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188)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88화(188/599)
풀링 사회는 폐쇄성이라는 단어와 인연이 없는 편에 속한다.
오히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타인과의 교류를 사랑하는 게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간과 쓸개를 뽑아주는 이들은 아니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이들을 친구로 두기 위해 평생 열성적으로 노력하는 종족이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치면 종족 단위로 그러한 이타적인 기저심리를 깔고 가게 되는 것인지 소위 학자라는 이들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하니, 내가 이제 와서 ‘왜 그러는가’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특이한 종족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정작 풀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특징은 따로 있다.
강박적일 정도의 가족 사랑. 그에 따른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소속감은 덤으로 딸려온다.
흥미로운 건, 이게 가족 구성원이 잘못했을 경우 그걸 덮어 주는 식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자진해서 연대책임을 무는 형식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걸 도리이자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일까? 풀링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중요시 여긴다.
가족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팔아넘길 바에야 그냥 자살을 하는 것이 떳떳하고 사람답다고 여기는 종족이다. 그런 풀링이 가족을 건다는 건 단순히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것을 넘어 자신의 삶에 두 번 있으면 안 되는 대사건이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아무리 그렇게 중대한 이유가 있다고 한들 보편적 상식으로는 ‘니가 뭔데 일가친척을 다 판돈으로 걸어 버리는 거냐?’ 고 매타작이 들어갈 일이지만, 앞서 언급한 기이한 연대책임 의식을 종족 단위로 가지고 있는 풀링들은 많이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대사건을 겪었다고 이해해준다는 소리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가족을 파느니 차라리 죽는다는 심리가 종족 공통의 심리이다 보니 가능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맹목적인 신앙과 다를 바 없어서 쉬이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 사고 관념을 가지고도 이 험난한 세상을 멀쩡히 살아가며 종이 유지되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지만… 자기들이 그러고 살겠다는데 별수 있나.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센이라 불리는 풀링이 내놓은 단검은 결코 입에 발린 공수표 따위가 아니었다. 키쿠이델 가문 전체를 담보로 하는 보증. 이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자신이, 자신이 못하면 가족 구성원이 이어가며 가문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증명서.
아실리에가 있기에 진위여부는 당장 이 자리에서 확인 가능할 것이다. 가문마다 차이는 좀 있을지언정 반드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장식 요소가 있기 때문에 구분은 어렵지 않다고 했었다.
센이라는 풀링이 대륙 역사를 통틀어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가족애가 부족한 돌연변이일 가능성은 그냥 배제하기로 했다. 그런 천문학적인 확률의 변수 때문에 거르기엔 저 담보가 너무 막강했으니까.
거기에 마법 각인을 포함해서 협상을 시도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맺기 위해서는 도서관 정도 되는 곳에 들려 제 3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라드넬반데스라는 연줄이 있다. 최근 제대로 얼굴조차 못 보긴 했지만 라그니스를 통해 부탁하면 흔쾌히 도와줄 것이다. 어쩌면 위드라 씨가 도움을 주실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판단을 마친 나는 손을 들어 저 멀리 있는 아실리에를 불렀다. 이번 일은 나 혼자 겪은 게 아니니 결정은 같이 내려야지.
괘씸한 것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걸 태연하게 바라보며 다가온 아실리에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
“마법사는 마법 각인을 제시하고 풀링은 가족을 걸었는데…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마법 각인까지는 그러려니 했던 아실리에였지만 풀링이 가족까지 담보로 걸었다고 하니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풀링이 바짝 긴장한 상태도 들고 있는 단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멋대로 자기들 일에 휘말리게 하려고 했으니 뭔 짓을 해도 용서하기는 힘들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각오했다고 하니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다가오긴 하네. 괜찮지 않을까?”
“…그런가?”
“잘못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거기까지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는 모험가라는 게 흔한 건 아니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저건 맞는 말이다. 못 배워 먹은 놈들이 양심조차 없으며 일의 대부분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업종에서 사람이든 몬스터든 죽이는 일로 먹고 살다 보면, 정말 상종 못할 인간들로 거듭난다는 것을 모험가 일을 하면서 새삼 깨달았다.
그런 악 조건들을 전부 충족시킬만한 인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지. 현실은… 말을 말자.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얘들 정도면 첫인상은 좆박았을지언정 자신의 잘못을 늬우칠 줄 아는 지크멜과 같은 부류로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있는 놈들이긴 하다.
“하지만 마법 각인은 도서관에는 가야 제대로 새길 수 있을 텐데, 돌아갈 거야?”
“우리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들을 위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너희는 한동안 나랑 같이 다닌다.”
