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298
97화 그래도 살아 >
-쿠르르릉!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정오였지만 어두워진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만 같다.
이곳은 성지 령산에서도 죽은 교인들의 시신을 안장시키는 묘지이다.
묘지에서 북서쪽 편으로 가면 최근에 전사한 교인들을 무덤이 있는 신 매장지도 있다.
비석을 세워놓은 한 무덤 앞.
장례 복장을 입은 붉은 머리카락의 한 여인이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다.
그녀는 바로 백련하였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비석을 바라보는 그녀.
그런 그녀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죽립에 검은 경장을 입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아직도 저러고 있나?”
나의 물음에 죽립의 여인이 답했다.
“그래.”
죽립의 여인은 다름 아닌 백혜향이었다.
평소와 달리 무표정한 백혜향의 눈빛은 배다른 누이 동생인 백련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백혜향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년.”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모든 만사가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흘 째 저러고 있지?
그래.
저러다 쓰러지겠다.
멀쩡하지 않은 몸으로 저렇게 버티고 있다.
이존 서갈마를 비롯해 스승님도 직접 그녀를 데려오려 했지만 저 모습을 보고서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
나는 백련하의 앞에 덩그러니 있는 새로운 무덤을 바라보았다.
비석의 묘비명에는 혈수마녀 한백하라 적혀 있었다.
-투툭! 투투툭!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두 방울씩 내리던 빗방울은 조금씩 거세지며 묘지를 적셨다.
-으득!
이를 갈던 백혜향이 성큼성큼 백련하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오든 말든 백련하는 멍한 눈으로 무덤을 쳐다볼 뿐이었다.
백혜향이 그녀의 옆으로 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백련하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궁상맞게 이러고 있을 거야?”
“……..”
“미친 년 마냥 그러고 앉아 있는다고 무덤에서 그년이 돌아올 것 같아?”
그런 그녀의 말에 멍했던 백련하의 눈빛이 매섭게 날카로워졌다.
어떤 말을 해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그녀였었다.
하지만 백혜향의 이 말만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틀린 말을 했어?”
그런 백혜향의 말에 백련하가 손을 들어 따귀를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를 곱게 맞아줄 백혜향이 아니었다.
후들거리며 힘없이 날아오는 백련하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망가진 그 몸으로 내 뺨을 날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그녀의 말에 백련하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점차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백련하가 중얼거렸다.
“아으으…..아으으으……”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숨을 들이키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뇌에 미친 독의 영향으로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를 보면 가슴이 무거워진다.
이렇게 된 것에 내 탓도 있는 것 같아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울먹거리며 울음을 참으려는 백련하에게 백혜향이 말했다.
“멍 때리지 말고 차라리 울어.”
“아으으으…..”
-쏴아아아아아아!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백혜향이 죽립을 벗으며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어차피 울어도 티 안나.”
그 말이 기점이라도 된 것일까?
얼굴을 일그러뜨려가며 간신히 참던 백련하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으으으어어어어!”
세상이 떠나가라 오열을 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얼굴로 말이다.
* * *
불과 엿새 전.
무림 연맹의 5개 지부 선발대의 침공이 벌어진 그 날.
혈교의 령산 본단은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이번 침공을 막지 못하면 어차피 혈교는 멸망하기에 전력을 아낄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령산 본단 내 자리하고 있는 한 별채.
-촤라라라! 촤라라라!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별채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이가 있었다.
온통 검은 옷으로 치장한 그녀는 혈수마녀 한백하였다.
죄인인 그녀의 두 다리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어 움직일 때마다 그것이 끌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쇠사슬을 끌며 걸어가고 있는 한백하의 하나뿐인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는 죽을 담은 그릇이 있었다.
쟁반을 들고 가던 그녀가 안방의 앞에 멈춰 섰다.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한백하의 그 말에도 불구하고 안방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무표정한 한백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두운 방 안의 침상 위에 멍한 눈으로 누워 있는 백련하가 보였다.
한백하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침상 옆 원형 탁자 위로 쟁반을 올려놓은 그녀가 백련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죽 그릇을 들고서 수저로 한 술 떠서 후후 하고 불었다.
“드셔야 합니다.”
그런 한백하의 말에 백련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것에 익숙한지 한백하는 입 바람으로 식힌 죽 한 숟가락을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입을 벌리세요.”
“……..”
“먹어야 기운을 낼 수 있어요.”
달래는 그녀의 말에도 백련하는 반응이 없었다.
이에 한백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로 숟가락을 가져갔다.
그러자 백련하가 그것을 뿌리쳤다.
-팍!
숟가락이 날아가 죽이 침상을 흩뿌렸다.
백련하가 입을 열었다.
“아으으으…..아으으으으…..”
제대로 발음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망가졌다.
