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347
2화 백혜향 이야기 (1) >
불과 보름 전의 광서성 령산의 혈교.
혈교 본단 건물에 있는 교주 집무실에서 짜증이 섞인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한가득 쌓여있는 보고서들을 보며 백혜향이 책상에 턱을 괴었다.
그렇게 바라왔던 교주의 자리가 아니던가.
한데 부교주 시절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일이 늘었다.
‘망할.’
모든 결재의 최종 결정권자가 교주이다보니, 아무리 처결해도 끝도 없이 보고서들이 쌓여만 갔다.
끝도 없는 서류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뭔가 짜증이 밀려온다.
교주 대리 때는 그래도 존자들과 혈성들이 도왔었는데, 지금은 혈교가 과거 정사대전 때보다도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모두가 바빠졌다.
‘영역이 넓다고 좋은 게 아니군.’
장강 이남의 대부분이 혈교의 영역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일이 너무 많아졌다.
‘떠넘길 때 맡지 않았어야 했어.’
당시에는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넝쿨 채 들어온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왜인지 모르게 속은 기분이다.
‘사마영 그 아이와 얼음 계집과도 얼른 해결을 봐야하는데.’
무공 연마는커녕 시간을 내기도 힘들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데,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교주.
“들어와.”
기척만으로 누군지 곧바로 알아차린 그녀였다.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사혈성 도장호와 원래는 이존이었지만 기기괴괴 해악천이 벽을 넘어서면서 삼존으로 밀려난 난마도제 서갈마였다.
두 사람의 손에는 새로운 보고서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
그것을 발견한 백혜향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네?”
보고도 하기 전에 들어오라 했다가 나가라고 하니 두 존성이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빤히 쳐다보던 백혜향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짜증나.”
“…….결재를 처리하시는 일이 많이 지루하신가 보군요.”
사혈성 도장호가 책상 위로 보고서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에 백혜향이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말이라고 하나. 집무실 밖을 못 벗어나고 있는데 말이야.”
중원의 위기라 불리던 인요 전쟁 후로 무림은 조용해졌다.
언제까지 이 구도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현 무림은 평화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심 그녀가 바랐던 것은 피바람이 부는 전쟁이었다.
따뜻한 방에서 목침을 베고서 편히 눕는 것보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터를 원했지만 현실은 집무실에서 서지만 만지고 있다.
“정 답답하시면 바람이라도 잠시 쐬는 것은 어떠신지요?”
“잠깐으로 충족될 것 같나?”
“…….”
심기가 불편한 그녀의 말에 사혈성 도장호가 입을 다물었다.
더 건드렸다가 백혜향의 성격에 어떤 사달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여겨서였다.
이런 백혜향을 보며 난마도제 서갈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흐음. 저 교주.”
“왜 그러지? 삼존?”
“방금 한 가지 소식이 들어왔습니다만.”
백혜향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무슨 소식이기에 그렇게 눈치를 보는 거지? 설마 련하가 그 아이가 치료받는 도중에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
환마독에 중독된 백련하는 만사신의에게 치료 받고 있었다.
그 두 눈이 금안인 서복이라는 자도 상태가 나빴지만, 백련하의 경우는 뇌나 골수에 미친 독이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서 자칫 가망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어, 내심 우려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건 아닙니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뭐기에 그러는 거지?”
“음……사마영 소저가 회임을 했다고 합니다.”
‘!!!’
그 말을 들은 백혜향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었다.
혼인을 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질 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백혜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그런 쪽으로는 관심 없는 척 빼더니, 나보다 먼저 운휘를 맛보았군.”
“크흠.”
그녀의 거침없는 말에 서갈마가 헛기침을 터뜨렸다.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가 말했다.
“자리 굳히기인가.”
백혜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는 인요 전쟁이 끝난 후에 사마영과 합의를 보려고 했다.
그런데 교주 자리를 위임받으면서 바빠지는 바람에 이를 미루게 되었었는데, 결국 사마영이 선수를 치고 말았다.
아이도 먼저 가졌으니 첫 번째 부인 자리는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칫.”
이렇게 되면 계획과 달라진다.
원래 백혜향은 여유가 생기는 즉시 운휘를 먼저 취하려고 했다.
운휘가 자신을 분명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사마영을 대할 때에 비하면 묘하게 어려워하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그래서 사마영보다 먼저 잠자리를 가져서 더 빨리 쟁취하려고 했는데 이미 물 건너갔다.
첫 번째 부인 자리는 확실하게 사마영이었다.
‘자존심 구겨지는군.’
그녀는 무엇이든 일인자의 자리를 좋아했다.
명색이 혈교의 교주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있어서 첫 번째가 못 된다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한데 별 수 있는가.
이미 회임을 했다는데.
그때 문득 백혜향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이러다 그 얼음 계집 년에게 마저 밀려나는 건 아니겠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집무실에 박혀 지내던 자신과 달리 운휘의 가까이에 있는 그녀가 아니던가.
아직까지 운휘가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이 눈에 띄게 보여서, 자신들끼리 위아래를 결정하면 될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되면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은근히 거슬리네.”
“네? 그게 무슨?”
“설백인가 하는 그년. 운휘의 누이 동생인 영영이한테 붙어서 계속 작업치는 걸 내버려 뒀었는데 또 선수를 빼앗길 지도 모르겠는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운휘는 누이 동생인 영영이를 아낀다.
설백이 그런 영영이의 전폭적인 지지가 받는다면 자칫 두 번째 자리를 빼앗길 지도 몰랐다.
더이상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백혜향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교주?”
“내가 먼저 운휘의 아이를 가져야 겠어.”
“쿨럭쿨럭.”
“허어.”
