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358)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58화(358/599)
내성 쪽에서 갑자기 뿔피리 소리가 울려지자 자신을 판타나라 밝힌 기사와 그 뒤의 병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대로라면 기회다 싶어 목을 따버렸을 텐데 놈들의 표정이 나라 잃은 수준이라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백작이 갑작스러운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여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째서?!”
나라를 잃고 부모까지 잃은 것 같은 원통함이 담긴 판타나의 표정 속에 담긴 의중은 알 수 없었지,만 중심을 잡고 있던 놈의 검이 아래로 내려가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후퇴 혹은 공격 중지. 아직도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놈들까지 멈춰 세울 수는 없었지만 내 앞에 있는 놈들은 확실하게 무기를 내려놓았다.
“전원 공격 중지! 영주님께서 직접 나가신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목청과 내용에 내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딱 봐도 귀족같아 보이는 젊은 남성 하나와 노기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귀족 남성 쪽은 딱히 시선을 끄는 요소가 없었지만 노기사는 달랐다. 라드넬반데스 곁에 둬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큰 덩치에 중갑까지 걸치고 있는 모습은 굉장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얼굴에 있는 주름이나 흰 머리를 보아하니 나이깨나 자신 분같은데, 몸과 자세만 놓고 보면 오히려 옆에 있는 귀족놈보다 저쪽이 더 건장해 보인다.
이 세상에서 칼밥 먹은 어르신들은 죄다 저런가? 하나같이 덩치가 산만한 게 뭐 비결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대로 갔으면 마지막에 저 어르신과 검을 맞댔겠구나, 라는 감상을 하며 영주인 것 같은 젊은 놈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는 와중에 천천히 도개교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엥? 영주가 아직 위에 있는데 도개교를 열어?
들어오라는 소리를 지껄이면 엿이나 날려줄 요량으로 보고 있으니 도개교 반대편에서 병사 몇 명과 잠깐 마주쳤던 왕실의 입회인을 대동한 중년 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위에 파릇파릇한 친구가 아니라 저 인간이 영주라는 걸.
단순히 주변 상황을 떠나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겉으로 내비치는 감정과 별개로 눈만큼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지 탐색하고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습관적으로 움직인다.
레스롬 공작같은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의 패시브 스킬과도 같은 것이었으나, 저 자는 그러한 시선을 타인을 앞에 두고 뿌리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는 점이 달랐다. 실제 그가 지닌 능력이 어쨌든 간에 삶의 대부분을 남들 위에 군림하며 지낸 사람이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남들 위에 설 수 없는 인간인데 저딴 시선을 뿌리면서 살았다간 진즉에 뒈졌을 테니까.
“배, 백작님! 저희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랑 열심히 싸우고 있었던 주제에 판타나는 절대 뒤통수를 맞을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멕켈린 백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도개교가 다 내려오는 그 순간까지도 멕켈린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 내려와 고정된 다리를 밟으며 걸어올 뿐.
그게 대변인 없이 언성을 높이는 ‘품위 없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걸 조금 뒤늦게 눈치챈 나는, 이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고한 이들의 피만 흘리게 될 뿐.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안 됩니다!”
투구까지 벗으며 외치는 판타나와 멕켈린 백작의 대립은 그야말로 극적인 하극상의 현장이었지만, 그런 놈들의 사정과 별개로 내 머릿속은 간만에 일천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들이 모여 대회의를 여는 중이었다.
놈의 목적. 피해 최소화, 덤터기, 이해득실 등등 온갖 단편적인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동시에 왜 가장 강해 보이는 어르신이 위에 남아 있으며, 그 옆에 있는 귀족이 누군지 윤곽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냉철하게 결단을 내리는 정신 나간 판단력을 지닌 저 소시오패스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여기서 살아오며 ‘가문을 위하여.’ 라고 외치는 인간들은 나름 자주 봤지만, 풀링도 아닌데 가문을 위해 정말 모가지를 내미는 놈은 처음 본다. 심지어 그 와중에 침착함과 품위를 유지하려 하고 있으니 저놈은 진짜 귀족이라 할 만했다.
가문과 영지의 이익을 위해 불법과 합법따위 구분짓지 않으며 수 싸움을 이어 나가는 이 세계의 정형적인 귀족 말이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 다들 물러나도록.”
목소리에서는 확고함이, 굳은 얼굴에서는 결심이 흘러나오는 멕켈린 백작의 모습에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그와 대화를 하는 동안 투구를 벗었던 판타나의 각진 얼굴이 이를 즈려무느라 더욱 각져지는 동안 헐레벌떡 뛰어오던 외성 경비 병력들이 우르르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백작은 그들을 보면서도 딴 생각을 하지 않고 똑같은 명령만 반복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면 포위했다고 여기고 딴마음 먹었다가 골로 갔을 상황인데 말이다. 그는 이미 결과를 예상한 게 확실했다. 설령 나를 잡아 죽이더라도 이후 가문이 떠안아야 하는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여러 의미로 대단하긴 하다만.
