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140)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40화(140/599)
내가 이상한 건가?
폭탄 발언을 던진 당사자가 너무 평온하기 그지없어서 인지부조화가 왔다. 그런 내 반응이 웃긴 건지 짧은 웃음을 터트리는 레스롬 공작을 보고 있자 하니 나도 모르게 내 앞에 놓여진 찻잔에 손이 갔다.
그래, 차는 자부심을 가질 만큼 잘 우려내긴 하시네.
“오. 이번엔 마시는 건가?”
“목이 타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었더니 알아서 손이 가는군요.”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다네.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한 배에 탔다고 우기는 취미는 없으니까.”
“다른 이야기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건 솔직히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왕국 정치판의 근간을 뒤흔들고도 남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태연한 게 이상한거지. 아예 대놓고 불신을 가득 담아 레스롬 공작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변함없이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건 나중에 국왕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게나.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말씀하셔서 한 것에 불과하니.”
“각하 정도 되시는 분이 책임전가라니 너무 무책임하시군요.”
“어명이잖나? 신하 된 자, 마땅히 따라야지.”
재밌는 농담을 주고받는 중인 것처럼 혼자 웃어 보인 레스롬 공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자네가 이 사실을 알아봤자 우리에게 해가 될 게 없으니 말한 것에 불과하다네. 동시에 멧돼지 사냥과 관련되어 자네를 도울 이유이기도 하지. 말해 보게나.”
“…각하께서 저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폐하를 돕는다고 속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폐하께서 직접 적으신 친서를 보이라고 하시긴 했네. 보겠는가?”
“…속이실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니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왕의 친서라니. 그딴 건 가까이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미 지금 있는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다. 혹여라도 그가 친서를 꺼내기 전에 서둘러 지크멜에게 받아온 문서를 그에게 내밀며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알고 계실 거 같지만 멧돼지가 몰래 사병을 빼돌리며 규모를 키우는 것 같습니다. 양성소는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듯 하니 제가 나설 영역은 아닌 듯 하나, 그렇게 빼돌린 사병들로 운용중인 용병단은 딱히 그런 거 같지 않아서 손을 댈 생각입니다.”
“음? 조금 생소한 이야기같군. 잠깐 살펴보겠네.”
문서를 받아 읽으면서도 눈 한 번 찡그리지 않는 걸 보면 연세에 비해 시력은 정정하신가보군. 이렇게 된 거 그냥 마음 편히 차나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레스롬 공작이 입을 열었다.
“용병단 쪽은 우리가 놓치고 있었군. 분명 몇 년 전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인한 사병의 질적 저하를 보완하고자 마련했던 훈련소였지만… 이렇게 빼돌리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어. 물갈이를 한번 해야 할지도.”
어째 지금 숙청이라고 쓰고 물갈이라고 읽은 듯한 기분이 들지만 나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이니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이 용병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해서 온 것 같네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원하나?”
“증인으로 올라온 비룡 조종사 기에스와 그의 비룡. 잠깐 대여받고 싶습니다.”
“위치는 이미 특정되었나보군.”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단 그렇습니다.”
잠시 고민하며 문서를 돌려주려던 레스롬 공작이었으나, 어차피 이젠 내가 가지고 있어 봤자 의미는 없기에 그냥 그가 보고할 때 쓰도록 양보하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이제 움직이기 힘들 터이고, 내일은 그가 증인으로 출석해야 하니 모레는 되어야 움직일 수 있겠지. 문서를 준비해서 오가토르프 저택으로 보내주겠네.”
뭐라도 줬으니 비룡 정도는 잠깐 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서 취한 행동이었지만 레스롬 공작의 반응을 보아하니 굳이 그런 거 없이도 흔쾌히 승낙했을 거 같다.
나야 뭐가 됐든 간에 비룡만 빌릴 수 있으면 상관없지. 이야기가 마무리된 줄 알고 일어나려는 나를 손짓으로 제재하며 그가 말했다.
“자네 용무는 정리가 된 거 같으니 이번엔 내 차례일세.”
분명 아무런 사전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에 불과한데 나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건지 1도 짐작이 가질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 없다고 나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난 어중간하게 일어났던 몸을 다시 앉힐 수밖에 없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할 말이라기보다는 이번 일이 정리된 뒤의 일정에 대해 미리 언질을 좀 해 두고 싶어서.”
“일정이요…?”
보샤 백작은 빡세게 얻어맞아 반죽음 혹은 죽음을 맞이하고, 라그니스는 무죄 석방 후 배상금을 뜯어내는 걸로 끝인 게 아닌 건가? 설령 그걸로 끝이 아니라 한들 내가 딱히 알아야 할 건 없을 텐데?
