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80
32화 천기(天璣) (4) >
-촥! 촤촥!
경쾌하게 허공을 가르는 검날.
검이 그리고 있는 수많은 궤적들은 소동패검의 초식들이었다.
나는 지금 청령검의 기억을 보고 있다.
그런데 녀석이 내게 보여줬던 기억들과는 사뭇 다르다.
검이 움직이는 궤적을 볼 때마다 마치 내가 검이 된 듯 그 경로가 머릿속에 박히고 있었다.
손목과 팔이 움찔하며 금방이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이것은 정사 대전에서 전사한 익양소가의 태상가주 소익겸이 펼치는 소동패검의 연무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다기보다는 그 기억을 되새기는 것만 같다.
전반부 5초식에 이어서 곧바로 보여지는 후반부 5초식은 말 그대로 중검의 정수를 담은 향연이었다.
-슉! 푸욱!
검을 강하게 내려치는 순간 묵직한 기운에 닿지도 않은 연무장의 바닥이 눌린 것처럼 검의 형태로 일부 파고들었다.
대단했다.
가주 소익헌은 후반부를 보완하기 위해 중검에 쾌속함을 가미했지만, 후반부의 초식까지 익히게 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보이던 광경이 흐릿해지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알 것 같니? 아이야.
청령검이 내게 물었다.
알 것 같은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녀석과 기억을 공유하기라도 한 것처럼 뇌리에 박혔다.
초식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때 소담검이 내게 말했다.
-그 짧은 사이에 초식들을 전부 본 거야?
‘짧다고?’
그럴 리가.
중검은 쾌검과 다르기에 연무 과정도 빠르지가 않았다.
10초식을 전부 보는데 적어도 반의 반각은 소요된 것 같은데 그게 그리 빠른 건가?
-무슨 소리야. 눈 한번 깜빡이고는 그걸로 뭘 봐?
‘……..눈 한번 깜빡였다고?’
-허어.
소담검의 말에 청령검조차도 의아한 기색을 표했다.
체감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운휘.
남천철검까지도 소담검의 말에 동의했다.
‘흠. 이상한데.’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면 확인해볼 방법이 있지 않은가.
나는 품속에서 은전 하나를 꺼내들었다.
‘청령검.’
-말하거라.
‘내가 은전을 튕기면 다시 한 번 연무 과정을 보여줄 수 있겠어?’
-어려울 게 있겠느냐. 그저 떠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청령검이 흔쾌히 답했다.
나는 시험 삼아 은전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허공에 떠올렸다.
그 순간 시야가 스멀거리며 아까 전에 보았던 소동패검의 연무 광경이 보였다.
마치 반복을 하는 듯 한 느낌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연무가 끝나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
그때 눈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연무를 다시 보기 전에 손가락으로 튕겼던 은전이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깜빡할 정도가 아니라 찰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탁!
떨어지는 은전을 낚아채서 잡아냈다.
‘이럴 수가.’
놀라웠다.
기억을 되짚는 체감 시간이 실제 시간과 완전히 달랐다.
기묘한 현상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내게 남천철검이 흥미로운 말을 꺼냈다.
-운휘. 이건 정말 혁신적인 능력인 것 같다.
‘혁신?’
-그래. 전주인께서는 무(武)가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때는 반복적인 훈련 이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심상 훈련이라고 했다.
심상(心想) 훈련.
처음 남천철검이 내게 성명검법을 전수할 때 해줬던 말이었다.
반복된 검식과 검초의 훈련으로 육신의 기초가 다져진다면 차후에는 머릿속으로 검의 궤적을 연상하는 상승 검로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생각해봐라. 심상 훈련이라고 해도 연상을 하게 되면 각인이 되게 된다. 그런데 계속 반복해서 하게 된다면 어떨까? 자연스럽게 반복 훈련을 한 것처럼 초식을 습득하게 될 거다.
아……
심(心)이 신(身)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 말인가.
청령검 덕분에 두 번이나 소동패검의 초식들을 펼치는 기억을 반복했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 좀 더 명확하게 그것이 남아있었다.
-적어도 연무를 수십, 수백 회만 반복해도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거다.
-그렇네!
소담검도 맞장구를 치듯이 동의했다.
수십, 수백.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녀석의 말대로 이게 성공한다면 나는 찰나의 순간에 수십, 수백 번을 연마한 것과 같은 형태로 검의 초식을 숙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시험해봐도 나쁠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반복해도 어차피 찰나라면 말이다.
-나야 괜찮다만 아이야 너는 괜찮겠느냐?
‘괜찮아.’
-알았다. 도중에 멈추라고 하면 나도 회상하는 것을 멈추마.
청령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익겸의 연무 기억이 시작되었다.
