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348
2화 백혜향 이야기 (2) >
“…….하아.”
마차 안에서 백혜향이 손등에 턱을 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백혜향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난마도제 서갈마는 말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그녀가 그렇게 말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피 한 방울이라니……’
본래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던가.
가사 일을 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로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그게 피 한 방울로 둔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으음.’
그 당시 무쌍성주 진성백과 전 교주의 외조부인 하성운의 표정은 가관이 아니었다.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이런 얼굴이었다.
듣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었다.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교주의 일만 아니라면 딱 술자리 안주감이다.
하지만 교주는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 것이기에 웃으면 안 된다.
안 그래도 심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괜히 자극했다가 모든 화가 자신에게 미칠 지도 몰랐다.
“교주?”
“……아무 말 하지마.”
백혜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진득하게 머금은 살기 어린 목소리에 서갈마가 침을 꿀꺽 삼켰다.
-으득!
백혜향은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아까 전의 일은 쪽팔리다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런 말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
‘젠장.’
명색이 혈교 교주이다.
그런 자신이 시아버지 될 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말까지 하다니.
“이래서야 여느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잖아.”
‘!?’
백혜향의 그 말에 서갈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걱정이라면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삼존.”
“네. 교주.”
“왜 말이 없지?”
“……..”
이걸 뭐라고 답해야 할까?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서갈마는 참았다.
지금 백혜향의 상태는 자신이 알고 있던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자방의 역할을 자처했으니 대책을 내놔야 할 거 아냐.”
‘아니?’
언제 자신이 장자방이 된 건지 알 수 없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서갈마가 말했다.
“교주.”
“말해.”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면모를 부각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면모?”
“방금 전에 교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백혜향이 무슨 소리냐며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해했다.
이에 서갈마가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다.
“노부가 만약 시아버지로서 며느리를 본다면 저 역시도 그런 면을 유심히 살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이 뭐라는 거지?”
그런 그녀의 물음에 서갈마가 진지한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여성스러운 면입니다.”
“……..”
“얼마나 남편을 잘 보살필 수 있는지 뭐 그런 여러…..”
그를 바라보는 백혜향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멸문의 길을 걸었던 혈교를 되살리기 위해서, 또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여자로서의 삶을 완전히 버렸던 그녀다.
그런데 여성스러운 면을 부각시키라는 말에 기분이 최저치로 가라앉았다.
‘하.’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강하게 헤집고 있었다.
그런 백혜향의 심기를 빠르게 읽어낸 서갈마가 재빨리 방향을 바꾸었다.
“…..가지를 볼 수 있지만 교주께서 딱히 납득이 가지 않으시면 굳이 그런 면을 부각시키실 필요는 없지요. 다른 장점을 내세우는 것도….”
“어떤 장점을 말이지?”
“교주께서는 대 혈교의 교주이시고…..”
“무쌍성주에게는 아들이 물려준 것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겠지.”
“크흠.”
백혜향이 이런 쪽에 문외하다고 해도 통찰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입을 다물던 서갈마가 말했다.
“어느 집안의 규수가 교주님처럼 벽을 넘어선 무위를…..”
“시아버지 될 인간도 벽을 넘었고 남편으로 삼아주려는 인간도 벽을 넘어섰지.”
“……..”
“그리고 설백 그 년도 마찬가지지.”
자존심 상 이렇게 벽을 넘어섰다라고 표현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설백은 초인의 벽마저 넘어서서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므로 무공이 뛰어난 것은 부각시킬 거리가 아니었다.
이렇게 보니 오히려 진운휘의 가문에서는 마치 벽을 넘어서는 것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부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난감하군.’
서갈마 역시도 생각해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불공평하다 싶을 만큼 한 가문에 모든 힘이 집약되는 그런 느낌이다.
어쨌거나 백혜향의 말대로 자신이 권했던 것들은 딱히 장점보다는 기본 소양이 될 판국이었다.
“실망스럽군. 장자방.”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장자방이라고 자처한 기억은 없다.
이거 참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교주더러 그냥 포기하고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녀의 체면이 곧 혈교의 체면이었다.
“나름 연륜도 있고 제자의 아내라고는 해도 나름 며느리를 들였기에 도움이 될 거라 여겼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 않네?”
“크흠.”
실망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그녀를 보자니 그 역시도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알겠습니다. 노부가 반드시 교주를 인정받게 하겠나이다.”
“말만 하지 말고 구체적인 방안을…..”
“방안을 얻고 싶으시다면 노부의 제안을 전적으로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전적으로 노부를 믿고 따라주시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번처럼 돌발행동을 하신다면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돌발 행동…..을 하지 마라?”
“그렇습니다.”
결의가 담긴 서갈마의 목소리에 백혜향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의지가 보이기는 했는데 이 거슬리는 기분은 뭘까?
뭔가 찝찝하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방안도 없었다.
“그럼 노부를 전적으로 따라주시겠습니까?”
“확실한 성과를 내보일 수 있나?”
“내보이겠습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노부가 이 사태를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
“물러날 건 없고 각오는 해야 할 거야.”
그런 그녀의 말에 서갈마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미 패는 던져졌다.
이제는 어떻게든 그녀의 바람을 들어줘야 했다.
* * *
혈교의 마차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 무쌍성의 마차 안.
무쌍성의 성주이자 진운휘의 부친인 진성백이 연신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신음성을 내뱉고 있다.
“흐음.”
그런 그에게 진운휘의 외조부인 하성운이 말했다.
“고민이 되나보군. 사위.”
“난감하군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런 그가 이해된다는 듯이 하성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역시도 많이 놀랐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대 혈교의 교주가 며느리가 되고 싶다고 아주 당당하게 운휘를 달라고 요청을 했다.
