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168)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68화(168/599)
그래, 나는 이 광경을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대부분이 공유하는 근원적인 좆같음.
군대. 그리고 전투장비지휘검열. 줄여서 전장비.
지금 내 눈앞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에게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목욕물과 환복할 의상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움직임으로 응대하는 침착 유능한 메이드와 진짜 미친개처럼 뛰어다니는 이들간의 갭은 영화 연출 저리 가라할 수준이다. 주변 인물들을 한 3배속으로 돌려놓은 거 같네.
“아, 예.”
나는 낯선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PTSD의 잔향을 맡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이거 끝나고나면 또 가구 빼고 옮긴다고 난리 치겠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제국 황녀의 임시 구금소 방문 때문에 저 고생을 하는 걸 보고 있으니 내 전역날이 떠오른다.
“진짜 더럽게 행복했었는데.”
전역날 긴급 훈련 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여유로운 나와 달리 전 부대는 출동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 모습은, 내 인생에 둘도 없이 멋진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렇게 호화롭게 해 놓고도 높으신 분들이 오면 더 지랄을 해야하다니. 이런 건 어딜 가나 똑같나 봐.”
물론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상황이지. 난 그냥 깔끔하게 씻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 땀을 흘리는 훈련도 아니었으니 그냥 따뜻한 물에 들어가서 으어어 하며 지지는 게 고작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다 씻고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더니 에스뮈에가 도착했다.
메이드와 함께 1층으로 내려오니 좁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넓은 것도 아닌 로비에 빽빽하게 서서 예를 갖추는 귀족들 사이로 지난번에 봤던 보라색 예복을 입은 에스뮈에가 걸어들어온다.
차이가 있다면 굉장히 털이 수북한 망토를 하나 두르고 있다는 점 정도? 금방이라도 윈터 이즈 커밍을 외칠 것 같은 망토는 굉장히 따뜻해 보였지만 에스뮈에에겐 좀 커보여서 무게가 부담스러울 것만 같았다. 굉장히 덤덤한 표정으로 들어와 로비를 쓱 둘러본 그녀의 시선이 아직 계단을 내려오는 중인 나에게로 옮겨졌다.
“음, 여이니라. 잘 지내는 것 같구나 엘드미아여.”
제국에서 돌아온지 일주일도 안 지난 거 같은데, 그녀가 편지에서 했던 말마따나 정말 한 달 만에 만나는 기분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그만큼 이것저것 열심히 뛰어 다니긴 했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거 같은데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요 에스뮈에. 유쾌한 일로 뵙게 된 게 아니라서 아쉽습니다.”
그런 에스뮈에를 대하는 내 태도에 제국의 내방자들을 제외한 왕국 사람들 전부가 움찔거린다. 하지만 에스뮈에는 1층으로 내려온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요구할 뿐이었다.
“여에게는 충분히 유쾌한 일이니라. 왕실로 향하기 전에 잠깐 시간을 낸 것이니 중요한 이야기만 하자꾸나.”
그 와중에 에스뮈에의 걸음에 방해되지 않게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녀가 걸치고 있던 망토를 건네받는 메이드는 여전히 침착하다. 마치 영화에서 개쩌는 도둑이 착용자들 몰래 귀걸이를 훔치고 목걸이를 훔치는 것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순간 나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말았다.
“음. 유능한 메이드이니라. 솔직히 너무 깔끔해서 여의 눈치를 보고 적당히 가구만 밀어 넣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저 자를 보아하니 그저 기우에 불과했나보구나.”
움찔하고 또 한 번 귀족들이 경기를 일으킨다. 솔직히 귀족놈들 얼굴에 똥칠을 해주고 싶기도 했지만, 죄는 놈들에게 있을지언정 고생하는 건 아랫사람이다 보니 그냥 입 다물고 사실만 입에 담기로 했다.
“요리 실력도 뛰어나더군요. 덕분에 아무런 불편함 없이 지내는 중입니다.”
내 대답에 일부 귀족들이 감격의 눈빛을 보내 왔지만 딱히 관심은 주지 않았다.
저 안쪽 주방의 가구까지 싹 다 갈다시피 했는데 거들떠도 안 보고 2층으로 올라가는 거에 대한 사과라고 받아들여라… 사용인들이 직접 뛰어다니는 것만 안 봤어도 씻고 나왔더니 가구가 바뀌어 있네 뭐네 하며 꼽을 줬을 거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나니 바이저까지 내리고 완전 중무장한 흑기사 둘이 척 하고 계단을 막아선다. 그리고 그제서야 에스뮈에가 작은 목소리로 평소처럼 입을 열었다.
“임시 구금소로 데려온 주제에 보호네 뭐네 떠들길래 작정을 하고 왔거늘, 생각보다 대우가 좋구나.”
“어, 그렇지? 나도 처음엔 좀 당황했어. 라그니스 때랑은 많이 다르더라고.”
“뭔가 달리 푸대접을 받거나 한 것은 없는 게냐?”
“오히려 너무 심각하게 잘 지내는 중이지. 내가 저지른 일에 비해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이유는 알고 있다. 에스뮈에라는 거대한 뒷배 덕이지. 그냥 라그니스를 돕는다는 느낌으로 따라갔던 제국 여행이 이렇게나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여러모로 긍정적인 변화니까 감사히 받아들일 뿐이다.
“마족을 상대로 7년을 견뎌온 왕실답게 현명한 대처를 하고 있을 뿐이니라. 이마저도 그대가 미리 선수를 치고 날뛰는 바람에 매우 조심하고 있는 것일 뿐. 왕실이 계획한 흐름대로 움직였다면 지금 쯤 상당히 호화로운 대접을 받고 있었을 것이니라.”
