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79
32화 천기(天璣) (3) >
[부디 본가에 남아 있어주오. 나를 좋아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그대와 자식을 위해서라도 생각해주길 바라오.] [소 가주님……]머릿속에 보이는 광경들.
그것은 침상에 걸터앉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가주 소익헌의 모습이었다.
그런 나의 머릿속에 청령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구나.
‘너도 보여?’
-그래. 이건 마치 내 기억 속의 그때와 같구나.
‘네 기억이라고?’
어머니인 하 부인과 가주 소익헌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훨씬 젊고 아름다웠고 가주 소익헌 또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가주 소익헌에게 말했다.
그런 어머니의 말에 가주 소익헌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기쁨이 보는 것만으로 전해졌다.
-지금 보는 것이 네 어미가 후처로 들어왔을 때다.
청령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 녀석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때 눈앞에 보이던 광경들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을 네게 보여줄 수 있는 것 같구나.
나는 손등을 쳐다보았다.
손등에 있는 세 번째 점인 천기가 푸른빛이 수그러들었다.
두 번째 점인 천선을 얻었을 때는 멀리서도 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는 검의 기억을 되짚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녀석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나 집중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방금 전처럼 그 광경이 보이지 않았다.
-무얼 하려했던 것이느냐?
‘네 기억을 확인해보려고 했어.’
-어떤 기억을 말이느냐?
‘나를 낳았을 때 가주의 얼굴…….’
궁금했다.
어머니에게 반해서 자식마저 회임했는데 후처로 받아들였다.
그런 자가 과연 내가 태어났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때를 말하는 구나.
청령검이 중얼거리던 그 순간 시야가 검게 변하며 방금 전처럼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아기를 안고서 가주 소익헌의 모습이었다.
‘…….’
그의 얼굴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만큼 복잡해보였다.
그래. 자신의 친자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기뻐하면서 쳐다볼 리가 있겠는가.
침상에는 창백한 얼굴의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소익헌이 복잡했던 표정을 지우고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의 눈빛은 애틋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가주를 보는 눈빛이 은인은 대하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 네가 보고 있는 그대로다.
‘뭐?’
-익헌이의 지극정성으로 네 어미는 마음을 열었다.
어머니가 마음을 열었다고?
의아해하는 내게 청령검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네 누이 동생인 영영이가 태어나지 않았겠느냐.
아…….
그랬다.
영영이가 있었다.
어머니가 그저 나를 보호하기 위해 후처의 자리에만 있었다면 그 아이가 태어났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에서 유일하게 피가 이어지지 않은 것은 오직 나뿐이로구나.
-…….그래.
청령검이 씁쓸하게 답변했다.
다시 광경이 바뀌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검이 원해야만 그 기억을 볼 수 있는 듯 했다.
-막 네가 태어났을 때는 익헌이도 네게 잘해주기 위해서 노력했단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더구나.
…….그렇겠지.
제 자식도 아닌데 잘해주기가 쉽겠는가.
-게다가 양 부인의 성화를 감당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지.
‘양 부인!’
-네게 조금이라도 잘해주려는 모습을 보이면 그녀의 성화가 보통이 아니었지. 덕분에 익헌이는 자식들 누구에게도 상냥하게 대하지 않게 되었단다.
그러고 보면 가주 소익헌은 모든 자식들에게 엄하고 대했던 것 같긴 하다.
다만 엄한 것을 넘어서 내게는 냉혹함마저도 섞여 있었다.
그 차가움 속에는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감정이 베여 있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단전을 잃었을 때도 어영부영 넘어갔던 이유가 새삼 이해가 간다.
어머니의 눈치를 본다고 영약까지는 줬지만 친 자식도 아닌 녀석이 양 부인의 간계로 단전을 잃은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겠지.
-탁!
나는 천천히 걸어가 가주 소익헌의 앞에 섰다.
기절해 있는 그를 보며 분노와 더불어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소익헌!’
감정이 치밀어 오르자 청령검이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도 익헌이는 너와 네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다.
‘책임? 나를 가문에서 쫓아내고 영영이를 팔아먹듯이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 게 책임이라는 거야?’
양 부인의 눈치가 보여서 그랬다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어머니를 들이지 말았어야 할 일이 아닌가.
확실하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놓고서 책임지고 있다고 하면 그게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아?
-……너를 내보내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네가 양 부인이나 다른 자식들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 것이란다.
‘양 부인의 손에 죽어?’
-너는 네 어미의 사후 술독에 빠져서 폐인처럼 지냈다. 네 소문은 안 좋을 대로 안 좋게 퍼져나갔지. 너를 조용히 처리하더라도 누구 하나 탓할 상황이 아니었단다. 그렇기에 익헌이는 너를 쫓아낸 것이다.
‘……..’
-네 누이 동생도 마찬가지란다. 왜 어렸을 적부터 형산파에 보냈을 것 같느냐. 네 누이 동생이 재능이 특출나서? 아니란다. 그건 양 부인이 해코지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영영이가 형산파에서 돌아오게 된다면 너와 같은 일을 겪을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익헌이는 서둘러 약혼자를 찾으려고 한 것이란다.
‘약혼자가 고작 그딴 놈이라고?’
조생남이 떠올랐다.