뇌에 퍼져있는 독을 본교의 고수들이 돌아가며 내공으로 제어했지만 조금씩 퍼져나가는 것을 어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수많은 의원들조차 두 손을 들만큼 환마독은 서서히 그녀의 몸을 좀먹었다.
“하아……”
한백하가 두 눈을 감고서 탄식을 흘렸다.
그나마 일존의 내공 치료와 의원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어서 한 달 전부터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백련하였지만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아무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아으으으! 아으으으!”
백련하가 손을 휘저으며 물러나라 시늉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한백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아으으으…..”
“…….구제양 그 놈의 계략을 막지 못했던 제 탓입니다.”
환마독에 중독되어 조종당했던 사실을 괴로워하는 백련하였다.
죽고 싶어하는 그녀를 한백하는 계속 달래 왔다.
아기 때부터 백련하를 돌본 한백하로서는 그녀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한백하가 침상에 떨어진 숟가락을 주워 자신의 소매자락으로 닦아 다시 죽을 떴다.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으으으……”
“드셔야 합니다.”
한백하는 억지로 그녀의 입으로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백련하가 그것을 뱉어내도 계속 넣었다.
그러던 차였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한백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당신!”
“오랜만이군. 육혈성.”
문에 걸터 서있는 흉터투성이의 노인.
그는 바로 배신한 전 삼존 혈사왕 구제양이었다.
지하 금옥에 갇혀 있어야 할 그가 이곳에 나타나자 한백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네놈이 어찌 이곳에…..”
-팍!
그때 한백하의 팔목을 백련하가 꽉 붙잡았다.
백련하의 상태가 이상했다.
혈사왕 구제양을 보는 순간 호흡이 가파라지고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한백하가 그녀의 손을 잡고서 다그쳤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환마독의 암시가 아직 남아있었군.”
독을 통해 세뇌의 암시를 건 당사자가 바로 혈사왕 구제양이었다.
백련하는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백련하의 모습에 노기가 오른 한백하가 소리쳤다.
“당장 아가씨를 원래대로 돌려놓지 못할까!”
그런 그녀의 외침에 혈사왕 구제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고 온 것이네.”
“뭐?”
한백하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때 구제양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혈주. 서둘러야 합니다.”
“잠시면 되네.”
혈주라 불린 구제양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한백하에게 말했다.
“혈수마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싶지 않나?”
“되돌려?”
그녀의 반문에 구제양이 손가락으로 백련하를 가리켰다.
“보아하니 말조차 하기 힘들만큼 환마독이 뇌에 영향을 끼친 듯 하군.”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라니. 제안하는 걸세.”
“제안?”
구제양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독을 해독시켜주고, 자네의 단전을 회복시켜줄 수 있네. 아. 물론 노부가 아니라 노부가 모시는 분이 말일세.”
“네놈이 모시는 분이라고?”
“그래. 그분께서는 생과 사를 정복했고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지.”
그런 구제양의 말에 한백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단전이 폐해지면서 이미 무공이 회복될 거라는 기대는 버렸다.
게다가 어차피 자신은 혈교의 중죄인이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보네만. 아! 깜빡할 뻔 했군. 그분께서는 아직 백련하 아가씨를 혈교의 교주로 점지하고 계시네.”
“교주로 점지해?”
한백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누구기에 혈교의 교주 자리를 제 멋대로 점지한단 말인가.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구제양이 말했다.
“어차피 이번 전쟁이 끝나면 백가의 유일한 혈통은 백련하 아가씨뿐이네.”
“그게 무슨 소리지?”
백련하와 함께 별채에 감금되어 있던 그녀는 아무 것도 몰랐다.
다만 평소와 달리 주변의 인기척이 적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몰랐나 보군. 노부도 금옥에서 나와서 알게 되었지만 일존 그 괴물 같은 늙은이도 죽었고 교주가 된 그놈도 살흉 놈의 겁살검에 베여 목숨이 위태롭다더군.”
“목숨이 위태로워?”
“그런 와중에 무림 연맹에서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결과는 뻔하지.”
이런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현재 혈교는 최악의 위기를 맞은 것이었다.
어쩐지 구제양 저 자가 금옥을 어찌 탈출할 수 있었는지 새삼 이해가 갔다.
혈교의 본단은 현재 취약한 상태인 것이다.
“무상도가 직접 움직였으니 전쟁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을 걸세. 지금 결정한다면 자네와 아가씨를 그분께 데려다주지.”
구제양의 제안에 한백하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망가진 백련하를 고칠 수 있는 자는 만사신의와 혈사왕 구제양뿐이었다.
만사신의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니 대안은 오직 그뿐이었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구제양이 말했다.
“이 기회를 놓칠 겐가? 유일하게 정통성을 이은 백련하 아가씨를 지키고 싶지 않나?”
“……..”
