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92
36화 뜻밖의 (3) >
“그래서 그냥 갔다는 것이더냐?”
“네.”
해악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행히 아직 그가 숙소에 머물고 있기에 백혜향이 이곳에 있다는 정보를 알릴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그냥 가지는 않았다.
소름끼치는 전음을 보내고서 사라졌다.
‘!?’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워.
아무튼 간에 차마 이 말만은 해악천에게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녀가 나를 섭외하려한다는 정도만 알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섭외가 아니었다.
“역시 노리고 있군.”
백혜향 역시도 혈마검을 노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전하구나.”
해악천이 혀를 찼다.
아마도 그녀의 대담한 잠입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다.
이것은 최악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네놈 생각은 어떠하느냐?”
“…….만약 백혜향 아가씨가 논무에 출전한다면 더 우승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백혜향과 잠깐이나마 겨루고 나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나이 또래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다.
해악천이 언젠가 내게 얘기했었다.
백혜향의 무(武)에 관한 재능은 가히 하늘이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범인들의 규격을 넘어섰다고 했다.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해악천이 입을 열었다.
“논무에 아가씨는 나오지 않을 게다.”
“네?”
“정파가 주관하는 논무에 나와 애송이들인 후기지수들과 겨루는 것은 아가씨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게다.”
듣고 보니 일리는 있었다.
해악천의 말대로 명색이 혈교주의 자리를 노리는 여인이다.
그런 여인이 정파인들의 평가를 받는 자리라 할 수 있는 후기지수 논무 대회를 나간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았다.
설사 그녀의 연령대가 후기지수들과 차이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 뒤가 문제겠군. 클클.”
해악천이 혀를 내둘렀다.
그녀 역시도 혈마의 태생이다보니 그리 미워하진 않는 것 같았다.
다만 이렇게 되면 혈마검을 탈취하는데 더 어려움이 생겼다.
운이 좋게 무림 연맹의 비고에서 혈마검을 빼내도 이것을 백혜향에게 빼앗기지 않고서 무사히 운송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셈이었다.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후도 그랬지만 전도 문제다.
이번 일처럼 그녀가 작정하고 나를 노린다면 혈마검 탈취는커녕 모든 계획이 무산될 수도 있었다.
그런 내 말에 고민을 하던 해악천이 결론을 내렸다.
“계획을 바꾼다.”
* * *
원래 해악천은 무림 연맹의 외곽을 벗어나 대기하고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백혜향이라는 변수에 계획을 바꿨다.
무림 연맹의 성 내부로 들어갈 순 없지만, 그 바깥인 이곳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언제 상황이 급변할지 모르기에 내린 조치였다.
해악천은 여기서 두 가지 당부를 했다.
해악천은 아직 내 무위로는 그녀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중단전을 개방했을 때조차 그녀가 내뿜는 살의에 위압감을 느꼈으니까 말이다.
다소 불편하지만 해악천의 말이 맞다.
혼자 다니는 것보다 셋이 있다면 적습에 대처하기 쉬워진다.
사실 나는 괜찮다.
조성원이나 사마영이 심심할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대장간 안에 들어간 나를 계속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대장간의 볼 일이 끝나면 매번 사마영이나 조성원이 원하는 식도락 탐방을 하고 있다.
마을이 워낙 크다보니 생각보다 유명한 숙수들의 식당이 많았다.
어제 먹은 호북식 오리 구이도 별미였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우려했던 것과 다르게 백혜향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풀 수 없었다.
나흘 째 되는 날 나는 향로에 꽂힌 검들 중에 75여 자루를 철가루로 만들었다.
기억을 보고나서 달래주면 어김없이 검들은 으스러졌다.
-파스스스!
75번이 넘는 천기.
이제는 무한제일검 백향묵의 검초 묵선대진검이 완전히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실제로 펼치는 것 또한 가능해졌다.
아쉬운 점은 검초의 내공 운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실질적인 위력은 절반가량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좀 더 높은 상승의 경지에 오른다면 운용법마저도 흉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정도로 할까?’
천기는 무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물론 연달아서 하지 않고 운기를 해가면서 한다면 좀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행하면 행할수록 심적 소모도 컸다.
향로의 남은 검들을 쳐다보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성명신공 6성도 가능하지 않을까.’
75번이나 팔대고수의 연무를 보았다.
그걸 보면서 나흘 동안 몇 번이나 심상에 빠졌는지 모른다.
분명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준비는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중단전의 선천진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천천히 성명신공을 끌어올렸다.
1성, 2성, 3성, 4성, 5성……
“후우.”
호흡을 내뱉으며 기운을 끌어올리자,
-파팍! 쩌저저저적!
그 순간 발밑의 목판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기운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것은 예기라 불리는 것이었다.
