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281)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81화(281/599)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셰릴의 일과는 지극히 단순했다.
수업과 단련.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과의 교류가 아예 없는 편은 아니었으나 굳이 자기가 먼저 나서서 어울리고자 한 적은 없다.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탓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조바심을 느끼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업에 집중했을 뿐. 결국 그런 모습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노력까지 겸비하는 모습으로 비쳐져 세간의 평가는 조금 딱딱할지언정 밉지는 않은 인물 정도로 굳어졌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유지되던 일과에 변화를 줬기 때문일까, 갑작스러운 부탁과 요구에도 그녀의 학우들은 순순히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었다. 물론 악마와 반역자라는 자극적인 요소가 엮인 게 한몫했다고 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전혀 나쁘지 않았기에 셰릴은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3일의 결과물을 벽에 붙여 놓은 채 고민에 잠겼다.
개인적으로 참 탐탁지 않았지만 엘드미아의 조언대로 그리윌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아카데미의 약식 도면들과 지금까지 파악된 지하수로의 대략적인 개요들이 적힌 문서는 대부분 그의 힘으로 얻었으니까. 거기엔 공개적인 자료 외에도 나름의 노하우가 적힌 개인 문서들도 존재했다.
단순히 상인의 자제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꽤 발이 넓다는 걸 말했더니 친구들로부터 너무했다는 시선을 받은 게 좀 걸렸으나, 결국 어영부영 넘어가 버려서 이유를 물어보지는 못했다. 엘드미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일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그리윌스에 대한 평가를 음험한 녀석에서 능력 있는 음험한 녀석으로 수정한 셰릴은 다시 본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알아낸 정보는 결코 적지 않았고,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왕국은 도시 아래의 지하수로만큼은 엄격하면서도 철저하게 관리했지만 동시에 보안과 관련된 일부 중요한 정보들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공개하고 있었다. 덕분에 셰릴이 아카데미에 잔뜩 있는 귀족들의 인맥만으로도 괜찮은 정보들을 긁어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왕국이 정보의 중요성을 몰라서 머저리 같은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니다. 어차피 숨기기엔 너무 크니 아예 드러내서 지하수로가 음지가 아닌 양지라는 인식을 모두에게 심어 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했다.
실제로 왕국은 정보 공개를 통해 지하수로가 결코 은닉과 은신을 위한 최적의 장소가 아니라는 인식을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주입시켰으며, 엄연히 도시의 일부이기에 관리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귀족들에게 추가 비용 및 노동력을 정당하게 징수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개한 정보를 기반으로 모험가 길드를 비롯한 용역들에게 체계적으로 업무를 의뢰함으로써 훨씬 정확하고 저렴한 가격에 수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 정도 정보는 공개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쳐 왕실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었으니 여러모로 아쉬울 게 없는 장사였다. 실제로 왕국 역사상 지하수로를 공략당해 난처해진 적은 없었으니 최근까지는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 최근까지는.
앞서 간략하게 언급되었던 것처럼 수도에 저택을 보유한 채 거주하고 있는 귀족들은 주기적으로 수로 관리를 위한 비용 및 인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예외는 없다.
당연히 거기에는 이번에 반역죄로 숙청당한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엔벨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 넉넉한 금화로 의무를 다하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꾸준하게 지하 수로 관리에 고급 인력을 투입해온 엔벨데가 어떤 의중을 지닌 채 그래 왔는지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었으나 문제는 그 시기가 너무나도 길었다는 점에 있었다. 엔벨데의 죽음을 공표하자마자 왕실에서 직접 나서서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한 뒤 귀족원까지 가세해 지하 수로를 낱낱이 조사하는 중이지만 아직도 엔벨데에게 고용되었던 인원들이 수년간 지하 수로를 관리하며 그곳에 무엇을 숨겨 두었고, 어떤 비밀 공간을 만들어 놨는지 다 밝혀내지 못했다.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거라 여겨지는 측근들이 대부분 엘드미아에게 목이 날아간 결과였다.
무려 드워프들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대대적인 점검을 하고 있었지만 영 속도가 나오지 않았고, 전투 능력이 전무한 시민들의 거주 구역부터 조사하다 보니 아카데미는 아직도 점검을 받지 못했다.
“은신처를 만들었을까?”
가능성은 희박하다.
수도에서 들고 일어나는 반역은 보통 단기 결전이다.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한 통로를 기록 하는 건 몰라도 뜬금없이 아카데미 아래에 은신처를 만들어 놓을 이유가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거라고는 수로를 이용한 보급로 구축과 이를 위한 보급기지 건설인데, 아카데미 지구는 다른 구역들 중에서도 유독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형태라 조건이 맞지 않다.