“허참.”
진운휘에게는 이미 정혼녀가 있었다.
그것도 아이를 가졌다.
물론 삼처사첩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이 흠이 아닌 시대다.
천하제일의 명성을 가진 운휘라면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다만 며느리가 될 사마영이 오대악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사마착이 여식이기에 다들 언감생심으로 여길 뿐이었었다.
“혈교의 교주라니……”
별호에 혈(血)이 붙을 만큼 악명 또한 대단한 여자다.
그런 여자가 운휘를 좋아한다고 하니 이걸 좋아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아마 사위도 마찬가지일거라 여겼다.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렸나?”
일단 혈교주더러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혹스럽다고 말이다.
장인어른인 하성운의 물음에 진성백이 짙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혈교주의 말대로 운휘도 좋아한다면 딱히 아버지로서 반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뭔가 시아버지로서 정이 가는 며느리 상은 아니다.
혈향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데다가 ‘나는 천상 무인이다.’ 이런 기세를 풀풀 풍기고 있기에 과연 아내로서 아들을 잘 보필할까 의문이 들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군.”
“네?”
“눈빛에 천성적으로 살기가 가득하더군.”
“…….”
“날카롭게 벼른 칼과 같더군. 관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일단 눈매가 사나워.”
“흐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눈매라……’
그렇다고 해서 혈교주가 여느 미녀들과 비교해서 밀리는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체적으로 굉장히 날카로울 뿐이었다.
딱히 꾸민 것도 아니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여자일수록 오히려 겉과 다르게 속은 따뜻할 수도 있네. 자네 장모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지.”
“장모님이 말입니까?”
순간 진성백의 머릿속에 돌아가신 장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확실히 날카로운 상을 가지고 계셨다.
하령과의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찾아갔을 때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분이었다.
진성백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군요.”
하나 막상 겪고 보니 그분만큼 자신을 챙겨주셨던 사람도 없었다.
진성백이 장인어른인 하성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말끔히 사라지게 해주는 것 같다.
“장인어른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들리는 소문과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겠군요.”
“원래 다 그렇네. 관상으로 사람을 판단했다면 노부가 어찌 자네를 사위로 받아들였겠나?”
“네?”
“자네처럼 무뚝뚝한 사람이 내 딸을 과연 행복하게 해주겠나 싶었었네.”
“…….송구스럽습니다.”
갑자기 하령이 거론되자 진성백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좋은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하진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차 싶었는지 하성운이 화제를 돌렸다.
“한데 운휘가 자네를 닮지 않았구먼.”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해하는 그에게 하성운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일편단심으로 내 딸을 좋아하던 것도 그랬지만 워낙 무뚝뚝해서 여자들이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서 가장 마음에 들었었지.”
“……..”
장인의 본심에 진성백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성운이 예전이 떠올랐는지 말했다.
“나 때는 말일세. 무쌍성의 수많은 종파의 여인들이 비월검객이라는 명성에 아주 숨이 넘어갔었지. 연서가 하루에도 수통씩 왔었다네.”
방금 전까지 장모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도 잊고서 자랑하고 있었다.
이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진성백이 조용히 말했다.
“…….저도 혼인하고도 연서를 몇 번 받았습니다만.”
“뭐?”
순식간에 무섭게 굳은 장인어른의 얼굴에 진성백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자랑에 넘어가 무심결에 아내도 몰랐던 이야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 * *
북상한지 반나절 가량이 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호수와 함께 수 채의 가옥이 연결된 호화로운 객잔이 보였다.
원래는 객들이 많은 곳이었으나 주변에 붙여진 푯말들로 오가던 이들이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푯말에는 이틀 동안 객잔이 대실되었다고 적혀있었다.
무쌍성의 마차 행렬이 그런 객잔의 큰 정원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문이 열리며 진성백과 하성운이 내렸다.
“그 사이에 이런 곳을 통째로 빌리다니 혈교주도 통이 크구먼.”
“그렇군요.”
대화를 나눌 마땅한 장소를 물색한다고 하더니, 꽤 호화로운 곳을 잡았다.
앞서 가던 행렬의 기척 중에 혈교주의 것이 사라진 걸 감지했었는데, 어느새 객잔의 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미리 와서 준비를 한 건가?’
밑에 사람을 보내면 되는데, 교주가 직접 움직인 걸 보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장인어른의 말대로 자신이 너무 우려한 걸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세심하게 신경쓰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흠.’
일단 대화를 나눠보면 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으리라.
미리 기다리고 있던 혈교의 교인들의 안내를 받아 객잔의 본당 건물을 지나, 작은 호수가 있는 후원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멋들어진 커다란 전각이 있었다.
연회라도 하는 것처럼 수많은 숙수들이 전각 앞쪽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고, 악공들이 잔잔한 연주를 하고 있었다.
“허허허. 참으로 세심하군.”
이것이 나쁘지 않았는지 하성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전각 쪽으로 걸어가는데, 백혜향의 기척으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에 진성백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고개를 돌린 진성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러나? 사….”
의아해서 사위가 바라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하성운의 두 눈도 커졌다.
그곳에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운 궁장(宮裝)을 입은 백혜향이 보였다.
늘 무복에 가까운 간편한 경장만을 입었던 그녀지만 지금은 묶었던 머리도 내리고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어.”
꾸미면 아름다울 거라 여겼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런 두 사람을 향해 상기된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백혜향.
그녀의 귓가로 전음성이 들려왔다.
-으득!
서갈마의 전음에 백혜향은 치밀어오르는 짜증과 쪽팔림을 애써 가라앉혔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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