남천철검은 성명신공이 6성의 경지에 오르면 선천진기의 기운을 날카로운 검처럼 벼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검결지를 쥐고서 나무 기둥을 그어보았다.
-촥!
그러자 검으로 벤 것 마냥 기둥에 날카로운 상흔이 생겨났다.
“핫.”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드디어 6성의 갈피를 잡았다.
그 동안 백향묵의 검 연무를 계속해서 보았던 것이 드디어 효과가 나타났다.
제대로 된 초절정의 영역을 밟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6성 이상의 경지에 올라야만 펼칠 수 있는 성명검법의 마지막 7초식 십이천경검(十二天景劍).
상승의 검초라서 이전까지는 펼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초식이다.
시험해보고 싶으나 여기서 펼치면 대장간이 엉망이 되겠지.
‘아아아.’
감회가 남달랐다.
드디어 남천검객이 올랐다던 6성의 경지를 밟았다.
초입에 불과하지만 부단히 단련하여 6성을 완성하게 된다면 생전의 남천검객과 같은 영역에 이르게 된다.
-땅땅땅!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작업장에서 들려왔다.
열기가 넘쳐나는 작업장으로 건너가니, 장인이 쉴 새 없이 남천철검의 검면을 뜨거운 용광로에 담갔다가 빼면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녹은 이미 어제 제거되었지만 그 동안 관리가 안 되었던 검면을 바로 잡는 과정이라고 했다.
-하아……
남천철검의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다.
-…..자식 너무 좋아하는데.
그러게 말이다.
오랜만에 이 소리를 들으니 닭살이 돋는다.
그래도 이 과정을 겪고 나면 남천철검은 다시 태어나게 될 거다.
붉게 달아오른 검신에서 은은한 빛이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보검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내일이면 끝나겠지?’
하루가 남았다.
내일 검을 받고 나면 이제 무림 연맹의 성으로 들어갈 거다.
그때부터 진짜 임무의 시작이다.
오늘 할당량도 채웠고 성과도 있었으니 이제 나가서 사마영과 조성원을 데리고 예약해둔 등정 객잔으로 가야겠다.
그곳의 동파육이 그리 맛있다는데 이틀 전에는 예약이 차있어서 앉지도 못했다.
* * *
마을의 한복판에 있는 등정 객잔.
바글바글 거리는 손님들만 봐도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동파육 특유의 팔각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절로 침이 고인다.
“드디어 먹네요.”
“등정 동파육!”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고 하던데, 나 먹다가 쓰러질 수 있어요.”
“그럼 부단주님이 업고 숙소에 가실 겁니다.”
“헤에. 그럼 안심하고 쓰러져야 겠네요.”
식탐이 있었는지 음식 관련해서는 죽이 잘 맞는 사마영과 조성원이다.
두 사람은 신이 나서 나보다 먼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 점소이가 달려와 우리를 맞이했다.
“이틀 전에 오셨던 분들이시죠?”
눈썰미가 좋은 녀석이 우리를 알아보았다.
녀석이 씨익하고 웃더니 따라오라고 하며 안내를 했다.
좋은 자리를 부탁한다고 했더니, 2층에 마을 풍경이 보이는 창가 자리를 비워놓았다.
나는 녀석에게 수고했다고 동전을 주었다.
입이 찢어져서 귀에 걸렸다.
“주문은 당연히 동파육이시죠?”
“두 말 하면 잔소리죠.”
사마영이 신이 나서 답했다.
점소이가 내려가고 나서 우리는 다른 손님들이 동파육을 먹는 것을 구경했다.
뭔가 내가 먹는 것도 아닌데 대리만족하는 느낌이 든다.
동파육은 돼지 살코기와 쫄깃한 비계살이 있는 부위를 삶고 졸인 요리로 입에 감기는 식감이 일품이다.
먹는 사람마다 저리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정말 맛있겠지?
-운휘야.
그러던 차에 소담검이 나를 불렀다.
녀석이 왜 불렀는지 알 것 같다.
객잔 안으로 무림인들이 대여섯 명 들어왔다.
지금 들어온 이들은 이곳 객잔에 있는 무림인들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었다.
기감만으로 이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둘 때문에 그렇지?’
-응.
그들 중 두 사람이 지닌 검이 명검인 듯 했다.
들리는 이명부터 강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천기가 열리고 나서부터 천선 역시도 강해지면서 나 역시도 검의 소리로 얼마나 명검인지 구분이 가능해졌다.
“음.”
사람들이 동파육을 먹던 것을 구경하던 사마영의 시선도 잠깐 밑으로 향했다.
당연히 그녀도 기감으로 알아차렸을 거다.
얼마 있지 않아 계단으로 여섯 명의 남녀가 2층에 올라왔다.
‘아!’