“끔찍하군.”
진심으로 진저리를 치자 에스뮈에는 그런 내 반응을 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사내다운 포부가 없는 것도 아닌데 참으로 욕심이 없는 자로고.”
“욕심이 왜 없겠어. 이용당하는 게 싫은 것 뿐이지. 그거 때문에 이번에도 얼마나 골머리를 썩었는데.”
“후후. 마음 같아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밤새워 듣고 싶으나,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아쉽기 그지없구나.”
어차피 아무도 없는 2층이었지만, 그래도 방까지 들어온 뒤 무언가 마법을 사용해 주변을 확인한 뒤에야 에스뮈에는 본론에 들어갔다. 잠깐, 저거 도청이나 감시 마법을 확인한 거 같은데?
“방금 그거 도청이 있나 확인한 거 아니야?”
“응? 그렇다만?”
“만약 도청이 있었다면 방금 전까지의 대화는…?”
“허어. 그대 앞에 있는 것은 여이니라. 오히려 그 정도는 도청을 해서 역으로 써먹을 기회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 취한 행동인 게 당연하지 않느냐.”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반응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겨우 친근한 관계라는 실마리 정도만 주는 대화였으니 그대를 두고 맺은 조약을 어기는 것도 아니니라. 그것보다 왕실에서 여가 취할 행동과 그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게 중요하니 어서 앉거라.”
작은 손으로 팡팡 침대를 두드리며 단호하게 말하는 에스뮈에의 태도에 진지하게 들을 요량으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매우 당연하다는 듯 내 무릎 위에 옆으로 앉은 에스뮈에가 나를 껴안았다.
“…에스뮈에?”
엄청난 짓을 태연하게 저질러놓고 만족스럽다는 듯 으음 소리나 내고 있는 햄찌를 부르니 오히려 당돌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가 직접 나서는데 이 정도 보상은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이대로 들으면 되느니라.”
문제는 그 당돌한 대답이 비겁한 팩트라서 할 말이 없다는 점이로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대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을 것이니라. 그대의 주변 역시 마찬가지지. 하지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니라.”
“얻을 수 있는 거?”
“명예, 보상, 권력. 혹은 공식적인 치하?”
“보상은 좀 아쉬운데 나머진 다 필요 없네.”
그런 거 얻어 봤자 어디에 써먹겠나. 내가 아카데미에 갈 것도 아니고 전장으로 나갈 건데.
심드렁하게 대답하니 에스뮈에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럴 줄 알았느니라. 뭐, 그건 이티스엘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그대가 제국에서 받을 건 아직 많이 있으니 별로 큰 문제도 아니니라.”
“굉장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입에 담는구나.”
“사실을 굳이 입에 담지 못할 이유 따위 없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멀뚱히 놀고 있던 내 팔을 불만스럽게 끌고 가 자신을 안으라는 듯 허리에 두는 에스뮈에였다. 아실리에하고는 딱히 의식하는 거 없이 서스럼없이 포옹하는데 다른 애들은 참 쉽지가 않네 이거.
“여는 강하게 나갈 것이니라. 그대라는 손패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으니, 필요 없으면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갈 것이니라. 그 정도는 해 둬야 그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가라앉을 테니.”
단순히 왕국 내의 싸움이었다면, 분명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내 막 나가는 것 같은 행보를 이용해 먹으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게 사리사욕이든, 공익을 위한 것이든 난 개뿔도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일단 시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마저도 안 되면 과격하지 않은 형태로 날 내쫓는 방법도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지금 정치판 구렁이들에게 있는 선택지라고는 나를 품고 있되 건드리지 않는 것뿐이다. 별로 어려운 이유도 아니다.
의도한 방향은 아니었을지언정 제국은 직접 라그니스를 초대하며 그녀의 상징성을 추켜세워줬다. 그리고 그 수행원의 업적도 가감 없이 치하했다. 그렇게 웃으면서 돌려보낸 이들이 돌아가자마자 역모에 휘둘려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건, 제국의 면전에 침을 뱉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이야기다.
그것만으로도 영 내키지 않은 상황에 왕국에 해가 되는 반역자까지 잡은 놈을 ‘그렇게 대할 거면 내놔. 내가 데려가서 어화둥둥 키울 거야.’ 라고 했다고 ‘아, 이 미친개는 필요 없으니 가져가십쇼.’라고 제국에게 던져 준다?
친제국적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팽한 거고, 왕국은 제국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다는 핑계를 만들어 붙여도 반박조차 못 하는 꼴이 나올 수 있다. 제국이 지난 7년간 왕국에 지원한 물자만 따져 봐도 어마어마한 수준일 텐데 그런 소문이 돌면 제국의 지원이 불투명해지니 당연히 가장 우선적으로 피해야 하는 선택지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어중간하게 건들면 엔벨데처럼 하루아침에 윌슨mk2가 될 수 있다. 나야 당연히 합당한 사유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치들이 보기엔 그냥 미친놈에 불과할 테니 충분한 위협이다.
그럼 별수 있나.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는 이렇게 착한 개를 버릴 생각이 없어요.’라고 말한 뒤 고이 모셔두는 수밖에.
이것으로 나는 상처 입지 않는 세계의 완성이다.
얼마든지 번거로워질 것을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지만 에스뮈에 덕에 훨씬 쉽고 간결하게 정리되고 있는 게 사실이니 고마울 수밖에.
조금 머쓱하긴 했지만 난 고마움을 담아 조금 힘있게 에스뮈에에게 포옹을 해주었다.
“가, 갑자기 왜 그러느냐!”
“고마워서.”
언젠가 이 배려에 제대로 보답할 날이 오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