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367)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67화(367/599)
촌장 라베리 씨의 제안은 즉흥적인 게 아니었다.
내가 의식이 날아갔던 이틀간 충분히 많은 토론을 거친 끝에 나온 결론이라고 한다. 그만큼 귀 사냥꾼이 엘프들에게 주고 있었던 피해가 막심했다고 하니, 역시 놈이 준비를 다 마치기 전에 기습으로 해결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던 거 같다. 사냥은 얼마나 많이, 철저하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법이니까.
“물론 자네가 세계수의 말씀을 들은 기념비적인 인족이라는 것도 영향을 주긴 했다네. 방어구 외에도 여러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셀레비안에게 들어보니 자네의 무기는 이미 차고 넘치는 수준인 것 같더군. 우호의 증표도 이미 세계수의 씨앗을 받아 부질없을 터이니 가장 좋은 건 방어구가 아닐까 라는 의견이 나왔네.”
확실히 내가 두르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질이 떨어지는 걸 꼽으라면 방어구이긴 했다. 흔하디흔한 가죽 갑옷에 불과했으니.
최근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그냥저냥 쓰고 있었지만, 안 그래도 귀 사냥꾼과 싸울 때 이래저래 자잘한 상처가 났던 게 신경 쓰여서 이티스엘로 돌아가면 두둑해진 주머니의 힘으로 쓸만한 방어구 하나 세트로 맞출 생각이었다.
“드워프들의 갑옷만큼은 아니지만 무게에 비하면 놀랄만큼 튼튼하다네. 어떤가?”
“…그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그냥 돈으로 받고 발쿤 씨에게 주문 제작을 부탁할까 싶기도 했지만… 오늘 한 번 보고 두 번 다시 안 올 것도 아니고, 결국 아실리에와 한 번은 더 들려야 하는 곳이었다.
그때 자신들의 성의를 거절한 이가 드워프가 만든 갑옷을 걸치고 있으면 쓸데없이 구설수에 오르게 될 테니 그냥 주는대로 받는 게 낫겠지. 엘프들의 방어구라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나쁠 건 없었다.
“하하, 다행이군. 빈말이 아니라 우리 마을의 대장장이 실력이 꽤 좋은 편이라네. 어느 날 뜬금없이 망치를 쥐었을 땐 녀석이 미쳤나 했는데, 1300년을 내리 두드리고 있는 걸 보면 적성이 맞는 게지.”
“…1300년이요?”
“촌장님. 올 해로 1354년 입니다.”
“아, 그랬던가? 이거 나이를 먹으니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군. 허허헛.”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화를 나누며 ‘그럴 수도 있죠.’ 따위의 대답과 함께 하하 호호 웃는 셀레비안과 라베리 씨와 달리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씨발 이래서 장생종하고는 대화하기가 겁난다니까. 이 어르신들 대체 나이가 몇인 거야?
“매 번 한 세기를 못 버티고 일을 바꾸길래 그때도 어김없이 그럴 거라 여겼었는데 말이야. 역시 삶이라는 건 항상 알 수 없는 법이지.”
이어지는 설명에 의하면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하다는데, 1354년이라는 기간을 듣고 나니 어딘가 나사 빠진 장인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드워프들이 태생부터 장인이자 건축가인 것처럼, 엘프들은 날 때부터 사냥꾼이자 숲지기다. 호불호가 철저하게 갈리는 탓에 엘프들이 그 긴 수명을 지니고도 드워프들의 기술을 종족 단위로 뛰어넘지 못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나도 드워프들의 나라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세 판타지 세계 속에서 홀로 아케인 펑크를 바라보는 수준이더라고. 최소한 엘프들의 마을이나 세계수의 영토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보지 못했으니, 이들의 친자연적인 행보에 변화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대장 기술에만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쏟아부은 엘프가 나왔다는데 어떻게 평범하게 대할 수 있겠어. 눈앞에서 이어지는 대화를 간간이 들어 보면 꾸준하게 드워프들하고 교류까지 할 정도라고 한다.
이들이야 같은 장생종이고 마을 사람이니 그냥 그게 좋은 갑다 허허허 하는 거지, 종족이 다른 내 눈에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엘프로 느껴진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그 분께는 매우 미안하고 죄송스럽지만 어쩔 수가 없다.
13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우물만 파는 고인물은 미친 걸로밖에 안 보여.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제가 엘드미아와 함께 뤼밍스의 대장간에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지난 회의 때 언질을 넣어 두었고, 매일 새벽부터 망치를 드는 친구니까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군요.”
“음, 그게 좋겠군. 우리 손님도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쉬어야지.”
어느새 내 방문일정까지 잡아버린 두 사람이 밝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예전에 센 일행과 함께 잠깐 오그웬에 들렸을 때 아실리에에게 들었던 말은 사실이었다.
