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264
87화 잠입 (1) >
금상제(金上帝) 주양선.
연나라 6대 황제다.
연나라를 세운 태조 이래로 무림과의 전쟁을 선포한 황제이다.
무림과 관이 가장 최악으로 치달았던 시기라 할 수 있었다.
금상제 시절에는 조금이라도 무림과 관련된 단체는 삼족까지 멸하려던 시기였는데, 그때 최초로 정사가 손을 잡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황실에서 오랫동안 관직을 해오던 비학월가가 쫓겨나 무쌍성으로 들어가 비월영종이 되었다.
어찌 보면 모가(母家) 쪽에 있어 원수나 다름없는 황조다.
하고많은 시기 중에 이때였다니.
‘…..그래서 자경정이 황실을 증오했구나.’
무림에 있어서 최악이라 일컬어지는 시대였다.
내가 있던 시절의 최악의 전쟁이라 불렸던 정사 대전은 그나마 무림인들끼리의 싸움이었지만 이때는 중원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었다고 들었다.
-그럼 그 자경정이란 녀석은 금상제를 죽이려고 하는 거네.
현재로서는 그렇게 밖에 추측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호종원에게 듣기로 금상제의 곁을 지키는 친위군만 칠만여 명에 이르고 그중 팔천여 명이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시대의 정점이라 불리는 천하십이절의 열두 고수 중에 네 명이 금상제의 산하로 들어갔다.
-괜히 신중하게 구는 게 아니네.
솔직히 그들의 무공 수위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하나 적어도 파궁귀 초사라는 자는 알 것 같다.
2리를 훌쩍 넘기는 엄청난 거리에서 점으로 보이는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해서 쐈다.
이 시대의 고수들도 만만치 않은 것 만은 확실했다.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잠입부터 해야지.
내 목적은 금상제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가 모계 쪽에 있어 악연이고 이 시대의 폭군이라 불리는 자라고 해도 관여할 부분이 아니었다.
-자경정을 잡는 게 최우선이네.
그래.
녀석을 잡고 법구를 회수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원래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이제 이들을 깨워보실까?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황군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봐! 정신 차려라!”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가장 빠르게 정신을 차린 한 황군이 나를 보며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처, 천인장,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지금 나는 천인장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녀석의 갑주를 빼앗아서 입고 있었고 목소리 또한 같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이들을 이끌고 황군에 잠입해야 겠다.
* * *
머지 않은 곳에서 진군해오는 황군이 보였다.
위에서 볼 때도 그랬지만 정면에서 보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기마병과 수만의 황군이 오열을 맞춰서 걸을 때마다 대지가 진동을 하는 듯 하다.
그런데 내 뒤를 따르는 군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포로들을 정체 모를 고수의 습격으로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로 계속 이렇다.
군으로 복귀했을 때 벌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것만 봐도 군율이 얼마나 센지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접근하기도 전에 일이 꼬이는 거 아냐?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군율로 따지면 임무에 실패한 군인들에게는 징계가 따른다.
하지만 그 전에 분명 보고가 있을 것이다.
실패했다고 아무런 보고도 없이 무조건 징계부터 내린다면 군이 유지가 되겠는가.
그렇기에 다소 위험성이 따르더라도 천인장으로 분장한 것이다.
-윗선까지 가길 바라야 겠네.
천인장 급이면 오천장이나 장군 급의 휘하다.
적어도 윗선과 접촉하기는 좋을 거다.
말 수십 마리가 끌고 있는 그 집채 만 한 마차에 곧바로 접근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쨌거나 기회를 노려봐야지.
-첩자 경력의 진가가 드러나겠네.
의심만 받지 않아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다 왔다. 누가 나오는데.
소담검의 말대로 진군 해오는 군의 앞에 다와 가자 화려한 황색 갑주에 미염공처럼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인이 말을 몰고 나오고 있었다.
그 양옆에 부관으로 보이는 장수들도 호위무사처럼 따랐다.
“아아…..염 장군께서 직접 나오셨습니다.”
옆에 있는 군사가 큰일 났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역시 누군가로 분장하려면 직위가 있는 사람으로 골라야 한다.
알아서 정보를 옆에서 나불나불 해주거든.
