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294)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94화(294/599)
조사원과의 대화를 마치고 모처럼만에 난로가 앞에 앉은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내 손가락이었다.
정확하게는 검지에 끼고 있던 하얀 반지 외에 제멋대로 생겨난 중지의 검은 반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백날 뚫어져라 바라본다고 한들 이게 뭔지 알 방법이 없었기에 내 지식의 원천 아실리에몽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에스뮈에가 줬으니 나름 비싼 물건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좀 많이 비쌀텐데.”
어제는 미처 말하지 못했던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땐 또 쓰러질까 아찔했지만, 생각보다 아실리에의 반응은 덤덤했다. 어차피 반지를 받은 그 순간부터 저주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나?
“이거 방어와 동시에 저주를 기록하는 아티팩트였네. 여기, 이 부분 보이니?”
괜히 빼거나 손대면 위험한 게 아닐까 싶어 계속 끼고 있던 검은 반지를 겁도 없이 쑥 빼든 아실리에가 가리킨 반지의 일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나는 그 검은 반지가 빼곡한 글자들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글자 맞지?”
“맞아. 마법과 달리 저주의 술식은 직관적이거든. 자연 그대로의 것을 하나도 섞지 않은 채 그저 차곡차곡 쌓는 것에 불과하지. 이 반지를 전문적인 마법사에게 가져가면 술식을 분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역추적이 너무나도 쉽게 가능하다. 이 반지는 그렇게 범인을 추적하는 용도로 개발되어 소수의 고위 귀족들이나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게 아실리에의 설명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이런 물질을 만들어낸다고…?”
“정확히는 저주막이 반지가 지니고 있던 무언가지. 그게 어떤 구조인지까지는 누나도 잘 몰라.”
마법과 마도구의 세계는 참으로 오묘하다는 걸 새삼 깨닫고 감탄하는 사이 아실리에는 내게 다시 검은 반지를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말이 소수의 고위 귀족이지, 왕족이나 쓰는 물건이야. 저주만큼이나 가성비하고는 거리가 먼 물건이거든.”
왕족이라고 하니 상당히 거창하게 들렸지만 왕위승계권이 치열한 국가의 왕족들은 서로가 암살을 모의하는 걸 경계해 하나씩 끼고 다니는 수준이라고 한다. 비싼 건 맞지만 드물지는 않은 정도?
“그래도 평민이나 모험가가 끼고 다닐만한 물건은 절대 아니지. 저주에 대한 보복과 역추적을 목표로 만든 물건이라니, 아는 사람이 봤으면 엘디를 어디의 왕족이라 착각하고도 남았겠네.”
“내가 좀 귀티나게 생기긴 했지.”
“또 헛소리 한다.”
피식 웃으며 어깨를 찰싹 때리는 아실리에의 반응에 같이 따라 웃으며 살펴본 하얀 반지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보다는 확실히 탁해져 있었다. 한 번 정도는 더 막을 수 있으려나? 횟수 체크 같은 게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보아하니 저주를 막을 때마다 색이 바래지는 구조인 거 같은데, 명색이 대악마가 던진 저주를 막고도 그 정도인 거 보면 저주막이의 기능도 꽤 튼실한 편이네. 누나도 가끔 저주에 대한 대비를 하긴 했지만 보통은 부적의 형태로만 쓰다보니 좀 신기하긴 해.”
나를 대신해 부두인형 같은 게 저주를 받아주는 것과 비슷한 구조인 것이려나. 나중에 감사의 편지를 보내며 구체적인 설명도 같이 부탁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어차피 이번 사건이 정리되면 지크프리트도 제국으로 돌아갈 테니 그때 부탁하면 되겠지.
어쨌든 반지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되었기에 나는 모처럼만에 맞이하는 휴식을 만끽하기로 했다.
“엘디. 눈사람 만들자. 눈사람.”
…일단 아실리에와 논 다음에.
◈
아실리에는 북방 출신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눈을 참 좋아한다. 정작 겨울이 다가오면 동면에 들어가는 곰처럼 늘어지기 시작하면서 눈만 보면 신나한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지만 아무래도 오랜 시간 동안 고향에 간 적이 없다 보니 일종의 향수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노예로 팔릴 뻔했던 기억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게 된 아실리에였기에, 나는 이번 기회에 그동안 눈치만 보고 못 물어봤던 그녀의 고향에 대해 넌지시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누나 고향은 어떤 곳이야?”
“으음… 눈 많고, 엘프 사냥꾼들이 자주 오는, 좀 많이 험한 곳이지.”
폴짝폴짝 뛰는 라이카와 함께 신나게 눈덩이를 굴리면서 기억을 더듬던 아실리에의 입에서 나온 표현은 퍽 살벌했다. 고향의 특징 중 하나가 엘프 사냥꾼과의 마찰이 잦은 거라고? 내 표정이 저절로 기이해지는 것을 본 아실리에가 쓴웃음을 터트리며 설명했다.
“어처구니없지만 사실이야. 사시사철 눈에 둘러싸여서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데 놈들은 질릴 정도로 자주 오거든.”