나는 한 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세 명의 남녀는 호남성 무림 지회에 속해있는 후기지수들이었고, 다른 세 명은 청성파와 사천당문, 전진교의 후기지수들이었다.
전자의 셋은 당연히 같은 호남성 무림 지회 출신들이라 안면이 있었고, 다른 세 명은 회귀전 무림 연맹에서 알게 된 이들이다.
-쟤들인가봐.
나의 눈은 자연스럽게 청성파와 전진교의 젊은 도사들에게 향했다.
긴 눈썹이 늘어진 청성파의 도사는 청명이라는 도호를 가졌고, 훗날 일양검객이라 불리게 된다.
전진교의 도사 현진은 현무당의 부당주가 될 뛰어난 검수였다.
이 두 사람이 들고 온 검은 아무래도 청성과 전진에서 지원해준 명검인 듯 했다.
‘지극히 정파다운 녀석들이지.’
내 기억 속에 이들은 꽤 괜찮은 정파인들이었다.
도가 문파 출신들답게 사리사욕도 없고 협의심이 뛰어났다.
그런데 저런 고고한 학과 같은 녀석들이 하필이면 저런 녀석들과 붙어서 오다니.
‘귀찮아지겠군.’
“어!”
아니나 다를까였다.
하필 녀석들이 예약해둔 자리가 우리 바로 옆인 게 화근이었다.
저 세 명은 소장윤과 붙어 다니는 무리들인 도일찬과 조강, 강혜소와 형제, 자매들이었다.
당연히 내 별명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다.
도일찬의 형인 원릉 도가의 도경욱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우리 율랑현의 소 아우가 아닌가.”
인사라기보다는 비꼬는 말투에 가깝다.
녀석의 그 말에 다른 한 명도 다가왔다.
수녕 조가의 조익이었다.
-얘네 아직 소문을 못 들었나 본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긴 소장윤 무리들과 다르게 후기지수 대표인 녀석들이었다.
내가 익양 소가로 돌아왔을 때 이미 무한시로 향하고 있었을 테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조익이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오랜만이네. 소 아우.”
그래도 율랑현 망아지 소리는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얼굴만 마주쳐도 율랑현 망아지라고 하더니 말이다.
아마도 같이 온 일행들을 의식해서일 거다.
“아시는 분인가 봅니다.”
일행 중에 두 명이나 아는 척을 하니 관심이 갔는지 청성파의 청명이 물었다.
그 말에 조익이 실실 웃더니 속삭이는 척 말했다.
“그 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익양 소가에 쫓겨난 그 친구 말입니다.”
말이 속삭이는 거지 대부분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녀석의 그 말에 사마영의 눈빛이 확 변했다.
그녀가 나서게 되면 일이 더 커질 수 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성파의 청명에게 포권을 취했다.
“청성의 청명 도사님이 아니십니까?”
그런 내 말에 청명이 의아해하며 포권을 취했다.
“청명입니다. 공자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청성파가 낳은 신성인 청명 도사님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했다.
띄워주는 내 말에 청명 도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회귀 전에 알고 있던 대로 천성이 선한 사람다웠다.
-척!
나는 다른 두 명에게도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전진교의 현진 도사님과 사천 당문의 당혜화 소저께도 인사 올립니다. 익양 소가의 삼남인 소운휘라고 합니다. 이렇게 명성이 높은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당한 나의 인사에 두 남녀도 포권을 취했다.
“익양 소가의 공자님이셨군요. 당문의 당혜화라고 합니다.”
“전진교의 현진입니다.”
인사의 중요성이라는 것이 이렇다.
먼저 상대를 알아보고서 인사를 해주는 것만으로 적당히 체면을 높여줄 수 있다.
“어….떻게?”
왜? 내가 이들을 모를 거라 생각했어?
너희보다 훨씬 더 잘 알걸.
나를 깎아내리려고 했던 도일찬과 조익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선수 칠 거라고 생각지 못했나 보다.
“율랑…”
이를 참을 수 없었는지 조익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때 내가 녀석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조 형.”
나는 친한 척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녀석이 어처구니가 없어하며 내 팔을 뿌리치려고 했다.
“언제부터 친…”
그러나 팔을 뿌리치기 위해 미처 손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녀석의 목을 감싸고 있는 내 팔목에 힘이 들어갔다.
-꽈악!
‘!?’
목 뒤로 공력을 가했기 때문에 녀석의 몸이 일순간 경직되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목이 그대로 꺾일 거다.
녀석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녀석에게 전음을 보냈다.
-꽈악!
힘이 더욱 들어가자, 녀석이 화들짝 놀라서 억지로 입 꼬리를 벌렸다.
이에 나는 활짝 웃으면서 후기지수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타지에서 동향 사람을 보면 참 반가운 일입니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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