과연 이 자리의 모두가 그 이성적인 판단을 존중할 수 있느냐 하면, 글쎄올시다.
“…아뇨. 따를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귀족인 그와 다르게 대부분은 덜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들이라서 말이지.
당장 저기서 눈을 부릅뜨며 불복하는 판타나만 하더라도 기사인데 백작 말을 씹어 버리잖아. 이런 반응은 예상 못했는지 멕켈린 백작의 굳은 얼굴에 살짝 균열이 갔다.
“지금 본인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건가, 판타나 경?”
“오히려 의무를 다하겠다는 겁니다 영주님. 이 결투는 멕켈린 ‘영지’를 향한 것입니다. 이는 영주님과 백작 가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멕켈린 영지 사람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곡이기는 했다. 물론 일을 저지른 게 멕켈린 백작 혼자라서 굳이 그런 의리를 내보이면서까지 싸울 이유가 없을 뿐이지. 멕켈린 백작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적잖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판타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까지 당혹스럽진 않았다. 저 친구가 저렇게 반응하는 건 사실 백작을 향한 충성심보다 나로 인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게 큰 원인일 테니까.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대비해 판타나의 두꺼운 타워 실드에 박혀 있던 도끼를 힘으로 뽑아 다시 어깨에 걸칠 정도로 여유로웠다.
검은 집어넣지 않았다. 이걸로는 판타나를 상대해야 했으니까.
“겨우 단 한 명에게 휘둘려 제 의무조차 제대로 다 하지 못한 인간으로 평생을 살아가느니, 이 자리에서 의지를 관철하며 죽겠습니다.”
멕켈린 백작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판타나뿐만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는 병사들 대다수가 그랬다.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이 시대의 사람들은 보통 한 영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사회처럼 집, 회사, 집을 오고 가는 피폐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왕처럼 지내거나 풍족하게 삶을 향유하지는 못할지언정 영지 안에 있는 이웃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내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소속감이라는 게 생긴다. 거기서 발생하는 의무감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저와 같은 뜻을 지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걸 한 명이 개작살을 내놓으며 내성까지 기어들어 왔다. 당장 처음 직면했을 때는 기사조차 순식간에 때려눕혔으니 두려웠지만 이렇게 백이 넘게 뭉친 상황에서 살짝 열이 오른 머리로 돌이켜보면 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씨발? 화나네? 저 새끼도 사람인데, 이 정도면 할 만한 거 아니야?’ 라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나한테 죽은 놈이 거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실력이 있는 놈들이야 일부러 안 죽인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거지, 실력 없는 놈들이 보기엔 안 죽인 것과 못 죽인 것을 구분할 수 없다.
뭐, 나는 영주의 일기토 선언이 있어서 믿고 가만히 있는 건데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건 비겁하다고 할 수 있겠지.
저들은 비겁자 타이틀 보다 한 명의 적에게서 영주조차 못 지킨 병신이라는 타이틀이 더 좆같기에 애써 무시하는 거고, 입회인은 방금 판타나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멕켈린 백작과 내가 결투 선언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발생한 해프닝에 가깝게 치부할 여지가 있다 여기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에 가깝다.
처음의 굳은 모습과 달리 심히 당황하는 멕켈린 백작과 달리 입회인은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고, 판타나를 비롯한 병사들의 적의 어린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멕켈린 백작이 내린 결론은 이성적인 사고 끝에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시각으로 사건과 손익을 바라볼 수는 없는 법.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었기에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럼 나는 왜 가만히 있냐고? 어차피 내 목적은 한결같았으니까.
날 노린 멕켈린 백작을 엿 먹이는 것.
그게 멕켈린 백작의 목만 따는 걸로 끝나는 적정 크기의 엿이든, 그가 걱정한대로 영지의 미래가 암울해지는 빅엿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그냥 굴러가는 꼴을 방관하고 구경한 것에 불과하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살 길을 뚫었겠지만…
이들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아쉽게 됐군 멕켈린 백작.”
별수 있나?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생각하는 대로 굴러가주지 않는 법이잖아.
멕켈린이 처음 나를 죽임으로써 위신과 자존심을 챙기려고 했던 것처럼, 이들도 그런 것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내가 멕켈린 백작에게 해 줄 말은 그 뿐이었다. 자기주장을 마친 판타나가 극한의 하극상을 저지른 것치고는 차분하게 전의를 불태우며 나에게 달려드는 것을 신호 삼아, 나를 포위한 병사들도 창검을 고쳐 쥔 채 덤벼들었다.
바늘은 날리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저들에겐 총에 맞고 죽을 수 있다는 공포보단 도끼에 몸이 토막난다는 공포가 더 확실한 효과를 거둘 것 같았기에.
“무기를 든 이상 죽음도 각오해야지.”
분명 처음부터 경고했었던 내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상기시켜줬지만 적들의 움직임은 멈출 줄 몰랐고.
최소한의 죽음으로 간단하게 끝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안겨 주는 커다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는 마력을 두른 검으로 판타나의 목을 검과 함께 베어 버리는 것으로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