한백하는 자신의 팔을 꽉 잡고 있는 백련하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자신들을 죽이고 가겠지.
이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제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옳은 선택을 할 줄 알았네. 그럼 아가씨를 모시고 따라오게.”
“지금 아가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 혼자 부축하기 힘듭니다.”
“걱정 말게. 아가씨 노부를 따라오시죠.”
그런 구제양의 말에 백련하의 떨림이 멈췄다.
이 모습에 한백하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세뇌의 힘이 이렇게나 무서울 줄은 몰랐다.
그렇게 치료를 받고도 고작 말 몇 마디에 떨림마저 제어되다니 말이다.
“자 따라오게.”
이에 한백하는 백련하를 부축해서 문밖을 벗어났다.
복도를 나오니 이곳저곳에 죽어있는 시종들과 경비를 서던 무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소리 없이 이들을 죽인 것을 보면 구제양보다 앞서 가고 있는 저 복면인은 상당한 무위를 지닌 듯 했다.
‘정말 전쟁 중인가?’
본단에는 눈에 띌 만큼 인원이 없었다.
보아하니 정말로 금옥을 지킬 만큼의 일부만을 남겨두고 전부 전쟁에 동원된 것 같았다.
복면인과 구제양이 향하는 방향은 마구간이 있는 곳이었다.
말을 타고 탈출하려는 모양이었다.
별채 주변을 벗어나 복면인이 먼저 가서 동향을 살피고 오겠다며 그들에게 남으라고 했다.
기다리며 경계를 서던 구제양이 클클 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참으로 모를 일이지 않나. 이렇게 천운이 따를 줄 누가 알았겠나.”
“……..”
“아쉽군. 금옥에서 그놈을 직접 죽일 날만을 기다렸는데.”
구제양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다.
그의 손에 처참히 무너졌으니 말이다.
복수심 하나 때문에 그 모진 고문을 견디며 버틴 것이 용하다.
아니면 이렇게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리라고 확신해서 그런 것일까?
그때 문득 하늘 위를 쳐다본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보았다.
이를 모르는 구제양이 계속 주절거렸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말이네. 자네는 이 선택을 두고두고 노부에게 감사하게 될 걸세.”
“……그런가요?”
“단전도 복구할 수 있고 자네가 그리 따르는 아가씨를 교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시 찾아올 것 같나?”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구제양.
그에게 한백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말했다.
“암시는 풀어주실 거지요?”
“…….적당한 시점에 풀 거네. 적당한 시점에 말이네.”
그런 구제양의 말에 한백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녀는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날카로운 동경의 파편이었다.
단전이 폐해지고 나서 별채에 감금된 이후 늘 이것을 들고 다녔다.
백련하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해서였다.
경계를 서던 구제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혹 딴 생각을 품지 말게. 노부의 말 한 마디면 아직 백련하를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란 사실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푹!
“컥!”
한백하는 전광석화처럼 구제양의 가슴을 찔렀다.
그 역시도 단전이 폐해졌기에 그녀의 기습적인 일격을 피하지 못했다.
“이 년이…….”
한백하가 매섭게 말했다.
“내 비록 아가씨를 위해 살았다고 하나 혈교의 교인이다. 네놈 따위가 아가씨를 멋대로 조종해가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두고 볼줄 알았더냐!”
“이년!”
-꽉!
구제양이 자신을 찌른 한백하의 손목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비록 당했다고 하나 그녀는 외팔이었다.
두 손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독한 년!’
동경의 파편을 붙잡고 있는 손바닥에서 피가 저리 흐르는데도 한백하는 한 팔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다.
이에 구제양은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아악!”
구제양이 비틀거리며 자신의 가슴에 박힌 파편을 붙들었다.
섣불리 뽑으면 출혈이 심할 듯 했다.
그때 한백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여기야아아아아아아!!!”
그런 그녀를 보며 구제양이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네년이 소리를 지른다고 누가 구해주리라 생각하나? 이곳에 남아있는 교인들은 갈주(喝主)의 일초지적도 못되는 놈들 뿐이다.”
구제양은 자신을 구하러 온 복면인을 과신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를 상대할 만한 고수는 현재 혈교에 아무도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만 닥쳐!”
구제양이 한 손으로 박혀있는 파편을 붙잡고서 소리를 지르는 한백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한백하가 달려드는 구제양의 팔을 붙잡고서 뒤로 넘겼다.
-파팍!
“큭!”
내공이 없다고 해도 초절정 고수였던 그녀다.
기본적인 외공이 약할 리가 만무했다.
구제양을 엎어 친 한백하가 다급히 가슴에 박힌 파편을 밟았다.
“끄아아아악!”
그녀는 곧바로 달려가 백련하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 달려야 합니다.”
멍한 얼굴의 그녀를 손을 잡고서 한백하는 무조건 달리려고 했다.
