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350
2화 백혜향 이야기 (4) >
‘빌어먹을 년이!’
백혜향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다 된 밥상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어찌 이렇게 나타났단 말인가.
너무 절묘한 순간에 나타나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그녀도 그랬지만 무쌍성주 진성백이나 그의 장인어른인 하성운 역시도 감정적으로 동요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둘째 며느리?”
그렇지 않아도 혈교의 교주 백혜향이 며느리를 자처해서 놀랐던 참이었다.
그런데 인요 전쟁의 신흥 강자로 등장하여 팔대고수의 자리를 차지한 빙한여제 설백 또한 운휘의 며느리라고 자처를 하니 당혹스럽기마저 했다.
‘운휘 이 녀석 대체…..’
진성백조차 아들인 진운휘가 대체 뭘 하고 다녔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지금 나타난 설백도 여느 평범한 여인과 관련이 멀었다.
인요 전쟁 때를 떠올리면 현 무림에서 세 손가락에 꼽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최고의 무력을 지녔다.
한데 이런 여자가 왜 며느리를 자처한단 말인가?
“사, 사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당혹스러워하는데, 백혜향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누가 둘째 며느리라는 거지?”
“나라고 했을 텐데. 동생.”
“동생? 하!”
백혜향의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솟구치는 붉은 아지랑이에 위로 흩날렸다.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하는 살기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질 정도였다.
“헉!”
“수, 숨이 막혀….”
“쿨럭.”
요리를 하던 숙수들과 악공들이 그 여파에 토를 하고 숨을 쉬지 못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그녀의 귓가로 서갈마의 전음이 들려왔다.
만류하는 말에 그녀의 시선이 진성백과 하성운에게로 향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녀는 아차 싶었는지 내뿜었던 살기를 빠르게 갈무리했다.
그제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살 것 같다는 얼굴들이 되었다.
반면 설백은 그녀를 도발하기라도 하듯 코웃음을 쳤다.
“훗.”
‘이게 정말!’
다시 욱하려고 했지만 백혜향은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여기서 흥분한다면 서갈마의 말대로 기껏 쌓은 탑이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몰랐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냉철한 자가 살아남는 법이었다.
백혜향은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께서 인정한 것도 아니고 운휘, 아니 부군께서 인정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네가 둘째 며느리가 될 수 있지?”
날이 선 그녀의 물음에 설백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첫째 며느리인 사마영 언니한테 인정받았으니까.”
“걔….아니…..”
차마 입에서 언니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진성백이 지켜보는 앞이기에 결국 백혜향은 잠시 자존심을 접어두고서 입술을 뗐다.
“사마영……..으은니이가….”
“뭐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언니를 뭉개서 내뱉자 설백이 그것을 지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혜향은 할 말을 마저 했다.
“…….언제부터 둘째 며느리를 결정할 권한이 생긴 거지? 아버님과 외조부님이 계신대 말이야.”
일부러 그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사마영의 인정마저 받아가며 운휘의 환심을 살 정도라면 절대로 시아버지가 될 진성백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예상대로 설백의 시선은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설백이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외조부님. 자고로 며느리로서의 덕목은 상공을 얼마나 잘 모시고 바깥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내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아내로서의 덕목을 익혀왔기에
누구보다 운휘 상공을 모실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물 흐르듯이 나오는 그녀의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놀라워하던 진성백과 하성운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일말의 관심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이에 질세라 백혜향도 소리 높여 그들에게 말했다.
“저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아아. 그래? 그럼 잘 됐네. 여기서 증명하면 되겠네.”
“증명?”
의아해하는데 설백이 미소를 지으며 진성백과 하성운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요리란 아내의 기본 덕목이죠. 마침 이곳에 식자재와 조리 도구들이 있으니 아버님과 외조부님께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 참.”
자신감이 가득한 그녀의 말에 하성운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경쟁심을 불태우는 두 여인들은 현 무림에서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자신의 손주 한 사람을 두고서 이렇게 다투는 광경을 보게 되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우려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는 사이 어느새 설백이 화로와 조리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젠장.’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에 백혜향은 속으로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안 그래도 자신은 기껏 속성으로 숙지했던 요리를 망쳤는데, 여기서 설백이 조금이라도 잘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떻겠는가.
‘뭔가 조치가 필요해.’
가만히 지켜본다면 그녀가 주목을 받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가있었다.
눈치를 보던 숙수들이 설백에게 다가가 물었다.
“필요하신 재료나 밑준비라도 있으신지?”
“괜찮으니 전부 나와 있어요.”
“네?”
야외 조리대에 있던 숙수들더러 전부 나오라고 하니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비치되어 있는 조리대의 숫자는 여덟.