“모두 말에서 내려라.”
나는 자연스럽게 군사들에게 명했다.
내가 먼저 내리자 군사들도 죽상을 하고서 말에서 내렸다.
마중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앞으로 다가오던 염 장군이 내가 말에서 내리자 인상을 찌푸렸다.
“장군!”
나는 바닥에 빛의 속도로 엎드렸다.
그리고 이마를 찧는 시늉을 하며 적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적의 습격을 받아 붙잡은 포로들을 전부 놓쳤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염 장군이 난처하다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슬며시 뒤쪽을 향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도 장군이기는 하나 최고 윗선은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황제인 금상제의 눈치를 보는 걸 수도 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의 명예를 더럽혔기에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하고 싶었으나, 군문의 장수로서 보고를 마쳐야 하기에 이렇게 추태를 무릅쓰고 돌아왔습니다.”
물 흐르듯이 나오는 나의 말에 소담검이 혀를 내둘렀다.
-아니. 누가 보면 정말 군에서 십 년 이상 구른 줄 알겠다.
나 정도 되는 첩자 경력이면 이 정도 연기는 그저 기본에 불과하다.
어떠한 단체이든 잠입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다행인 것은 지금 시기가 내가 있던 곳보다는 과거이지만 같은 연나라라 어느 정도 직급 체제나 관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허어. 이것 참.”
연신 탄식을 흘리는 염 장군이라는 자에게 말했다.
“휘하 이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휘를 잘 못한 소관의 잘못이므로 이들은 가벼운 징계로 넘어가주시기 바랍니다.”
“강 천인장!”
“어찌 그런 말씀을….”
징계를 두려워하던 군사들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의외라는 듯한 반응도 있는 걸 보면 내가 분장한 이 천인장은 평소 신망이 그리 높은 자는 아닌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의식한 것이다.
아랫사람의 과실로 넘기는 것보다 훨씬 책임감이 강해보일 테니 말이다.
“그건 본 장이 결정할 일이 아닐세. 대장군께서 폐하께 아뢰어 결정할 일이지.”
“주제 넘은 청을 드렸습니다.”
-쿵!
나는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사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소리만 크다.
하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윗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좋다.
“크흠. 일어나게. 어찌 된 일인지 보고부터 하게.”
이에 나는 마치 이 일을 겪은 당사자인 것 마냥 이야기를 했다.
“저희의 이동 경로를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한 고수가 습격을 했습니다.”
“한 고수? 한 명이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한 명이라는 말에 염 장군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가 내게 계속 이야기하라고 손짓을 했다.
“갑자기 나타난 그 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진각을 밟는 것만으로 풍압을 일으켜 제 휘하 군사들을 쓰러뜨리고 심지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는 것만으로 저희 모두를 기절시켰습니다.”
“손가락을 튕겼는데 모두 기절을 해?”
염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고수인가 싶었는데, 들어보니 절대로 평범한 수준이 아니기에 많이 놀란 듯 했다.
염 장군이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혹시 파궁귀가 보았다는 자인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닐세. 계속 진군 중이니 휘하 군사들은 좌군 후미로 붙고, 자네는 본 장과 함께 중앙군에 있는 대장군께 아뢰러 가세.”
-오!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관이라는 것이 절차가 복잡하고 군 역시도 그러해서 대기 절차를 밟을 줄 알았다.
한데 아무래도 진군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주둔을 할 생각이 없는 건가?’
하늘을 보면 노을로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보통 이렇게 되기 전부터 야영을 위해 주둔지를 준비한다.
한데 아직도 진군을 한다는 것은 밤에도 쉬지 않고 이동을 하겠다는 걸로 보였다.
‘……경각심을 줬나?’
그 파궁사로 짐작되는 절세 궁사의 눈에 띈 게 원인일까?
한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밤 중에도 진군을 한다는 것은 뚜렷한 목적이 없으면 군 전체의 피로를 누적시킬 뿐이었다.
-뚜렷한 목적이 뭔데?
군이 밤에도 움직일 목적이 뭐겠어?
-설마 전쟁? 그런데 계속 진군하면 그냥 숲이 나오잖아. 그것도 수십 리가 계속 그렇던데.
