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368)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68화(368/599)
새벽이 밝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 뤼밍스는 언제나처럼 가벼운 운동과 함께 아침을 시작했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단 하루도 빼먹지 않은 탓에 이젠 오히려 안 하면 어색한 운동은 적당히 몸을 데워주었고, 밤 동안 흐리멍덩해진 감각도 일깨워줬다. 이내 만족스러울 정도로 몸이 풀린 것을 확인한 뤼밍스는 어젯밤 미리 준비해 둔 빵을 주워 먹으며 천 년을 넘게 똑같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대장간으로 향했다.
일일이 물을 길러 오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계곡 근처에 자리 잡은 대장간은 마을과 거리가 있는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가장 뤼밍스의 마음에 드는 지리적 이점이었기에 이 정도 수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큼직한 빵을 다 먹을 때 즈음 도착한 대장간에 들어서자마자 피부로 느껴지는 온기에 뤼밍스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이제 슬슬 겨울인가.”
평소보다 화로의 불길이 약하다. 하루 이틀이면 모르겠지만 최근 계속 이러는 걸 보니 확실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뤼밍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망치만 휘두르느라 시간 감각이 깨져버린 그녀에게 있어, 1년이 흘렀다는 알림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부질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이길지, 내가 이길지 모르겠지만 이번 한 해는 내가 이겼군.”
실없는 혼잣말을 하며 한 차례 낄낄거린 뤼밍스는 화로에 마나를 주입하고 쇠를 두드릴 준비에 들어갔다. 조수 한 명 없이 홀로 움직임에도 아무런 막힘도 없었다. 거기엔 뤼밍스가 쏟아부은 세월도 있겠지만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드워프들의 기술력도 크게 한몫했다.
“쇠를 섞고 인생과 싸울 시간이군”
오늘은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까. 화로가 마도 연금을 활용하기에 알맞은 온도까지 예열되는 동안 잠시 턱을 괴고 고민에 들어간 뤼밍스의 귓가에 잡음이 들어왔다.
이제 막 상념에 빠지기 전에 방문객이 와서 다행이라고 여겨야할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왔다는 점에 귀찮음을 느껴야할지 감을 못 잡던 뤼밍스의 머릿속에 불현듯 엊그제 있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아, 촌장이 말했던 인족인가.”
동족을 괴롭히던 사냥꾼을 처단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수에 기도를 올리고 계시를 듣는 과정에 들어가기까지 한 인족에게 나름의 성의를 보이고 싶다는 촌장의 부름에 걸음을 옮겼던 게… 어제였나? 사흘 전이었나?
대충 적당히 흘려 들었던 탓일까.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그 특이한 업적은 높이 살만 했기에 데려오면 쓸 만한 걸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났다.
어쨌건 예정된 방문이라는 말이었다. 세계수께 신탁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인족이라면 방어구 하나 만들어 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뤼밍스는 찡그리고 있던 미간을 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진 방문자들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김없이 새벽부터 움직이는군 뤼밍스.”
500년 정도 전에 확립된 대륙 공용어라, 역시 손님이 함께 온 게 맞았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정 이상할 경우 셀레비안이 알아서 통역해 줄 거라 믿으며 뤼밍스는 입을 열었다.
“나도 방금 온 참이야. 걸음걸이가 평소같지 않은데? 과음했어?”
“이 친구가 술을 꽤 잘 마시더라고.”
하하 웃으며 툭툭 어깨를 치는데, 갑옷 위를 치는 것이 아님에도 꽤 탄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인족은 오러를 맹신해서 육체 단련을 등한시 하는 편이었는데 세상이 변한 것일까?
뭐…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면 변했어도 이상할 건 없겠지만.
“그 코찔찔이 아실리에가 남자를 잡았다길래 어떤 인족일지 궁금했는데, 꽤나 건실한 친구를 잘 잡았나 보군. 인족답지 않게 단련을 잘했는걸.”
작업 준비를 하느라 지저분해졌을 손을 닦으며 방문자를 향해 걸어가자 셀레비안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반응했다.
“여전히 파악이 빠르구만. 나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무려 인간의 영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도 무사히 걸어 나오는 인물이라네.”
“…영지?”
“그렇다네. 귀 사냥꾼의 뒤에 있던 백작이었지.”
…진짜 세상이 변한 건가?
뤼밍스의 기억 속에서 ‘귀족의 영지’ 라고 불릴 만한 곳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심지어 백작이면 나름 세력이 있는 자일 터, 직접 운영하는 영지라면 못해도 오러 익스퍼트에 달하는 기사가 최소 둘에 영지의 병력도 백 명은 됐었다.
목책을 세우든, 돌로 된 외벽을 세우든 거점을 잡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는 기본 중의 기본. 오러 마스터 급에 도달했다거나 기사들과 비슷한 수준의 전사가 빈틈을 노리고 야습을 시도했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눈앞에 있는 방문객에게는 그 정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자네가 이곳에 틀어박힌 사이 세상이 바뀌었냐는 질문을 ‘또’ 하고 싶은 거라면, 지금은 아니라고 하겠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백작의 영지가 맞거든.”
“허, 대단하군.”
셀레비안에게 허언증이 생기지 않은 이상 여기까지 와서 저런 걸 농담이랍시고 던질 이유는 없었다. 그랬기에 뤼밍스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방문자에게 악수를 건넸다.