설마 여덟 개를 전부 쓸 리는 없을 테고 주변에 누가 있는 것이 거추장스러워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여긴 숙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리대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전부 비켜서자 그녀는 여덟 개의 도마 위로 식재료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아니 설마?”
“동시에 음식을 여덟 개나 하려는 거야?”
그 모습에 숙수들이 웅성거렸다.
백혜향 역시도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년. 너무 욕심내는 거 아냐?’
아무리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이번에 속성으로 배우면서 숙수들에게 들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요리에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맛을 봐야 하고 조리에도 수많은 방법과 걸리는 시간이 있기에 동시 조리를 하게 되면 자칫 모든 요리를 망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두 가지만 되어도 그럴 텐데 그게 여덟이라면 집중력이 크게 분산될 게 틀림없었다.
‘무덤을 파는군.’
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스르륵! 슈슈슈슈!
설백의 인영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엄청난 속도로 여덟 조리대를 넘나다니며 식자재를 다듬는데 입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모, 몸이 나뉘었어.”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야?”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설백이 분신술을 쓴 것처럼 보일 거다.
하지만 잔상을 일으킬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하!’
백혜향은 기가 막혀서 콧방귀를 뀌었다.
요리를 하는데 고도의 경신법인 이형환위(移形換位)까지 쓰고 있었다.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용을 쓰네.’
한데 숙수들의 반응이 가관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형환위에 놀라는가 싶더니 그들이 하나 같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어찌 저런 조리법이 있단 말인가?”
“황실의 어주사라고 해도 저리 식재들을 다루지 못할 걸세.”
“내 오십여 년의 숙수 경력에 저런 신기에 다다른 솜씨는 처음 보네.”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백혜향은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것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신기에 가까운 요리 솜씨를 지니고 있는 설백이었다.
“대단허이. 사위.”
하성운을 비롯해 진성백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위와 화려한 요리 솜씨를 동시에 뽐내니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으리라.
‘뭔가 대책을 세우라고 삼존.’
백혜향이 고개를 돌려서 서갈마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서갈마도 넋을 놓고 이를 보고 있었다.
‘……..’
짜증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이윽고 화려한 기술로 요리를 끝낸 설백이 음식들을 들고 왔다.
그나마 알만한 것들은 오향장육에 유린기, 게살 볶음, 동파육 정도였고 나머지 절반은 어디서 듣도 본 적도 없는 음식들로 군침이 돌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기 전에 드시죠.”
“허어.”
탄성을 흘리던 두 사람이 이내 음식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하나씩 맛을 보는데 진성백의 눈이 커졌고, 하성운은 연신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흡족하다 못해 황홀하기마저 했다.
“허허허. 별미로세.”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진위를 의심하던 진성백조차 일순간 그녀의 기가 막힌 요리 솜씨에 아들 운휘가 부러워질 지경이었다.
“후후.”
설백이 이겼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보였다.
약이 바짝 오른 백혜향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설백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어떠세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며느리 상이었다.
어느 시아버지가 이런 요리 솜씨와 붙임성 있는 모습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흠.’
확실히 며느리로서 누군가를 우위에 둔다고 한다면, 설백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진성백이었다.
“…….맛이 좋구려. 음식이 사람을 기쁘게 해준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소.”
“어머. 기뻐라.”
진성백의 입에서 나온 최고의 칭찬에 의기양양해하는 설백.
모든 것이 그녀의 승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때 백혜향이 입 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백 살이나 먹은 노인네가 젊은 남편 하나 얻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군.”
‘!?’
그녀의 폭로에 진성백과 하성운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졌다.
웃고 있던 설백의 얼굴또한 균열이라도 간 것처럼 일그러졌다.
혹시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운휘를 통해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 자리에서 공개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그녀였다.
“너!”
방금 전의 붙임성 있던 며느리 상이 아수라처럼 무섭게 바뀌었다.
하지만 이내 진성백과 하성운을 의식했는지, 표정을 풀고서 서둘러 해명을 했다.
“아버님 일단 제 말을…..”
“삼백 살이라니? 혈교주의 말이 사실이오?”
진지한 진성백의 물음에 그녀는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 그녀는 스스로의 나이를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별개의 문제였다.
‘…….’
운휘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알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염두하지 않았었는데, 모든 진실을 알고 나니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수백 세의 연하에게 반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사실이오?”
이미 드러났는데 속여서 어쩌겠는가.
입술을 질끈 깨물던 그녀가 이내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입니다. 하나 진심으로 그를…..”
“어이쿠.”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하성운이 순간 비틀거렸다.
그런 그를 진성백이 다급히 부축했다.
“장인어른!”
“사, 사위…..운휘…..운휘 이 녀석 대체…..”
차마 당사자의 앞이라 그런지 하성운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연상이라면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한데 이건 아니지 않는가.
‘……연상이 아니라 조상이잖니.’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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