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210)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10화(210/599)
사교도들은 이름이 없었다. 다시 태어나 마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현재의 삶을 신께 바친다는 명목으로 원래 있던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다.
허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개개인의 구분은 필수적이었던 만큼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여 이름 대신 숫자를 새겼다. 결국 이름과 다를 바 없는 짓이었지만 그들은 상징성에 집중하며 그런 불편한 진실에서 눈을 돌렸다.
그렇게 사교도는 84번이 되었고, 전장에서 느꼈던 압도적인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포로가 되어 짐짝처럼 끌려다니기 전까지는 말이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그가 느낀 건 암담하기 그지없는 공포와 절망이었다. 홀로 남은 뒤 겪어야 했던 시간들은 끔찍했다. 간악한 이교도가 휘두른 세치의 혀에 믿음이 흔들렸던 것은 둘째치고 놈이 휘두르는 막강한 무력이 자꾸만 마족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심각한 문제인데 갑자기 늘어난 놈의 동료들조차 하나같이 실력자였다. 심지어 황금의 마법사로 유명한 여성까지 이끌고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교단을 완전히 박살 낼 생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엔 없었던 흉악한 마도구까지 들고 말이다. 장담컨데 저 무기 하나만 들고 기습을 해도 1/3은 제대로 반응조차 못해 보고 죽을 게 확실했다. 교단 역사상 유례없는 대위기인 것이었다.
84번은 형제 자매들을 믿고 싶었지만 저 사악한 이교도가 너무 강하다는 현실에서 도저히 눈을 돌릴 수 없었고, 어떻게든 도망쳐서 동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매일 같이 노력했다.
다행히 머릿수가 많아졌기 때문인지 감시는 소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는 섣부르게 도망치기보다 교단에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확실히 도망칠 수 있도록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어차피 이들은 말을 타고 이동했고 그는 무일푼에 두 다리 뿐인 입장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84번은 스스로 상황을 유추해서 자발적으로 판단한 뒤 냉철하게 결론을 내렸다고 자신을 속였다.
그렇게 정신 승리라도 하지 않으면 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도망칠 것 같기에.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엘드미아 님. 저 숲에 들어서면 한 시간 내에 녀석들의 은신처에 도착합니다.”
“얼추 예상대로 도착했네. 그럼 바로 야영지부터 건설하고 기습 계획을 짜보죠.”
제물을 빼돌리는 그 순간에도 쉴 틈 없이 저주스러운 주둥아리를 놀리던 난쟁이 계집이 도착을 알리자 폭력의 화신과도 같은 이교도가 명령한다. 그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제 할일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쪽은 지은 죄가 있어서 그랬고, 다른 한쪽은 원래 알아서 잘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사정을 알지 못 하는 84번의 눈에는 이교도의 거침없는 영향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쟨 어떻게 할까?”
공성추라고 해도 믿을 만큼 큰 워해머를 사용하는 거구의 여전사가 이교도를 향해 질문하자 그의 시선이 84번에게로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84번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으나 다행히 이교도는 처음 그에게 한 말을 어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작 싸울 때 저항하면 귀찮으니 그냥 굶기죠 뭐.”
자신은 마지막에 죽인다고 했던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이교도는 84번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에게는 아직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84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는 듯했다. 겨우 한 끼 굶었을 뿐인데도 격하게 몰려오는 허기 속에서 어떻게든 밧줄을 풀기 위해 노력하던 84번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팔을 묶고 있는 밧줄이 느슨해진 것이다.
‘마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느슨해진 부분을 주먹으로 꽉 쥐어 밧줄이 잘 묶여 있는 것처럼 꾸민 84번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으나 새벽을 틈타 기습을 준비하기로 결정한 이들은 벌써 취침 준비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미 불침번까지 다 정하고 잠을 청하는 이들을 보면서 84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밧줄이 풀린 건 좋았으나 도망칠 기회가 오는 건 완전히 미지수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긴장감은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긴장하며 시간을 보낸 탓에 피곤할 법도 했지만 너무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았다. 84번의 머릿속에는 오직 적절한 기회를 포착해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의욕만이 가득했다.
“으. 긴장했나. 속이 안 좋네.”