어떻게든 백련하를 데리고 도망쳐야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푹!
한백하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검날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갈주가 자신의 등을 찌른 것이었다.
-푹!
“쿨럭…..”
검을 뽑자 한백하가 피 기침을 뿜으며 앞으로 백련하와 함께 엎어지고 말았다.
멍한 눈의 백련하는 목각 인형과도 같았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는 한백하의 표정이 애처로웠다.
“아가씨….”
끝내 백련하를 지키지 못한다는 생각에 냉혈마녀라고 불리던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구제양이 비틀거리며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빌어먹을 년!”
갈주에게 검을 빼앗다시피 한 구제양이 한백하의 등을 찔렀다.
-푹! 푹!
“어차피 외팔이 년 따위는 필요없다.”
분을 풀기 위해서인지 이성을 잃은 구제양은 한백하를 미친 듯이 찔렀다.
그렇게 한참을 검으로 찌르던 구제양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한백하는 혹여 자신의 밑에 깔린 백련하가 검에 찔리기라도 할까봐 한 팔을 꼿꼿하게 세워 버티고 있었다.
“이, 이년이…..”
끝까지 자신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구제양은 검을 들어 단숨에 한백하의 목을 베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촥!
“끄헉!”
검을 들고 있던 구제양의 어깨가 잘려나가고 말았다.
구제양은 바닥에 떨어져 들썩거리는 자신의 오른팔을 보며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날카로운 예기가 갑자기 허공에서 날아들었다.
고통을 참고서 위를 쳐다보는 순간,
“네놈이 어떻게?”
악귀 가면을 쓴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그를 향해 쇄도해오고 있었다.
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의 안면으로 손바닥이 날아들었고,
-우드드드득!
구제양의 목이 그대로 꺾이며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머리가 몸을 파고들었으니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겠는가.
구제양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이런!”
찰나에 구제양이 당하자 갈주가 다급히 악귀 가면의 사내를 향해 검결지를 찌르려고 했다.
-촥!
그러나 뻗은 손이 그대로 잘려나가고 말았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어지간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 자부하는 그였다.
‘이, 이놈은 아니야.’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비, 빌어먹을!”
갈주는 다급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도망가는 것 이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악귀 가면의 사내의 손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그를 앞지른 사내가 갈주를 제압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주르륵! 투툭! 투투툭!
한백하에게서 흘러나온 핏물이 백련하의 얼굴을 적셨다.
뜨거운 핏물이 계속해서 얼굴을 적시자 얼마 있지 않아 백련하의 멍했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의 동공이 떨려왔다.
“아으으……”
창백한 얼굴의 한백하가 보였다.
백련하는 죽어가는 그녀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장 그녀를 살려야만 했다.
그때 한 팔로 버틴 것이 힘이 풀렸는지 한백하가 그녀에게로 엎어졌다.
“아으으으으…….”
죽어가는 한백하가 힘겹게 그녀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살아야……합니다.”
“아으으으으! 아어어어엉…..”
백련하의 눈에서 봇물이 쏟아지듯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유모처럼, 아니 엄마처럼 돌봐줬던 그녀였다.
“아어어어어어! 아어어어어!”
“……..그리…..울면…….어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머리를 쓰다듬던 한백하의 손바닥이 힘없이 떨어졌다.
백련하는 그녀를 부둥켜 안고 오열했다.
하늘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 * *
-쏴아아아아아!
비는 여전히 내렸다.
하지만 울부짖던 백련하의 눈물은 그쳤다.
무덤 앞에서 반 시진이 넘게 오열을 하면서 목이 전부 쉬어버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백혜향이 말했다.
“죽고 싶어? 그래도 살아.”
백련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 이상 그녀의 눈동자는 죽어가는 눈빛이 아니었다.
백혜향은 자신의 할 노릇을 다했다는 듯이 뒤를 돌아 나에게로 왔다.
“언니 노릇을 제대로 했네.”
“언니는 무슨.”
백혜향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만사신의는 내가 찾겠어. 그러니 너는 놈을 잡아. 반드시!”
“……..그래.”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놈을 잡을 거다.
놈과 나는 너무 많은 악연으로 이어져 있다.
그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기분도 더러운데 오늘은 코가 비뚤어 질 때까지 마셔야겠어.”
“아직 몸이 낫지 않았을 텐데.”
“알게 뭐야!”
백혜향이 젖은 죽립을 머리에 쓴 채 신형을 날렸다.
그렇게 서로 죽일 듯이 으르릉 거리더니 그래도 피가 이어지긴 했나 보다.
나도 이제 슬 내려가야 겠다.
-안 데려갈 거야?
아니.
이제 알아서 내려올 거야.
묘지에서 하산하려 하는 나의 눈에 백련하가 비석에 뭔가를 새겨 넣는 것이 보였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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