“솔직히 적당히 만들어 주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셀레비안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을 달리해 보는 게 맞겠는데? 뤼밍스라고 한다.”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그, 실례가 안 된다면 뭣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셀레비안의 말대로라면 실력이 좋은 편에 속한다는 건데, 그런 것 치고 퍽 예의가 바른 인족이었다. 살짝 당황했는지 목소리에서 티가 났지만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긴 것인지 황급히 수습하려고 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랬기에 뤼밍스는 간만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방문자가 질문하고 싶어 하는 것을 미리 말해주었다.
“장님 대장장이는 처음 보나?”
◈
아무런 적의없이 부드럽게 농담던지듯 말하는 뤼밍스라는 여자 엘프의 말에 난 움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걸 떠나서 보게 될 거라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데요.
진심으로 당황해서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집어삼킬 수 있었던 건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물론 칭찬받기 위해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쌍놈이 될 수도 있었기에 다물어야 했지만 말이다.
움직임에 아무런 주저도 없을 뿐만 아니라 두 눈동자 역시 멀쩡하게 빛나고 있었기에 처음엔 사시斜視 같은 건 줄 알았다. 아니면 정신병이 있어서 사람하고 똑바로 마주하지 않는다거나 뭐 그런 건 줄 알았지.
미묘하게 나에게서 살짝 어긋난 방향을 향해 악수를 건네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확신이 섰다는 점에서 이미 이 엘프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1300년 넘게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는 것부터 범상찮은 인물이긴 했지만, 나는 방금 그녀가 앞에서 보여 준 일련의 행동들을 모두 보고 난 뒤인지라 그 정도는 충격 축에도 속하지 못하는 게 되어 버렸다.
“불을 좀 많이 보고 살아온 탓이지. 고칠 방법이 없진 않은데, 마을 밖으로 나가질 않으니 딱히 불편할 게 없어서 그냥 지내는 거야. 너무 당황하지 않아도 돼.”
더 놀랄 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기서 한 번을 더 꺾어 버리시네.
치료할 수 있는데도 냅두고 있다고? 내가 어이가 없어서 셀레비안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모든 설명을 끝마쳤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이거지. 역시 1300년 동안 한 우물을 판 엘프답다. 정상이 아니군.
겨우 여자 대장장이 엘프라는 사실에 놀랐던 수십 초 전의 나에게 세상은 더 넓고 놀랍다며 비웃어 주고 싶을 정도다.
“실례했습니다.”
“별로? 너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편에 속한 이들 중에서도 최상급 반응이었으니까.”
우악스러운 악수에서 느껴지는 힘은 절로 사람을 긴장시키고 등줄기가 뻣뻣해지게 만들 정도다. 옷을 걸치고 있었음에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상체 근육은 장식이 아니었다. 일단 애써 웃으며 손아귀에서 손을 풀려고 했는데, 그녀의 힘찬 악수는 짧게 끝나는 대신 묘하게 의문이 담긴 표정과 함께 계속 이어졌다.
“너무 젊은데? 느낌 상 스물도 안 됐을 거 같은데, 맞아?”
“…열… 다섯…입니다.”
사실 장님이 아닌 게 아닐까? 날 놀려 먹으려고 장님인 척 하고 있는 거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빨리 셀레비안이 신호를 줬으면 좋겠다. 팔뚝에 오소소 하고 소름이 돋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음으로써 내 가설을 전면 부정했다.
“세상이 바뀌었나…?”
아까 셀레비안의 반응도 그렇고, 천 년 넘게 마을에만 있다 보니 저게 일종의 말버릇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표정과 달리 날 잡아 끈 뤼밍스는 과감하게 내 팔뚝과 어깨를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그 아귀힘이 장난이 아니다. 이거 정말 단순히 대장장이 일만 해서 생기는 게 맞나? 워낙 짬 차이가 많이 나서 알 수가 없네. 매우 진중한 표정으로 만져대는 탓에 불편하거나 불쾌할 틈도 없는 사이 그녀가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흠, 이상하네? 마력으로 발달하는 마족들이랑 흡사한데. 인족 맞아?”
아직 그대로 손이 맞닿아 있는 상태였기에,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움찔거리는 것까지 참아야 했다.
그건가?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한다는 그거? 그게 1300년 가까이 이어지면 이렇게 되는 건가?
눈 안 보이는 게 안 불편하다는 말이 저절로 납득되는 수준이다.
“…일단 부모님은 인족이셨는데요.”
“…재밌네. 나랑 간단하게 대련 좀 해볼까?”
“대련이요?”
“그래, 대련.”
아무리 그래도 장님이랑 대련하는 건 조금 심리적으로 거리낌이 있다는 말은 나오지 못했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대장간으로 돌아간 뤼밍스가 검집도 없이 늘어져 있던 십수개의 검 더미 속에서 두 자루를 대충 집어 그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그녀의 손에는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 정도면 네가 쓰는 무기랑 비슷하지? 나도 초짜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이 짓하기 전에 대충 80년 정도는 휘둘러봤거든.”
게다가 건네준 건, 내 검과 길이 뿐만 아니라 무게 중심마저 흡사한 검이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안겨 준 충격 속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뿐이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은둔 고수인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