“설마 멧돼지 사냥 후 레비엥 변경백이 무죄 판결과 보상을 받으면서 모든 게 정리될 거라고 여긴 건 아니겠지?”
진짜 이 어르신은 점쟁이인 게 아닐까.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던 터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 있었더니 다시금 레스롬 공작이 웃어 보였다.
“제국과의 친교, 반역자 처단의 숨은 공신, 모험가 활동을 통해 마족들의 음모마저 파훼한 영웅. 자네에게 그렇게나 많은 업적이 쌓였는데 정말 그렇게 끝날 거라고 여긴 건가?”
“…그러고 보니 폐던전 사건은 왕실에서 의뢰한 거였죠.”
“거기에 자네가 포함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말일세. 왕실은 자네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영웅으로 내세우고 싶어 하네.”
“무례하게 거절하고 싶습니다만.”
이상하네. 아무리 명분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베고 다녔을 텐데 아직도 언급이 된다고? 이티스엘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멀어지기 위해 거침없이 행동했죠. 그런데도 제가 허수아비 영웅 명단에 올라갑니까?”
“수도에서 명예를 위해 사람 좀 죽였다고 쉬쉬하게 될 정도로 하찮은 업적은 아니잖나.”
“영웅이라 부르기엔 너무 과한 보복을 행한 것도 사실이죠.”
“그러한 소문을 잠재우고 왜곡하는 것마저도 정치의 일환이지.”
오늘따라 목이 타는군. 나도 모르는 사이 비워진 찻잔을 다시 채워 목을 축이면서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건 ‘정말 에스뮈에에게 부탁해서 제국으로 망명이라도 해야 하나?’ 같은 생각이었다. 정치판에서 체스말로 휘둘리게 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된다. 안 그래도 라그니스를 돕는다고 지금도 이미 충분히 깊게 들어왔다.
그나마 이렇게 행동한 것도 몇 개월 뒤에 방랑 기사 타이틀을 따고 아예 수도를 떠나 전선으로 향하는 것을 염두했기 때문이다. 관행이나 관습같은 거에 함부로 태클 걸기 힘든 세상이다 보니 그렇게 한번 떠나고 나면 내가 자발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어지간한 사유로는 붙잡을 수 없거든.
내 딴에는 나름 완벽한 계획이랍시고 세워 놓은 거였지. 이젠 딱히 완벽해 보이지 않아서 문제지만.
여기서 왕실과 더 엮여 버리면 어디까지 간섭하고 개입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는 만큼 최대한 피하고 봐야 하는 미래다. 당장 모든 걸 잃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라그니스조차 이런 식으로 험하게 다루는 것들인데 뭘 믿을 수 있겠어?
그런 내 불신이 겉으로 드러난 건지 어떤 건지는 몰라도 레스롬 공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제안은 자네를 왕실의 입맛대로 써먹기 위함이 아닐세. 필요하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문서로 남겨줄 수도 있으니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으면 하는군.”
“대가 없는 선의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번 경우가 딱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대가가 없지는 않지. 자네라는 인물을 왕실의 비호 아래 품고 있는 것만으로 부차적인 이익이 생기니까. 오히려 어중간하게 자네를 억압하고자 농간을 부리다가 타국에 빼앗겨 버리면 골치 아픈 상황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얼추 예상하지 않나?”
예상을 못 할 리가 있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항상 그 예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찾아내니까 아예 떨어져 지내고 싶은 거지.
“지금까지 왕실이 자네에게 준 인상이 어떤지는 모르나, 마왕군과 7년의 전쟁을 유지하면서 왕국과 권력을 잃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무능하진 않다네. 합리적인 선택과 계약을 할 줄 알아. 당장 결정된 사안도 아니고 결정하라는 이야기도 아닐세. 그저 한숨 돌릴 틈이 생겼을 때 진지하게 고민해줬으면 한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네.”
탐탁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첫 대면부터 무한한 호의로 대하는 어르신을 앞에 두고 결사반대를 외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르신이 아무리 치밀한 계획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직접 우려낸 고급 차까지 얻어마시고 일방적으로 도와달라고 한 부탁을 들어주기까지 해서 더 힘들다.
“고민은… 해보겠습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네. 일이 정리되는대로 차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될 테니까.”
레스롬 공작은 내 짧은 대답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진짜 차라리 다짜고짜 시비털고 검부터 휘두르는 놈들 수백 명을 상대하는 게 더 마음 편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