나도 그게 이상하다.
이곳으로 오면서 휘하 군사들을 떠보았다.
그들 역시도 황제가 직접 친정을 나온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나 계속 전군이 남하하는 것을 보면 광서성 쪽 사파 문파들이나 혈교가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모두가 추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 하는 겐가? 강 천인장. 따라오게.”
“네. 장군.”
어찌 되었든 중앙군이라면 집 채 만한 마차들로 접근할 수 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추침판의 바늘이 떨렸었다.
가까이로 가면 놈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다그닥! 다그닥!
염 장군을 따라 진군해오는 군을 거슬러 올라가니 거대한 마차 세 대가 보였다.
위에서 볼 때도 커보였지만 저 정도면 이동하는 작은 궁전이나 다름없었다.
수십 마리의 말이 이끌고 있는 커다란 판목 위에 금수를 놓은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그 위로 연기가 피어올라왔다.
-저 안에 그 금상제와 자경정이 있을까?
모르지?
저 안에 들어갈 방법을 강구해봐야지.
대장군 정도 되는 직위면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이 주변의 경비는 다른 곳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절정의 고수들이 이리 많다니.’
천막의 주변에 있는 자들은 하나 같이 장수의 갑주를 입었는데, 전부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 수가 거의 백오십여 명에 달했다.
‘이러니 무림 정벌을 밀어붙일 만하구나.’
괜히 정사의 모든 문파들이 힘을 합친 게 아니었다.
가운데 이동 천막의 입구 쪽에서 말을 몰고 있는 두 사람은 심지어 초절정의 고수였다.
한 문파의 장로에서 장문인 급이 문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가운데 천막에 황제가 있을 것 같다.
-안에 기운이 느껴져?
‘아니. 심후한 진기로 막이 쳐져 있어.’
가운데와 좌측 천막의 내부는 진기로 팽배했다.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인 듯 했는데, 그 기운이 상당해서 기감으로 내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천막 안에는 벽을 넘은 고수가 존재한다.
좀 더 기운을 끌어올리면 가늠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게 된다면 애써 기운을 갈무리한 것이 금방 들통 날 거다.
“잠시 말을 몰면서 기다리게.”
염 장군이 기막이 쳐져 있지 않은 우측 천막으로 들어갔다.
우측 천막 안에도 상당수의 인원이 있었는데, 그 안에 고수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심지어 초절정의 고수가 둘이나 있었다.
‘이게 정녕 관이 맞나.’
황실에도 무공의 고수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무림인들 못지않게 무공을 익힌 고수들을 양성하기 좋다.
영약이나 뛰어난 재야의 고수들을 초빙하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그 내부에 들어오게 되니 그 실체를 보는 듯 하다.
‘……벽을 넘은 고수도 도망치기 힘들겠어.’
-그 정도야?
적진의 한복판이라는 게 새삼 느껴진다.
긴장감이 피어오른다.
만약 자경정이 당장에는 황제인 금상제의 신임을 받고 있다면, 여기서 놈을 잡는 것은 꽤 힘들 것 같다.
오히려 밖으로 나가도록 유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좌측 천막에서 팽배했던 진기가 사라졌다.
곁눈질로 눈을 돌려보았다.
그때 천막 안에서 두 명이 밖으로 나왔다.
-어? 저 녀석?
소담검이 왜 놀라는지 알 것 같다.
먼저 나오는 자는 상당한 거구에 근육질의 중년인이었는데, 등에 보통 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궁과 길고 굵다란 화살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통을 매고 있었다.
-저 녀석 맞지? 그 파궁귀인가 뭐시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느껴지는 기운이 확실히 벽을 넘어선 것은 틀림없었다.
특이한 게 안공을 수련했는지 좌우의 눈이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징그러.
파충류처럼 눈이 움직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거리낌을 준다.
그 뒤로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은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굉장한 미녀였다.
겉모습만 본다면 이십대 중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풍겨지는 기운은 오히려 저 파궁귀로 짐작되는 자보다도 강하다.
‘여자였군.’
이건 의외다.
북해빙궁의 설백이라고만 들었을 때는 남자인줄 알았다.
어쨌거나 악심파파 이후로 여자 고수들 중에 저리 강한 자는 처음 본다.