1번, 2번, 3번……
반복될수록 마치 나 스스로가 검이 되어 연무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횟수가 반복될수록 문제가 생겼다.
조금씩 어지러우면서 두통이 느껴졌다.
심지어 선천진기마저 조금씩 소모되어 갔다.
‘조금만 더…..조금만…..’
그렇게 스무 번을 넘길 때였다.
“으웩!”
어지러움이 너무 강해지면서 토악질이 나왔다.
-괜찮느냐? 아이야.
기억의 환상이 사라지며 현실로 돌아왔다.
-야. 괜찮아?
-운휘!
소담검과 남천철검 역시도 나를 걱정스럽게 불렀다.
눈앞에 핑 도는 것만 같았다.
여덟, 아홉 번까지도 괜찮았는데, 열 번을 넘어가니 굉장한 부담이 작용했다.
-너 엄청 땀이 많이 나고 있어.
소담검의 말에 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만져보았다.
마치 하루 종일 격하게 훈련을 한 것처럼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짜네?’
손끝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이상해서 손등과 손목을 쳐다보니 오랫동안 훈련한 것처럼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현실에서는 찰나에 불과했다고 하나 내 몸은 그것을 실제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친 것도 모자라 육신이 지쳤던 거다.
-믿기지 않는다. 기억을 끌어낸 심상 훈련이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남천철검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한 심상를 넘어서 실제와 다름없는 기억을 반복하니 이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어쩌면 천기(天璣)의 진정한 능력은 이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무리하면 안 될 것 같다. 운휘.
내 생각도 그렇다.
수백 번은 커녕 수십 번도 무리다.
“하아…..하아…..”
너무 지친다.
스무 번을 반복하고 나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로가 보통이 아니었다.
연달아 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이것에 더 익숙 될 때까지는 조금씩 횟수를 조절해야 할지도.
‘운기를 해야 겠어.’
-그래라.
일 각 정도의 시간 동안 선천심법을 운기하고 나니, 연이은 천기로 소모된 선천진기와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더 반복했으면 쓰러졌을 것 같다.
-운휘.
그때 남천철검이 나를 불렀다.
녀석이 왜 불렀는지 곧 알 수 있었다.
-파스스스!
“크윽.”
연공실 벽에 반쯤 박혀 있던 가주 소익헌이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소익헌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패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뛰어넘은 나로 인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충격이 큰가보다.
“너……”
“운기부터 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검초를 피해서 맞췄다곤 하나 진 축아회검을 맞았다.
검초의 기운이 전신과 오장육부로 스며들어서 이를 해소하지 않으면 나아가 기경팔맥에도 손상이 갈지도 모른다.
-스스스스!
소익헌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내가 보는 앞에서 차마 운기조식을 하지 못하고 운공을 통해서 기운을 몰아내고 있었다.
소익헌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내게 물었다.
“왜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더냐?”
정통으로 검초를 맞추지 않은 것이 의아했던 모양이다.
“죽이기라도 바라셨습니까?”
“…….네 목적을 위해서 살린 것이라면 소용없다고 말하마. 네가 혈교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만 저를 자극하셨으면 좋겠군요.”
“뭐?”
“피차 가식적으로 구는 것은 버리도록 하죠.”
“너…..”
“친부도 아닌 당신에게 손속의 사정을 둔 것이 그 동안 키워줬던 혈육의 정이라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
그런 나의 말에 소익헌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내가 진실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네…..네가 그걸 어떻게?”
그의 반응을 보면 어머니가 그에게 진실을 밝히지 말아달라거나 그런 부탁을 했을 것 같다. 혼란스러워하던 그가 다시 입술을 뗐다.
“…….알고 있었던 것이냐?”
“두 형님, 아니 당신의 자식들을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확연하게 다른데 제가 모르리라 생각했습니까?”
소익헌이 굳은 얼굴로 침을 삼켰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네 어미에게 들은…”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청령검을 날렸다.
-슉!
선천진기를 담겨진 청령검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소익헌을 옷을 살짝 스치고 지나 연공실의 벽면에 깊게 박혔다.
“그 입으로 어머니를 담지 마시죠. 가증스럽습니다.”
그런 나의 말에 소익헌은 입을 열지 못했다.
애초에 그와 좋게 풀고 싶은 생각은 더 이상 없었다.
오직 자신의 마음이 편하고자 모든 행동에 책임감이라는 당위성을 부여한 자를 이제 와서 부친이라 생각하고픈 마음은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입을 닫고 있던 소익헌이 겨우 입술을 뗐다.
“나는 네게…..”
“할 만큼 했다고 하고 싶습니까?”
“…….”
“양 부인이나 그 자식들로부터 저나 영영이를 지키려고 했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익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스스로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었으니 심란하겠지.
하지만 당신도 진실에 부딪칠 필요가 있다.