“실력도 없는 녀석들로 아카데미를 점거하려 했을리도 없으니… 아카데미가 농성에 들어갈 경우 급습을 위해 구조만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손을 움직여 벽에 붙은 지도와 문서에 내용을 적는다. 가능성 없는 가설을 삭제하고, 그 가설을 기반으로 예상했을 때 숨어 있는 이들이 거점을 세워 놓았을 만한 구역도 같이 지웠다.
3일 동안 자는 시간마저 쪼개가며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서 내놓은 가설과 방안들이 하나둘 지워졌지만 그럴수록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진다. 그 과정 속에서 셰릴은 묘한 고양감을 느꼈고, 엘드미아에게 자신의 유능함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상상 속의 그녀는 엘드미아에게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받고 있었지만, 셰릴이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
“알아낸 거 같아.”
에셀루아에게 악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지 5일 째 되는 날 아침.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느 모습보다도 수척한 상태로 교수실에 나타난 셰릴이 대뜸 던진 한마디가 뭘 의미하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게 지하 수로에 숨어 있는 바퀴벌레들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을 예측하기도 했고, 말과 동시에 내게 지도와 함께 참고자료로 짐작되는 문서를 건네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몰골이 너무나도 말이 아닌 탓에 나는 문서를 펼쳐볼 틈도 없이 그녀에게 커피와 라이카를 들이밀었다.
“세상에, 잠도 제대로 못 잔 게 눈에 보인다. 일단 이거 좀 마시고 라이카 좀 쓰다듬고 있어 봐.”
“…커피는 그렇다 쳐도, 라이카는 왜?”
“라그니스 말로는 뭔가 묘하게 치유되는 기분이라더라. 실제로도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네란으로도 시험해봤거든.”
오늘도 어김없이 침낭 속에서 애벌레 같은 몰골로 라이카를 쓰다듬으며 임상시험 중이던 세네란은 말도 없이 라이카를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으며 툴툴거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애가 피곤해서 뒤지려고 하는데 겨우 잠기운을 쫓아내려고 할 뿐인 사람이 중요하겠어?
그런 우리의 반응을 한차례 살펴본 셰릴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의자를 꺼내 앉아 커피와 라이카를 받아들었고,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지도를 펼쳐보았다. 그러자 꾸물거리며 다가온 세네란이 은근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름 진중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하는 걸 보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차피 감출만한 내용도 아니라서 적당히 같이 살펴보다가 의견을 물어보자 세네란이 멀뚱멀뚱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몰라. 그냥 심심해서 본 건데.”
씨발. 내 든든함 돌려줘요.
지금 아카데미가 조의 아파트가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데 이런 태평한 반응이라니. 그래도 상부상조하는 입장에 차마 경멸 어린 눈초리를 보낼 수는 없어서 짧게 한숨을 쉰 뒤 그냥 지도에 적히 글귀에 집중하기로 했다.
셰릴의 유려한 필체로 정리된 내용은 군사학에 조예가 없는 내가 읽어봐도 타당했다. 솔직히 나는 어떻게 위치를 추려내야 할지 감도 안 왔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며 납득이 될 정도다.
반역자의 시점에서 지하 수로를 바라보고 유용성을 따지며 하나하나 추려 낸 거점 예상 지역은 합리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열 개까지 추려져 있었고, 첨부된 설명과 자료들을 통해 기습 가능 여부와 정찰포인트까지 예측해 체크되어 있는 걸 확인한 내가 기립박수의 충동을 느낄 때 쯤 셰릴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친구들과 수 차례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이니 뭐라도 하나 걸리긴 할 거다. 악마 숭배자들이 도시 내부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경로까지 알았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추려졌겠지만… 그건 기밀이라 알 수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지. 너도 지하 수로 관리 의뢰 해 봐서 알잖아. 난 지금 몹시 감격중이다.”
공식적인 자료와 수로 도면이랍시고 던져 준 게 6할 가까이 틀렸을 땐 그냥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었지. 거의 수도에 처음 왔을 때 있었던 일이라 이젠 아련한 추억이었다. 같이 공유하는 추억을 떠올린 것인지 이번에는 셰릴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움직일 거야?”
“일단 지크프리트한테도 보여줘야 하고, 네가 꾸린 파티에 참여한 친구들하고도 시간을 맞춰야 하니 빨라도 내일 수업이 다 끝난 뒤가 되겠지.”
어차피 관련인물들과 말도 맞춰야 하고 손발도 맞춰야 하니까 오늘은 무리였다. 사실 내일 바로 움직이는 것도 순전히 나 혼자서도 감당 가능할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좀 서두르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오늘은 푹 쉬어라. 너 놓고 갈 생각 없으니까.”
무엇보다 다크서클이 입까지 내려올 거 같은 애를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지. 난 셰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웃어 보였다. 적잖이 피곤한 탓인지 셰릴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