-되게 이국적이게 생겼다.
소담검의 말처럼 중원인들과는 다르게 생겼다.
북방 민족에 더 가까운 세외 북해빙궁 출신이라고 하더니 정말인 것 같다.
곁눈질로 그녀의 손을 보이 백옥처럼 새하얗다.
‘한기를 발산하고 있어.’
기운을 나름 갈무리하는데도 소매에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하얀 가루가 묻어있는 것을 보면 한기(寒氣)를 다루는 무공이 극성이 이른 듯 했다.
-어. 운휘야. 저 여자가 너 쳐다보는데?
나를?
그럴 리가.
기운을 완벽하게 갈무리 했다.
지금의 나는 벽의 벽을 넘은 고수가 아니고는 기운을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파궁귀 초사라는 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적당히 하시게.”
“제 일에 관여치 마세요.”
그 말과 함께 그녀가 우측 천막 근처에서 말을 몰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그러자 파궁귀 초사라는 자는 한숨을 내쉬며 황제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말 몇 마디에 바로 통과되는 걸 보면 꽤 신임 받는 것 같았다.
-너한테 오는 것 같은데?
그리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설마 내가 변장하고 있는 강 천인장이라는 자가 이 여자와 안면이라도 있는 건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면 내 무위를 알아차린 건 아닌 듯 하다.
이거 어쩌지?
완전히 변수 상황이다.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닐지 모르겠다.
그녀와의 거리가 거의 열 보 정도 남았을 때였다.
“크흠.”
옆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우측 천막 안에서 반백의 노장이 걸어 나왔다.
그 뒤를 염 장군이 보좌를 하듯이 조심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가 누군지 눈치 챘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나는 말에 내리지 않은 상태로 상체만 돌려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반백의 노장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맞구나.’
운이 좋은 것 같다.
기가 막힌 시점에 대장군이 나왔다.
무공을 거의 익히지 않은 염 장군과 달리 대장군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손에 보이는 굳은 살이나 곳곳에 난 상처들만 봐도 경험도 굉장히 많은 백전노장이다.
대장군이 내게 말했다.
“고작 두 수만으로 일류 고수들을 쓰러뜨렸다고?”
염 장군이 사정은 보고한 것 같다.
이에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대장군.”
“자네 정도 노련한 천인장과 휘하 백장들을 죽이지 않고 포로만 데려가다니,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군.”
대장군이라고 하더니 통찰력이 상당했다.
변장한 내가 살아남은 것이 어떤 책략에 의해서라고 여기는 듯 했다.
“대장군.”
그때 뒤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북풍 한설이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무감정한 목소리다.
대장군이 내 뒤에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마침 잘 됐구려. 노부보다 무공이 뛰어난 귀 공이라면 더 잘 알 것 같소.”
“무슨 말씀이지요?”
“여기 강 천인장이 포로를 압송해오던 도중에 습격을 받았다고 하오.”
“습격이요?”
그녀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는 냉랭했다면 뭔가 걱정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뒤로 슬쩍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대장군이 말을 이어갔다.
“진각을 밟아 풍압을 일으켜 일류 고수들인 백장들을 쓰러뜨리고 했다는데, 어느 정도 수준의 고수인 것 같소?”
그 물음에 설백이라 짐작되는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답했다.
“……그 정도라면 천하십이절 정도에 이르는 역량의 고수가 아니라면 힘들 것 같군요.”
“역시 본 장과 같은 의견이구려. 일단 폐하께 아뢰러 갈 참인데, 귀공께서도 함께 가시겠소?”
“저는 그 전에 잠깐 볼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그 말에 대장군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 녀석 정말 저 여자와 알고 있는 사이인가.
그런 거라면 사람을 잘못 택했다.
‘젠장.’
이거 어쩌지?
난감해하고 있는데 대장군이 말했다.
“폐하께 아뢰고 나면 강 천인장을 부를지도 모르는데, 적당히 하길 바라오.”
“…….”
그 말에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장군이 심통이 난 얼굴로 기침을 내뱉더니 이내 염 장군과 함께 중앙의 천막으로 향했다.