그 자는 양 부인과 관련 있는 자였다.
-그건 양 부인이 부른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지만 익헌이도 조생남이란 젊은이에게 영영이를 맡길 생각은 없단다.
청령검이 급히 이를 해명했다.
청령검은 내게 어떻게든 그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이 모든 게 우릴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런 일에 어찌 이성이 감성을 이기겠는가.
나는 평생이 가도 소익헌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후우. 그래. 네 말처럼 익헌이는 성정이 살갑지 않고 네 출생의 비밀 때문에 부모로서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책임을 등지려고 하진 않았단다.
그때 청령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야가 스멀거리며 한 광경이 보였다.
늦은 밤.
그곳은 어머니의 별채 뒤뜰이었다.
당황해하는 아송의 모습이 보였다.
[쉿. 조용히 하거라.] [운휘를 따라간다고 들었다.] [그, 그렇습니다.]아송이 어쩔 줄 몰라하며 조용히 답했다.
[이걸 가져가라.]손을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그 손에는 은으로 만든 패 같은 것이 있었다.
패의 한가운데 해현(諧炫)이라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해현전장의 패로 보였다.
저 패를 가져가면 해현전장에 맡겨놓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말과 함께 소익헌은 자리를 떴다.
이 광경을 보고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송은 그가 말한 것처럼 나를 감시하기 위하거나 소익헌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뒤에서 몰래 노잣돈을 챙겨줬을 줄은 전혀 몰랐다.
-스르륵!
곧바로 시야가 흩어지며 장소가 바뀌었다.
방금 전이 늦은 밤이었다면 지금은 밝은 대낮이었고 사방이 수풀로 뒤덮여 있었다.
눈앞에 온몸에 멍과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아송이 보였다.
그런 그에게 소익헌이 말했다.
[……정말 운휘 녀석이 혈교라고 했느냐?] [네네. 쇤네가 틀림없이 들었습니다요.] [혹시 내가 준 전장의 패는 혹시 가지고 있느냐?] [아!]소익헌의 물음에 아송이 품을 뒤지더니 이내 은패를 꺼내들었다.
이를 본 소익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시구 소추추(釣詩句 掃愁愁).
술은 시를 낚는 바늘이고 근심을 쓸어내는 빗자루란 말이다.
소익헌이 삼대 정보 단체 중 하오문(下午門)에 정보를 의뢰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오문은 흑도계열일 터인데 그들에게 의뢰를 하다니.
이걸 보면 은밀히 추적하려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찾았다는 거야?’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스르르륵!
시야로 보이던 광경이 흩어지며 또다시 장소가 바뀌었다.
그곳은 바로 소익헌이 말했던 흑현정이라는 기루였다.
소익헌의 앞에는 흑건에 후줄근한 옷을 입은 노인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광경에서는 아송에게 명을 했는데, 도리어 본인이 직접 이곳에 와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익헌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노인이 단호하게 답했다.
[값은 얼마든지 치른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혈교와 연관되었다면 우리는 의뢰를 받지 않소.] [정녕 이럴 것이오?]소익헌의 손이 청령검의 검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흑건의 노인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비웃음을 흘렸다.
협박 아닌 협박에 소익헌이 검집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흑건의 노인이 돌아가려 하는 소익헌에게 넌지시 말했다.
하…….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돌아온 내가 혈교의 주구가 되었을 거라 여긴 것이다.
눈앞에서 보이던 광경이 뭉게구름처럼 흩어지며 다시 연공실의 현실로 돌아왔다.
청령검이 내게 말했다.
-네가 익헌이를 미워하는 것은 나로서도 이해한단다. 하나 너 역시도 익헌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줬으면 좋겠구나.
녀석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해졌다.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출생에 관한 진실이 가장 혼란스러웠다.
‘결국 생판 남이었네.’
이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청령검은 그가 나름의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를 위한 책임감? 전혀 아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책임과 의무였겠지.’
그가 정말 책임을 가졌다면 오히려 나와 누이 동생을 곁에서 지켜보며, 양 부인에게 해코지를 당하지 않도록 강하게 버팀목이 되줬어야 맞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소익헌이라는 남자는 그저 스스로의 마음이 편하고자 그랬던 것뿐이다.
자식이 아닌 자를 위해서 그 정도까지 했으니, 이해하라는 것은 철저히 소익헌의 입장일뿐이다.
그럼 처음부터 어머니께 자식으로 대해주겠다는 약조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책임감? 웃기는군.’
청령검이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은 그저 보이는 것에 치우쳐질 뿐이다.
씁쓸해하고 있는 내게 청령검이 말했다.
-아까 들어보니 너는 본가의 후기지수 대표 자리가 필요한 것 같더구나.
‘…….그래.’
어떤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몰랐던 진실을 알아버려서 기분이 심란해져서 그렇지.
-그건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네가 도와?’
무슨 수로 돕는다는 거지?
-익헌이가 가장 원하는 것을 네가 준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소익헌이 가장 원하는 것?’
-지금 익헌이는 소동패검의 전반부 밖에 익히지 못했단다.
그 말에 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가주의 검법은 구두로 전해지는데, 익겸이 정사 대전에서 전사하면서 그 후반부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단다. 그걸 네가 알려준다면 어떨까?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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