푸른 넝쿨 부족 엘프들은 술을 매우 좋아했다.
◈
푹 쉬어야 한다는 말이 사실은 술로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술잔을 기울인 끝에 겨우겨우 엔데리니아 가문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나는, 잠들기가 무섭게 지독한 숙취와 추위 속에서 눈을 떠야 했다.
처음엔 라베리 씨하고만 대작對酌하고 끝날 것 같았던 술자리는 내가 생각보다 술을 잘 마신다는 이유로 셀레비안에게로 바통이 넘어갔고, 이내 점점 술기운이 오른 다른 엘프들까지 합류해 대환장 파티가 되어 버렸다.
고상하고 고고한 엘프? 그런 엘프가 어딘가에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최소한 푸른 넝쿨 엘프들은 그런 편견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차라리 바이킹에 가까웠다. 나중엔 술 잘 마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근하게 구는 이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얼핏 뒤에서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홀짝이는 라베라 씨의 모습이 보였던 거 같은데, 아마도 맞을 것이다.
셀레비안에게 자리를 넘길 때 비척이던 모습이 전부 다 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다른 엘프들과 친분을 나눌 자리를 마련해준 거니까.
“우웁.”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심적인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거고, 숙취로 고통받는 현실과 육체의 기분은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원래는 느긋하게 아실리에가 쓰던 방도 구경하고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감성에도 젖어보고 싶었는데 그딴 흉내를 낼 겨를이 없다.
분명 어제 집까지는 셀레비안과 함께 잘 걸어왔던 기억이 있는데 왜 이리 고통스러운가 기억을 되짚어보니, 엔데리니아 가문 사람들과의 2차 술자리가 벌어진 게 화근이었던 거 같다.
막내인 아미에 씨조차 40세였기에 모든 가족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부어라 마셔라를 시전한 끝에 거의 초주검이 되어 방에 기어올라오다시피 한 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며 입안에 맴도는 알콜 냄새에 역겨움을 느끼는 찰나, 점잖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사위. 깼는가?”
매우 매우 부끄러웠지만, 아르웰 씨의 반응을 보아하니 필름이 끊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게 분명했기에 난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장인어른. 방금 막 일어났습니다.”
술이 웬수지 진짜. 나도 간만에 맛이 갈 정도로 마셔서 아르웰 씨의 유도 심문에 그대로 넘어가버린 결과였다.
‘자네! 그 귀걸이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그뤔요… 쉘레비안이 말해줬습뉘다…’
‘우리 아실리에 잘 지켜 줄 수 있지, 사위!’
‘말해 뭣하겠습뉘까… 제 목숨보다 소중히 대하겠습뉘다 장인어른…’
씨발.
차라리 기억이라도 안났으면. 실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술 마신 상태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은 아니었다.
비척이며 침대에서 일어나니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아르웰 씨가 흐뭇한 얼굴로 깊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 하나를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될걸세. 술을 참 잘 마시더군.”
“안 그래도 평소보다 많이 무리한 것 같아 힘들던 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맨정신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오늘 뤼밍스의 대장간에 간다지? 셀레비안도 지금 막 일어나서 준비 중이라네. 아내가 숙취에 좋은 국물을 우려내고 있으니 힘들어도 좀 먹지.”
정말 정말 거절하고 싶은 제안이었지만, 이번엔 호기심에게 패배했다.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엘프들은 대체 뭘로 해장하는지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결국 어찌저찌 반응하며 아르웰 씨와 함께 방을 나선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향이… 매우 좋네요.”
“하하하. 너무 그렇게 띄워주지 말게나. 야채만 들어간 멀건 국이라고 싫어할 수도 있다네.”
엘프들이나 먹는 음식이라는 아르웰 씨의 말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난 이것과 비슷한 냄새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도 안 나는 2층 계단을 내려가 식당으로 들어서니, 나 못지않게 죽상을 쓰고 있던 엔데리니아 가문의 형제 자매들과 셀레비안이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어제의 술자리로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먹고 나면 한결 편해질 테니 조금이라도 먹도록 해요.”
그렇게 말하며 아내인 히미르 씨가 준 그릇에 담긴 맑은 국을 본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맛있을 것 같네요. 잘 먹겠습니다.”
내 눈앞에 놓인 건 비주얼도, 냄새도 영락없이 콩나물 국 그 자체였다.
숟가락으로 떠 먹어보니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났지만 얼추 맛도 비슷했다. 왕국에서는 기분 나쁘게 생겼다고 안 먹는 인간이 수두룩한 식재료에 속했는데 말이야.
너무 정겨운 나머지 숙취의 고통조차 잊은 채 두 그릇을 해치우고 나서야 나는 셀레비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1354년 경력의 대장장이에게로 향했다.
부디 정상적인 사람이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