“어머니를 위해서 친자식처럼 대하려고 노력했다.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 그건 결국 당신의 이기심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네가 어찌!”
“당신이 정말로 나와 영영이를 보호할 진심이 있었다면 양 부인과 강하게 맞서서라도 지켜냈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다른 자식들과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서 방관했다는 개소리를 지껄이실 겁니까?”
“끄윽.”
소익헌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운공에 집중해야 하는데 정신이 흐트러지면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상관없었다.
“뒤에서 당신이 뭘 챙겼는지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게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단단히 착각하셨다고 말씀드리죠.”
“하아……”
소익헌의 얼굴이 한없이 어두웠다.
그 동안 스스로에게 당위성을 주었던 책임감이 개소리란 것을 알려줘서일 테지.
“나는…..나는 그저 너를 보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보호입니까?”
“…….”
“그저 책임을 회피하시는 거죠. 내 자식도 아닌 녀석한테 할 만큼 했다. 이제부터는 어찌 되더라도 내 탓이 아니다. 이게 당신의 본심이 아닙니까?”
“쿨럭쿨럭.”
피가 섞인 기침을 하면서도 소익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 자위하던 가면을 벗겨놓았으니 심란할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속마음을 포장하고서 저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면 혈교에 납치당할 일도 없었겠죠.”
‘!?’
소익헌의 두 눈이 커졌다.
혈교 얘기가 나오니까 반응을 보이는 것 봐라.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만약 스승님이 저를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생각했던 대로 혈교의 주구가 되었을 겁니다.”
인상을 찡그리는 그에게 나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던졌다.
그것을 받아든 소익헌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건…..”
“만사신의 어르신의 각패입니다.”
“이걸 어찌?”
“제가 단전이 회복된 것이 혈교의 사술이나 사공이라고 생각하고 싶으셨겠죠. 하지만 그게 진실입니다.”
참 이런 식으로 만사신의의 각패를 활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뭐 이것에는 거짓이 없었다.
실제로 만사신의가 나를 치료해주려고 했으니 말이다.
이제부터 나의 주특기를 발휘할 시간이다.
“스승님께서는 만사신의 어르신과 오랜 교분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다시 단전을 회복할 수 있었죠.”
“하아…..”
소익헌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중원 최고의 신의라 불리는 자가 나를 치료해줬다고 해서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거든.
“저한테 후기지수 자격이 없다고 하셨죠?”
-스릉!
그 말과 함께 내가 남천철검을 뽑자 소익헌이 의아해했다.
그런 그의 의아한 얼굴을 개의치 않고서 나는 기수식을 취했다.
“너……..설마?”
소동패검의 기수식에 소익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의 궤적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소익겸이 연무를 펼치던 그 검로를 그림자처럼 따라갔다.
-촥! 촤촥!
무거운 중검의 묘리가 남천철검을 통해서 발휘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익헌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중얼거렸다.
“네가 어찌….”
단순히 초식을 따라하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나는 오랫동안 초식을 연마했던 태상가주 소익겸의 소동패검과 거의 흡사한 수준으로 연무를 하고 있었다.
1초식에서 5초식이 이어지면서 소익헌이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끝이라고 여긴 순간,
-촥! 촤촥!
이어지는 후반부 6초식에 소익헌의 입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닛!”
소익겸이 전사하면서 실전된 후반부의 초식들이 나의 손에서 펼쳐지자, 소익헌의 커진 눈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수 받지는 못했더라도 그는 이 후반부 초식을 알아볼 수밖에 없을 거다.
적어도 소익겸의 연무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말이다.
-팍!
마지막 10초식의 소동패검의 비기 중압검격을 펼치자 연공실의 바닥이 움푹 파고들었다.
선천진기로 펼쳐서 그런지 그 위력을 어느정도 살릴 수 있었다.
초식을 마친 나는 소익헌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가관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말했다.
“이래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나의 물음에 소익헌이 호흡마저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물었다.
“네, 네가 어찌 그걸?”
나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둔 종이를 꺼내들었다.
이것은 청령검의 연무 기억을 보기 전에 소동패검의 나머지 후반부 초식의 구결을 연공실에 있던 지필묵(紙筆墨)으로 적어놓은 것이었다.
“만사신의 어르신께서는 누군가를 치료해주실 때 그 대가를 받습니다. 못해도 각패라든지 혹은 소중한 비급도 될 수 있죠.”
“그럼 아버님께서?”
뒷말을 잇지 않았는데 소익헌이 혼자 지레짐작했다.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상황을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소익헌의 두 눈이 내가 들고 있는 종이에서 떠나질 않았다.
실전된 비기를 보았으니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이제부터 당신이 애원할 차례다.
나는 초식의 구결이 적혀 있는 종이를 소익헌에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누가 부탁해야 할 입장일까요?”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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