길고 길었던 기다림은 보상 받았다.
불침번인 대머리 남자가 복통을 호소하며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자리를 비운 것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84번은 주저 없이 밧줄을 풀어내고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이교도는 도주우려가 있는 자신을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84번도 수많은 제물들을 바치며 도망치려는 이들을 상대해왔기에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침착하게 야영지와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모두 잠들었고, 유일한 불침번은 반대 방향으로 가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끝없이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새기며 숲속에 들어선 그는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다는 확신과 함께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렸다.
어릴 적 마을에서 뛰어 놀면서, 빚을 지고 도망치면서, 마수들에게 쫓기면서, 전장으로 향하면서, 전장에서 도망치면서. 전력으로 뛰어야 했던 순간들은 참으로 많았으나 84번은 장담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 평생에 걸쳐 가장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순간이라고.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써가며 달리고 있다고. 제대로 된 준비운동조차 없이 달린 탓에 금방 근육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둑어둑 밤이 내리고 있음에도 눈앞이 노랗게 물들고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로 달린 끝에 그의 눈에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형제 자매들이여! 내가 돌아왔습니다! 84번이 돌아왔어요!”
“세상에 형제님?! 정녕 형제님이십니까!”
그들은 가족이었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절망을 공유해 피붙이보다도 끈끈해진 가족들. 그랬기에 84번은 그들을 버리고 도망친다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귀환이 늦어져 후발대를 보냈는데 만나지 못하신 겁니까?”
임무를 실패했음에도 걱정어린 말투. 84번은 허겁지겁 뛰어나와 자신을 맞이해주는 형제들을 보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크흑…! 이,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전 겨우 도망쳐 온 것입니다! 곧 이교도 놈들의 습격이 있을 것입니다!”
“습격이라구요?!”
“세상에. 90번 자매님! 어서 대사제님께 말씀드리세요! 84번 형제님, 침착하십시오. 추격대의 소식이 없었던 이유가 그들 때문입니까? 얼마나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온 거죠?”
“여, 열한 명밖에 되지 않지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형제님. 추격대에 편성되었던 형제들을 모조리 죽인 건 고작 한 명입니다! 말도 안 되는 강함이었습니다!”
안전해졌다는 안도와 함께 죽은 형제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뒤늦게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때였다. 당장 한 명에게 모두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형제들이 바짝 긴장했다는 것을 복면 너머로도 알 수 있었기에 84번은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야습과 기습에 능한 자입니다. 지금은 강력한 투사체 마도구까지 가지고 있어서 후발대로 온 형제들이 제대로 된 반응조차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법검! 말과 갑옷 입은 사람을 일격에 베어버릴 수 있는 마법검까지 지닌 자입니다. 당장 20번대 형제님들을 모셔서 역습을 가하지 않으면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맙소사… 정말 큰일이군!”
자신들보다 압도적인 강함을 지닌 마족에게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껴서 도망치고 모이게 된 그들은 강한 적이라는 이야기에 거의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모두가 마족과 싸워 본 적 있기에 84번의 설명으로 대략 어느 정도의 강함인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확히는 간접적인 대면 끝에 도주했기에 알 수 있었다. 직접 싸웠다면 당연히 다 죽었을 것이다.
“후발대는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30번대 형제님도 포함해서 구성했는데, 못해도 마왕군 십인대장 이상이란 말이잖습니까!”
마왕군은 힘을 숭배한다. 그들 역시 소문으로만 들은 이야기였으나 그들이 각 병력의 대장인 이유는 그중 가장 강하고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휘하의 병력이 다 덤벼도 이길 수 없기에 대장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30번대는 그런 소문을 몰고 다니는 마왕군 십인대장들까지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마족에 대한 소문에 어느 정도 진정성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결코 약한 이들이 아니었다.
“84번 형제님을 대사제님께!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위기감 속에서 허둥지둥 교단 안으로 들어갔다.
다 낡아 빠지고 무너져 교단보단 폐허 혹은 폐던전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건축물 안으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놀고 자빠졌네. 병신들끼리.”
조용히 84번의 뒤를 쫓아온 엘드미아가 똥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린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