭉 뻗어오던 경신법 좀 가르쳐주시오.”
“네에?”
그 순간적으로 가속하던 경신법이 탐났던 나였다.
마치 날아가는 매처럼 보이는 경신법이었다.
“하!”
하연 소저가 기가 차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김이 오르는 것 같은 게 내 착각일까?
* * *
하연 소저와 나는 약초가 있는 위치로 가고 있다.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림인들에게 타인의 무공을 요구하는 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 건 잘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일부러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돌아가야 할 것만 같고, 받아들인다면 그 신비한 경신법을 전수할 수밖에 없게 선택지를 좁힌 거니까.
-너도 만만치 않은데.
소담검이 내 잔머리에 혀를 찰 정도였다.
[좋아요. 가르쳐 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그녀의 조건은 간단했다.
자신이 가르쳐준 경신법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
정말 위험할 때 쓰거나 만약 쓴다고 한다면 상대를 반드시 죽일 것.
사람 좋아보였는데 사파인은 사파인다웠다.
결국 경신법을 최대한 드러내지 말라는 소리였다.
조건은 받아들일 만 했다.
어차피 그렇게 가속화 하는 경신법은 비장의 수로 쓰기에 적당하니까 말이다.
‘좋은 거래였다.’
-탁! 탁!
속도를 맞춰가며 경공을 펼치던 중에 하연 소저가 내게 물었다.
“공자님…..혹시 아까 낮에 있었던 일. 누군가에게 얘기하진 않았겠죠?”
뒷간에서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은자 하나를 덜 받아서 이야기 할까 고민 중입니다.”
“치사해요!”
그녀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리쳤다.
농을 던진 건데 흥분하기는.
“뭐. 더 좋은 것도 받았으니 머릿속에서 지우겠습니다.”
“정말이죠?”
“약속하겠습니다. 흠, 그런데 설마 제 뒤를 쫓았던 게 고작 그걸 물어보려고 그랬던 건 아니죠?”
“고작이라뇨? 저한텐 중요한 거거든요!”
어지간히 들키고 싶지 않았나 보다.
하긴 나라도 뒷간에서 몰래 육포 먹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을 거다.
“아직 멀었나요?”
“거의 다와 갑니다.”
분명 이 두 산봉우리 사이로 들어가면 된다고 들었다.
그러면 얼어붙은 폭포수 앞 쪽에,
“와!”
하연 소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산봉우리 사이로 들어가자 넓은 눈밭이 시야로 들어왔고 그 사이로 보랏빛 꽃망울이 눈을 뚫고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하선부설초였다.
“찾았어요. 공자님 이런 곳에 있었다니.”
그녀가 환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을 세운 게 저리 기쁜 걸까?
아니면 혈교주의 손녀를 살릴 수 있어서 기쁜 걸까?
“이제 채취해서 돌아가…”
-운휘! 앞으로 몸을 날려라!
‘!?’
남천철검의 외침에 나는 반사적으로 경신법을 펼쳐 앞으로 몸을 날렸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 대체 뭐지?
바로 그때였다.
-파파팍!
“억!”
앞으로 몸을 피해서 고개를 미처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 내 혈도를 빠르게 점했다.
나는 그 상태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정신이 혼미해 지려던 찰나에 가슴 속에서 뜨거운 선천진기가 치솟으며, 점혈 당한 부위로 퍼져나갔다.
귓가로 소리가 들려왔다.
-파파파팍!
손과 손이 부딪치는 소리.
“당신들 뭐야? 앗!”
뒤를 이어 하연 소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고수였던 그녀는 다행히 상대의 기습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당장 서지 못해!”
-타타타타탁!
경공을 펼치며 눈을 밟고 달려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녀가 기습을 펼친 자들을 쫓아간 것 같았다.
얼마 있지 않아 등 쪽에 점해졌던 혈도 부위에서 투둑투둑 소리가 나며 굳어졌던 몸이 풀렸다.
‘선천진기의 효능인가?’
점해진 혈도마저 자체적으로 풀 줄은 몰랐다.
선천진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효능들이 있는 듯 했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운휘. 저길 봐. 기습했던 녀석들이 약초를 뽑아서 도망갔어.
소담검의 말대로 눈 위로 나와 있던 하선부설초 몇 개가 뜯겨져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뒤를 밟았나 보다.
일류고수로 짐작되는 하연 소저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고수들이란 소리다.
-빨리 쫓아가. 공을 빼앗기겠어.
소담검이 나를 보챘다.
그런데 굳이 쫓을 필요가 있을까?
-뭐?
나는 눈 위로 튀어나와 있는 남은 하선부설초의 앞으로 다가갔다.
보랏빛 꽃잎 사이로 보이는 다섯 개의 노란 구슬들.
그걸 바라보는 나의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건 다 자란 하선부설초가 아니거든.’
뒤통수를 치려면 끝까지 기다렸어야지.
멍청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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