염 장군이 입구 쪽에 남고 대장군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같이 기다려야하나 싶은데 그녀가 나를 불렀다.
“강……천인장.”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대장군이 예를 갖춰 대한 것을 보니 나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답했다.
“네.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그녀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그러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왜 따라오라는 거야?
나도 모르겠다.
대장군이 황제를 배알하러 들어갔다면 곧 나를 부를 지도 모른다.
한데 어딜 따라오라는 거지?
내가 움직이지 않고서 망설이자 그녀가 내게 말했다.
“특별군 부총독인 제 명이 우습게 들리나요?”
‘특별군 부총독?’
그런 직위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나 부총독이라 불릴 정도면 제법 높은 관직을 부여받은 것 같다.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 수는 없었다.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입 꼬리를 올리더니 말했다.
“그럼 따라와요.”
“…….알겠습니다.”
대체 왜 따라오라는 거지?
그녀가 앞서 가는 곳은 자신이 나왔던 좌측 천막이었다.
황제의 천막으로 짐작되는 가운데 천막을 지나가자 염 장군이 나를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다.
일단 나는 그녀를 따라서 좌측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착!
안으로 들어가자 진기의 유동이 느껴지며 천막의 입구가 닫혔다.
“안 들어오고 뭐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떨떠름해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은 거의 스무평 가량이 될 만큼 굉장히 넓었다.
이러니 말 수십 마리가 이끌지 않겠나.
꽤나 아늑해 보이고 그 안에 여러 사람이 기거할 수 있도록 방은 만들어놓았다.
바로 그때였다.
-팍!
갑자기 설백이 내게 달려들었다.
설마 나를 제압하려는 건가 싶어서 당황해하고 있는데,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표정해서 감정이 없어보였는데 그와 완전히 상반된다.
달려든 그녀가 나를 갑자기 끌어안았다.
“강 랑.”
‘강 랑?’
랑은 연인을 부를 때 하는 호칭이었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그녀가 내게 어째서 관심을 보였는지 말이다.
“부총독…..지금은…..”
“그렇게 부르지 마요. 지금은 둘 만 있잖아요. 설 매라고 불러줘요.”
설백이 내게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사마영에 버금가는 미녀가 작정하고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니 이걸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아니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벗어나야 할지 난감하다.
-너가 변장한 녀석….완전 능력자인데.
소담검이 혀를 내둘렀다.
나도 한편으로 그런 생각은 든다.
천인장이 군에서 낮은 직위는 아니지만 부총독이라 하면 그 격차가 컸다.
게다가 이 여자는 무림에서 천하십이절로 불리지 않는가.
소담검의 말따나 능력자였다.
‘젠장. 이거 어쩌지?’
그녀가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가슴부터 다리까지 붙어있다.
이 정도면 정말 연인 사이가 맞나 보다.
-어쩌긴 어째? 들키지 않으려면 연기해야지.
그래야 겠다.
어차피 대장군이 곧 나를 찾을 테니, 그때까지 버티면 된다.
적당히 맞추다가 빠져나가야 겠다.
-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한기가 일렁이는 손으로 내 뺨을 만졌다.
그리고는 발꿈치를 올리며 입맞춤을 하려들었다.
‘!!!’
찰나의 순간에 당혹감으로 어찌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하나 결국은 그녀의 입맞춤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게 입맞춤을 하자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며 입술이 시려왔다.
물론 이 정도 한기는 내게 아무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좋냐?
아무리 아름다워도 모르는 사람이 입맞추는데 뭐가 좋아.
게다가 이십대 중반으로 보여도 벽을 넘은 고수라면 실제 나이는 훨씬 더 들었을 거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말랑하고 차가운 혀가 입술을 파고들었다.
긴 첩자 경력에 이런 돌발 상황은 정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
그때 나의 머릿속에 뭔 좋은 수가 떠올랐다.
향화열락궁의 궁주 주사련의 독문 신공의 구결이 말이다.
이에 나는 주사련의 백을 일으키며 구결을 외웠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잠깐 동안 혀와 혀가 닿으며 정신없이 엉키는데, 그녀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탁!
그녀가 살짝 나를 밀쳤다가 이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누구야?”
‘!!!’
눈치 챈 건가?
한데 그녀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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