“…내가 전부터 궁금했는데, 엘프 사냥꾼 놈들은 숲밖으로 유인해서 엘프를 노리는 게 아니라 숲속에서 엘프를 찾는 거야?”
“둘 다 해. 맞아, 엘디가 생각하는 것처럼 숲속에서도 엘프와 비등하게 싸우는 게 엘프 사냥꾼이야. 한낱 노예 상인이라고 치기엔 좀 과하게 강한 편이지.”
숙련된 엘프와 그냥 싸우는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준인데 숲속에서 정령의 도움을 받는 엘프를 상대한다니. 멋모르고 들었다면 신종 자살법인 줄 알았을 거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구속구 기억나지? 그런 거 외에도 노예 상인들은 상당히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해. 엘프 사냥꾼들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런 도구가 꽤 치명적이야. 이쪽은 싸우는 것만으로도 손해인데 놈들은 엘프 하나만 붙잡아도 본전을 찾는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거든.”
“그런 마도구도 더럽게 비쌀텐데, 그걸 감안하고도 그 지랄을 한다고?”
“그러더라. 내가 노예 상인에게 넘어갔을 때… 엘프 사냥꾼들이 아마 교역 금화 40개를 대가로 받았던가?”
이제 와서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아실리에였지만 정작 듣는 나에겐 대수로운 내용이었다. 처음엔 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그렇게까지 돈에 목숨을 거나 싶었는데, 교역 금화 40개면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 지천에 널렸다.
평민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면 평생 금화 하나도 온전히 못 만져 보는 경우가 허다한 세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씹새들의 행동을 이해할 생각도, 납득할 생각은 없었다.
“누나는 고향이 그립지 않아?”
열심히 굴리고 있던 눈사람의 머리를 들어 올리며 물어보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실리에가 어째서인지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엘디랑 지내는 동안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서 그런가?”
베시시 웃으며 다가오는 아실리에가 열심히 굴린 눈사람의 몸통에 머리를 올려 두자, 아실리에는 자연스럽게 내 품에 등을 대고 안겨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옛날엔 부족이 전부이긴 했지. 어리기도 했고, 오만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자만하는 바람에 화를 당하면서도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젠 그냥 ‘언젠가 시간이 되면 돌아가서 무사하다는 거나 알려야지.’ 라는 생각 정도만 들어. 붙잡힐 때만 해도 꼭 도망쳐서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한가득이었는데 말이지.”
그녀가 말하는 어리다의 기준은 엘프 기준임이 분명했지만 입 다물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실리에가 오만했을 뿐만 아니라 복수심에 불타던 시기라… 상상력을 총동원해봤지만 쉬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많이 멀어?”
“일단 제국 반대편이니까. 게이트를 사용한다면야 금방이지만 거리만 놓고 보면 끝에서 끝이지.”
“그 먼 거리를 건너서 우리가 만났다는 거네.”
“후후, 그렇지. 신기하지 않니? 하필 거기서 노예 상단이 습격을 당한 것도, 그 도적들이 뭐 주워 먹을 거 없나 찾아볼 겸 엘디네 마을로 향한 것도. 운명이라는 걸까?”
“난 운명따위 믿지 않아.”
사실 신기한 걸로 따지면 내 환생부터가 가장 신기한 것이었기에 그냥 그런 우연도 있나 보다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게 운명이었다면 이 세상은 신이 짜놓은 판이라는 소리가 되는데, 그럼 그 새끼가 우리 마을을 초토화시킨 진정한 배후라는 소리가 되잖아.
마왕군 살해자 엘드미아로 가는 길조차 멀고도 험한데, 신살자 엘드미아가 되는 길은 얼마나 까마득할지 감도 안 온다.
그래서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더니 아실리에가 그런 나를 올려보며 다시 한번 웃었다.
“하긴, 엘디만큼 정해진 운명이라는 단어랑 거리가 먼 사람도 드물지.”
“그럼. 가는 길마다 변수를 창출해내는 혼돈 그 자체인 걸.”
“알면 좀 자중하자?”
“아니… 이건 좀 억울하지.”
세상이 날 억까 하는데 어떻게 자중하냐고. 억울한 마음을 담아 변명아닌 변명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동안 우리 발 사이에 어떻게든 몸을 낄려고 바둥거리던 라이카가 갑자기 귀를 쫑끗 세우며 말했다.
[주인! 누가 와!]“…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여기로 온다고? 어떻게 알았어?”
[이름! 주인 이름 말하면서 오고 있어!]크루멜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게 아니라서 내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지인 중의 누군가라고 보기엔 내 집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리 약속을 잡고 움직이는 게 생활화된 귀족들인지라 이렇게 갑자기 방문할 사람이 없다.
지크프리트? 걘 지금 내 욕하면서 에셀루아와 함께 열심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추느라 정신없을 거다. 라이카가 헛소리를 할 리도 없기에 감도 안 오는 손님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입구를 응시하고 있기를 수십 여초.
“여기입니까?”
“예, 예.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방문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의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지크멜?”
멋쩍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주춤거리는 지크멜 옆에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몽순이가 두터운 로브를 두른 채 함께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지크멜과 달리 몽순이는 자연스럽게 후드를 벗더니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가 님. 옌 티에입니다.”
아, 그런 이름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