일방통보를 때리면서 풀링이 들고 있는 단검을 확인할 겸 아실리에에게 넘기자, 크게 안도하는 다른 놈들과 달리 풀링의 입이 움찔거렸다.
“저기, 저 다 박살 난 마차에 아직 남은 일행이 있는데 말이죠.”
“아까 떠들면서 오는 거 들었다. 근데?”
“그게… 저희같은 모험가가 아니라 아까 그놈들에게 엮인 피해자라서…”
비 전투인원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피해자라. 대충 뉘앙스를 보아하니 의뢰는 끝마치고 싶다는 내용이려나? 일단 살려서 써먹기로 마음먹었으니 상황을 파악해 둘 필요는 있어 보였다.
“야, 갑옷. 넌 마차에 가서 기다리다가 부르면 그 사람들 데려와. 그리고 마법사. 넌 그만 질질 짜고 남은 놈이랑 같이 저기 흩어져 있는 말들 좀 챙기고. 풀링 너는 우리랑 잠깐 대화 좀 하자.”
‘일단 살려는 드릴게.’가 가져온 효과는 굉장했다.
그것만으로도 놈들은 매우 고분고분하게 지시를 따랐고, 나와 아실리에는 풀링으로부터 왜 이딴 지랄이 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쟤네가 인신 공양의 몇 안 되는 생존자고, 너희는 그 사교도 놈들을 조사하는 거까지만 의뢰를 받았다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서 구해주다가 쫓기는 중이었다?”
“정확합니다.”
“자기들 신에게 바쳐야하는 제물을 빼앗겨서 분통이 터진 저 신앙심이 투철한 친구들은 그런 너희를 일주일 째 따라다니고 있었던 거고?”
“참 뻔뻔하지 않나요? 뭐가 잘났다고 그리 화가 난건지. 세상이 정말 말세라니까요.”
심각한 상황을 넘긴 탓인지, 혈통의 힘인 것인지 풀링은 방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거침없는 입담을 펼쳤다.
흘깃 시선을 던져 마차쪽을 바라보니 갑옷 놈한테도 멀찍이 떨어진 채 마차에만 바짝 붙어 벌벌 떨고 있는 꼬맹이들 둘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좀 있는 탓에 알 수 있는 거라고는 둘 다 푸석푸석한 금발에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는 것, 그리고 입고 있는 치마와 바지를 비롯한 옷가지들이 귀족들의 의상에 가깝다는 것 정도였다.
“순 도적놈들과 다를 바 없이 움직이던 놈들이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애먼 도적놈들에게 화살이 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녀석들도 그걸 노렸겠죠. 저희가 꼬리를 잡은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다 죽었을 걸요.”
그림자 발을 떠올리면 혈통이 맞는 거 같긴 하다. 방금 전까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긴장이 다 풀려 버린 모습에 할 말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구했다고 하기엔 저 마차가 개연성 없지 않냐?”
“귀인님. 저 독한 놈들이 저희를 따라다닌지가 벌써 일주일 째라니까요. 한 삼일 정도 이 악물고 도망쳤는데, 비전투원 둘까지 데리고 말달리는 건 그 정도가 한계더라구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비싼 돈 주고 구입한 모험가용 마차예요 저거. 얘들만 살려서 돌아가면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보니 과감하게 지르고 본 거죠.”
저희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까지 개박살이 나버렸지만 말이죠. 라고 말을 마무리 지으며 하하하 웃어 보이는 풀링의 반응에 난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저 유쾌함은 정말 종특이구나.
“쟤들 데리고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데.”
“오그웬이요.”
아직 우리가 어딜 가고 있다고는 말 안 했으니 내 눈치를 봐서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어 버린 난 적잖게 당황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다시 물어야 했다.
“거길 왜?”
“쟤네 부모님이 오그웬의 귀족이라던데요?”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오는 풀링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아실리에를 바라봤다.
하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젓는 아실리에의 반응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풀링을 바라보니, 우리를 보고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풀링의 눈썹이 묘하게 휘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죠?”
“맞을걸?”
아까 마법사와 달리 이번만큼은 서로가 무슨 말을 할지 확실히 눈치챈 거 같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현실을 부정하려는 풀링에게 덤덤히 통보했다.
“거길 관리하는 귀족은 영감님이고, 자식이라고는 이제 막 스물 중반을 넘겼을 아들 하나밖에 없으며, 그 아들마저도 전쟁터로 향한 게 벌써 4년 전이다. 출병식 때 내가 직접 봤지. 그의 아내가 아직 갓난아기인 유일한 후계자를 안고 배웅하는 모습까지 똑똑히 말이야.”
그리고 변경의 촌동네 오그웬에 그들 말고는 귀족이 없다.
대체 쟤네는 어느 평행세계의 오그웬에서 온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