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373)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73화(373/599)
기나긴 행렬 속에서 자신을 피멜이라고 밝힌 용병남은 아주 훌륭한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생긴 건 정말 전형적인 간신배와 소인배를 섞어 놓은 것 같았지만 그는 내가 만났던 용병과 모험가들 중에서 상위에 들 정도의 지성인이었다. 심지어 내가 정중하게 동행을 거절했음에도 훅 가 버리는 게 아니라 기왕 이렇게 된 거 잠깐 대화나 하자는 식으로 부드럽게 말을 이어가며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하고 호감도 작을 시도했다.
분명 사교에 능숙한 자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드문드문 뭍어나오는 예절도 그렇고 복식에 정성을 들인 걸 보면 어느 귀족의 사생아라던가 서자였을지도 모르겠다. 가문에서 재산을 배분받기엔 글러 먹었다고 여긴 이들 중 판단이 빠르게 선 자들 중에서는 아직 비호받을 때 열심히 군사학을 공부해 용병으로 전향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도끼 형씨는 예법에도 능통해 보이시는데? 혹시 귀족들을 상대로 전문 의뢰만 받는 모험가이신가?”
“그냥 몇 년 귀족의 저택에서 일한 적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거 아주 열심히 배우는 소년이었나보군! 아직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걸 보면 말이지. 그럼에도 이렇게 모험가 일을 하고 있는 거보면 역시 실력이 범상치않은 모양이야?”
은연 중에 치켜 세워주면서 정보를 뜯어 내려는 시도도 굉장히 자연스럽다. 멋대로 내 나이를 추측해 ‘아직도’ 라는 표현을 쓴 건 좀 웃겼지만 말이다.
그마저도 아예 대놓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의도를 드러내니, 그 표정과 달리 익살맞게 느껴져서 불쾌감이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열심히 배운 것에 비해 적응을 못 했을 뿐입니다. 어찌저찌 죽지 않을 정도로 운이 좋았을 뿐이죠.”
“겸손하기까지! 이거 정말 아쉽군. 우리 용병단에 필요한 귀중한 인재상인데!”
그리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흉갑에 새겨진 문양을 탕탕 두드려 시선을 유도한다. 도료를 써서 뭔가 본격적으로 새겨넣었다기보단 조악하게 망치와 정으로 어설프게나마 목이 꺾인 장미를 형상화한 문양은 짐짓 우스워 보였지만, 이 남자가 보여 준 모습을 보면 저것마저도 기억에 남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엔터테인먼트에 굉장한 재능이 있는 사람 아닐까?
“내 비록 변변치 않은 실력으로 협상이나 하는 입장이지만 우리 꺾인 장미 용병단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걸출한 인물들이라네! 저 푸른 올빼미하고도 수차례 전장에서 맞붙었지만 이렇게 멀쩡히 살아 숨쉴 정도지!”
허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왔기에 살짝 놀랐다. 피멜은 그걸 감탄으로 해석했는지 한껏 웃으며 동료들의 영웅담을 재치있게 떠들었고, 난 그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입담에 감탄하면서도 푸른 올빼미 용병단에 대한 평가를 살짝 수정했다.
나름 괜찮은 용병단 수준을 넘어서 굉장히 능력 있는 용병단이었구나. 다른 용병단에서 그들과 전투한 걸 자랑으로 삼을 정도라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뜬금없이 흥미가 동할 이유는 없었기에 거절했다. 피멜도 이미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광고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마친 뒤엔 혹시라도 생각이 있거든 꼭 찾아오라며 자신들이 묵을 예정인 여관의 이름을 알려주고 원래 있던 무리로 돌아갔다.
그 장황한 입담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 덕에 줄은 어느새 코앞까지 줄어들든 상태였다. 설마 이 타이밍까지 계산해서 말을 한 건가? 참 대단한 사람이네.
뭐, 꺾인 장미 용병단의 단장이 천상의 미모를 지닌 여전사네 뭐네 하는 이야기는 쓰잘데기 없었을지언정 내가 없는 사이 주변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는 얼추 알게 되었으니까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지고 내 차례가 되자 한참 앞에 있던 용병단의 짐들을 살피느라 지친 경비가 힘들게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신분증.”
다른 경비들과 달리 투구에 벼슬이 달린 걸 보아하니 그가 경비조장인 모양이었다. 미리 여권 꺼내듯 준비해 놓은 모험가 패를 건네줬는데, 정작 내가 내민 모험가 패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경비병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며 말을 이었다.
“모험가 패만으로는 안 되는 걸 알잖나.”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예기치 못한 반응에 얼빠진 내 표정을 본 경비조장이 투구 속을 긁적이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젠장, 의뢰 때문에 오래 나가 있었던 건가? 얼마나 오랜만에 돌아온 거지?”
말하면서 초소 안으로 들어가 두툼한 종이로 된 책자를 펼치는 그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으나 나는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했다.