거침없는 그녀의 말에 두 존성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보통 여자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아무리 밑에 사람들이라고 해도 대놓고 이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위인은 그녀뿐일 것이다.
“잘됐네. 사마영 그 아이도 이제 막 회임했다면 내가 먼저 아기를 낳으면 그만이잖아?”
그런 그녀의 말에 서갈마가 맙소사 하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뛰어난 무재도 그렇고 혈교를 이끌어가는 우두머리로서의 자질 때문에 미처 가려 졌었는데, 그 외적인 면에서는 은근히 순진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는데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백혜향은 정말로 당장에 운휘에게 가려고 하는지, 사혈성 도장호에게 명을 내렸다.
“도장호. 한동안 내 대리로서 상급 결재안을 제외한 모든 보고서들을 처결하도록….”
“교주. 일단 진정하시지요.”
서갈마의 만류에 그녀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뭘 진정하라는 거지?”
“크흠. 교주…..회임이라는 게 원한다고 불쑥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 사혈성?”
“……그렇습니다.”
도장호가 멋쩍게 답변했다.
지금은 수장으로 모시기는 하지만 전전대 교주의 자식들인 백가 자매들을 조카처럼도 여기는 도장호였다.
그러다보니 그녀에게 이런 걸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참 낯 간지러운 일이었다.
반면 서갈마는 진지했다.
‘교주는 한다면 한다.’
그가 지켜본 백혜향은 뜻한 바를 반드시 해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만류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제 막 교주의 위에 오른 그녀가 일을 저질러 덜컥 회임부터 한다면, 장차 교를 이끌어나가는데 지장이 클 것이다.
‘정말 많이 좋아하나 보군.’
그녀를 볼 때마다 이 점은 참 의외라 여겼다.
두 사람 사이에 대체 어떤 유대가 있었기에 백혜향과 같이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인 여자가 이리 진운휘에게 집착을 하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럼 그냥 지켜보라는 것이냐?”
심기가 불편해진 그녀에게 서갈마가 말했다.
“……방법을 바꾸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방법?”
“교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빙한여제가 소영영의 곁에서 물밑 작업을 펼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그의 말에 당장에라도 나갈 것 같던 백혜향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관심이 간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하면 삼존에게는 다른 묘책이라도 있나?”
백혜향의 진지한 물음에 서갈마가 보고서 중 하나를 넘겼다.
결재 보고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갈용 보고서였다.
이를 읽은 백혜향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런 그녀에게 서갈마가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무쌍성주가 호남성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니, 이참에 흠흠 시아버지 되실 분께 먼저 눈도장을 찍고 인정받으신다면…..”
조심스럽게 뒷말을 흐렸다.
자존심이 강한 백혜향이 이를 받아들일지 확신이 가지 않아서였다.
예상대로 백혜향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시아버지라……”
시아버지가 될 무정풍신 진성백에 관해서는 조금도 염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경험이 많은 서갈마가 부드러운 어조로 조언했다.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은 연인 간의 일일지 모르겠으나, 혼인이 되면 그때부터는 가족의 일이 되지요. 무쌍성주가 교주께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런 그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럼 삼존의 묘책을 채택하겠다.”
‘……교주. 묘책이라는 말씀은 부디 빼주십시오.’
그리 말하니 괜히 주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사람인 사혈성 도장호를 보기가 낯 부끄러웠다.
* * *
다시 시점은 보름 후로 돌아온다.
“무쌍성주 그대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
평소와 같은 오만한 말투로 말하려는 백혜향을 서갈마가 급히 만류했다.
그리고 귓가로 작게 속삭였다.
“교주……아무리 그래도 시아버지가 되실 분이라면 어느 정도 예를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이에 백혜향의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일존 단위강으로부터 교주는 항시 위엄과 오만함을 갖춰야 한다고 배웠던 그녀다.
그래서 어렸을 적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존대를 취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전대 교주인 혈마 진운휘에게마저도 사적인 자리에서 편하게 이야기 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오글거리는군.’
뭔가 기분이 묘해지는 그녀였다.
그저 운휘를 가지겠다는 생각은 했어도 이런 상황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어쨌거나 삼존 서갈마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뭔가 낯 간지럽다는 생각에 백혜향은 괜히 쭈뼛거리며 진성백에게 말했다.
“아, 아버님!”
‘!?’
순간 진성백과 하성운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들은 현 혈교의 교주인 백혜향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잠시 멍해져 있던 진성백이 입술을 뗐다.
“…….혈교주. 본 성주는 대체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구려.”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는 진성백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백혜향이 화끈거리다 못해 얼굴이 점점 빨개져서 입을 열었다.
“들은 그대로다. 아니 그대로입니다.”
“들은 그대로라니?”
의아해하는 그의 말에 백혜향은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버님이라고 말하고나서부터 오글거리는 느낌에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서갈마가 전음으로 조언을 했다.
이런 조언에 백혜향이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그녀의 방식과 맞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답게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여겼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이내 진성백과 하성운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서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아버님! 제게 아드님을 주십쇼!”
‘!?’
그녀의 당당한 요구에 진성백과 하성운의 어안이 또 다시 벙벙해졌다.
‘아니?’
조언보다 한 발 더 나간 그녀의 말에 서갈마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답기는 했지만 저 두 사람이 많이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물론 예상대로였다.
“이보게. 사위…..내 귀가 잘못되었는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진운휘가 혈마가 되었다고 이야기했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혈교의 신임 교주가 며느리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놀람보다 당혹스러워 하는 두 사람의 반응에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고민하던 백혜향이 뒷말을 붙였다.
“아드님을 제게 주시면 두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하겠습니다.”
‘…….?’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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