“아마 3주? 4주? 정도는 된 거 같은데…”
“제기랄, 거의 한 달이잖아? 이건 남아 있지도 않겠군.”
고개를 내저으면서 다른 경비에게 책을 부탁한 그가 잠깐 투구를 벗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동안 도시에 일이 있어서 출입 검사가 엄격해졌다. 원래대로라면 네가 밖으로 나갈 때 별도의 증명서를 발급받았어야 하지. 미안하지만 이건 예외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받았던 의뢰 담당자에게 검증받거나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와야만 해. 혹시 그럴 수 있나?”
행동과 달리 목소리는 차분한 걸 보아하니 자신의 업무에 참으로 충실한 남자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말한 것들 중 어느 것도 제시할 수 없었기에 난 멍청하게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다.
“그,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가 좀 특수해서…”
“특수? 어떻게?”
“제가 마지막으로 받은 의뢰가 수도 모험가 길드에서 발급된 의뢰거든요.”
내 말을 들은 경비조장과 이제 막 책을 놓고 나온 경비 모두 의문으로 표정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시기에 수도에서 의뢰 받은 놈이 이티스엘 동부 끝자락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심지어 다른 경비들은 의문에서 그치지 않고 슬쩍 창을 고쳐쥐었기에 나는 오해를 줄이고자 차분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는 수도 인근에서 있었던 오크 사태에 엮인 피해자입니다. 당시 오크들이 타고 넘어왔던 게이트에 휩쓸려 서부 지대까지 날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죠.”
내 대답에 나와 대화하고 있던 경비조장의 미간이 확 일그러지고 다른 경비들은 대놓고 자세를 잡으며 창을 들었다. 뭔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경비조장과 달리 다른 경비들의 얼굴에는 이미 불신을 넘어선 적대감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이런 씨… 그걸 지금 믿으라고? 겨우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서부 지대에서 동부까지 가로질러 왔다는 말을?”
“그건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서…”
“엘프으?”
씨발.
팩트만 말하고 있지만 나였어도 기가 찰 내용이긴 하다. 덕분에 경비들은 아예 대놓고 내 말을 무시한 채 포위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반응에 지랄하고 싶진 않았다. 충분히 정상적인 반응이니 설득하는 게 지금 내가 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내 앞에 있던 경비병이 손을 들어 다른 경비들을 제지했다.
“…게이트에 휘말렸다고?”
“예.”
“이름은?”
“엘드미아 에가입니다.”
“…모험가 패.”
아까 넘겨 주려다가 말았던 모험가 패를 다시 건네주자, 그 뒤에 적힌 내 인적 사항을 읽은 경비조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험가 패를 돌려주고 투구를 썼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더니 어안이 벙벙해진 다른 경비들에게 창을 물리라는 듯 손짓한 뒤, 진지하면서도 정중한 태도로 각 잡힌 경례를 선보였다.
“이상 없습니다. 지나가시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내 뒤쪽으로는 침묵이, 경비병들 사이에서는 경악이. 그 너머의 행인들에게서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와중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경비병들이 다급하게 경례했고, 난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비조장은 매우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어조로 내게 설명했다.
“수도 방위에 앞장선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 오크 게이트 사건을 진두지휘하신 즈위네라 공작 각하께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에가 님의 귀환을 확인하는 즉시 최고 지휘자를 통해 보고 드려야하는바, 부디 저희 경비대와 동행하여 영주 성에 방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느 정도 조치를 취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아무래도 레스롬 영감은 굉장히 치밀하게 준비한 모양이었다. 무엇보다도 거창하게 소리치지 않고 최대한 조용히 대응하는 게 아주 내 취향이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2 경비대, 즉시 3 경비대와 교대한 뒤 호위 임무로 전환한다. 조용히 움직이도록.”
“아, 알겠습니다.”
조용히 움직인다고 해도 갑작스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경비들은 충분히 주위의 시선을 끌만한 광경이었다. 앞뒤로 쏟아지는 시선에 순간 투구라도 꺼내 쓸까 고민했지만, 되려 눈에 띌 뿐만 아니라 이런 이유로 내 장비에 대한 정보를 뿌릴 수는 없었기에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쏟아지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말에서 내려 걸어가기라도 하려고 했으나, 경비조장이 따로 손짓하자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골목 어귀에서 마차가 나타났다.
…설마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조차 알 수 없는 날 위해 모든 도시에 이런 준비해놓은 건… 아니겠지…?
혹시나 싶어 대체 이게 뭐냐는 시선을 보내자 경비조장이 더없이 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이날을 위해 공작 각하께서 미리 대절한 마차입니다. 타시죠.”
…맞나보군. 공작이니 돈이 더럽게 많은가보다.
결국 나는 아직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항구도시에서 마차에 올라, 경비대들의 절도있는 호위를 받으며 영주 성으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