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374)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74화(374/599)
나는 영주와 직접 대면한 뒤에야 이곳 항구도시의 이름이 이르미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노예가 주요 교역 상품인 바다 건너의 사막 왕국 라단의 배들이 정박하는 해상 교역의 요충지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당연히 내가 알고 싶어서 알게 된 건 아니었다. 왕명을 등에 업은 레스롬 공작의 지시로 한 달 넘도록 경계를 유지해 온 이르미즈의 영주는 날 굉장히 귀한 손님이라 여겼고, ‘잠깐’ 나눈 다과 시간 동안 자신의 가문과, 도시, 그리고 슬하에 있는 세 딸까지 자랑하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적당히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즉시 딸들까지 불러 동석시키고 약혼까지 상상할 기세였다.
그래도 그가 자꾸 라단 라단 거리며 왕국을 강조할 때마다 아버지 이름이 불리는 거 같아 좀 그랬던 걸 제외하면 아주 불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래 있을 이유 역시 없는 자리였기에 대충 형식적인 대화를 마친 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즈위네라 공작 각하께서…”
“각하는 제가 어떻게 움직일지 이미 다 알고 계실 겁니다. 괘념치 마시지요.”
영주는 여러 핑계를 대며 날 장기 체류 시킨 뒤 콩고물 하나라도 먹어보고자 했기에 정말 끝까지 엉겨 붙으려 했다. 마음 같아서는 애초에 얻어 먹을 것도 없고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믿을 리도 없었기에 최대한 칼같이 끊은 다음 성을 벗어났다.
여비로 쓰라며 찔러 주려는 돈마저 거절한 뒤 거리로 나오니 새삼 고향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대륙 공용어를 쓰는 건 서부 왕국 지대도 다를 바 없었지만 특유의 억양은 확실히 차이가 났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기에, 성에서 뜬금없이 걸어 나온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따위 가볍게 무시해주며 빠르게 숙소를 잡은 뒤 바다 구경에 나섰다.
밤중에 바닷바람으로 고통받고 싶지 않아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여관에 자리 잡은 탓에 발품을 좀 팔았지만, 그 과정에서 이것저것 노점상의 음식들을 사 먹었으며 정말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에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같은 이티스엘의 도시임에도 이르미즈의 분위기는 내가 본 도시들과 많이 달랐다. 라단과의 교역으로 많은 노예들이 오고 가는 탓인지 이곳 사람들은 노예를 부리는데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고, 여유가 있으면 무조건 노예를 부렸다.
문제는, 노예도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면 자유인이 될 수 있는 라단과 다르게 이르미즈는 그런 시스템까지 가져오지는 않았는지 노예를 아예 가축 수준으로 여기는 풍조가 매우 강하다는 점이었다.
당장 지금 적당한 곳에 앉아 항구를 구경하고 있는 내 눈에도 수많은 노예들이 족쇄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자아내며 뱃짐을 옮기는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거의 2분에 한 번 꼴로 그들의 머리 위에 채찍이 날아드는 중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노예 나빠! 자유 좋아!’ 따위를 외치며 정의감에 불탈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채찍 소리가 참 시끄럽다고 느낄 뿐. 전생의 도덕관이 많이 희박해진 것일지도.
그래도 딱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에 자리를 옮겨 가며 한참을 둘러보았지만, 어딜 가도 여유롭게 앉아 바다만 구경할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다른 항구도시나 구경가야겠다는 감상 속에서 내 항구도시 투어는 저무는 태양과 함께 살짝 씁쓸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
◈
묘하게 많은 시선을 받았지만 날 알아보는 사람들로 소란이 생기는 일 없이 편안하게 숙면을 취한 나는 아침 일찍부터 도시를 벗어나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로 향하기 위해 말을 몰았다.
분명 처음 숲에서 나왔을 땐 북부보다 참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겨우 하룻밤 자고 일어난 것만으로도 현지 적응이 되어 버린 것인지 새벽 공기가 적잖이 쌀쌀하게 다가왔다. 못해도 한 사흘은 따뜻하게 느껴져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 혼자 실실 웃으며 한참을 나아가니 아직 겨울 새벽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가득 깔려 있는 어두운 평원 반대편에서 일렁이는 횃불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딱히 습격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놈들이 먹잇감을 찾아 움직이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기도 했고 움직임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모험가로 보이는 일행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화색이 되어 말을 걸어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도시에서 오시는 길인가요?”
하나의 횃불에 의존해 걸어온 네 명의 모험가들은 전체적으로 어렸다. 그리고 굉장히 전형적인 파티 구성을 하고 있었다. 전사에 마법사, 성직자에 궁수라는 용사파티 말이다.
심지어 전사 한 놈을 제외하면 죄다 계집애들이다.
“예. 맞습니다. 그쪽이 말하는 도시가 이르미즈를 말하는 게 맞다면 말이죠.”
명확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장비도 그렇고 아마 신출내기 모험가인 듯했다. 그것도 아주 피로에 찌든 신출내기 모험가.
어쩌면 피멜이 말했던 오크 잔당을 잡기 위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인 모험가일지도 모르겠군. 그런 판단을 내리며 반응을 살펴보니 세상 감격에 겨워하며 저들끼리 신나 떠들기 시작한다.
“세상에! 드디어!”
“진짜 이번에도 지도 잘못 봤으면 때려 죽이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좀 똑바로 배우라고 했지!”
“나, 나만 배워? 너희도 똑같이 잘 안 배웠으니 이런 거잖아!”
…아무래도 오크를 잡으려고 나왔던 건 아닌 모양이다. 지도도 못 보는 애송이들 넷이서 오크를 잡을 수 있을 거 같진 않다.
아직 어린애들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리다고 목숨 안 잃는 것도 아닌데 참 헤이한 정신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조금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말았다.
“아, 아앗. 실례했습니다. 저희가 좀 많이 헤맸거든요.”
그걸 눈치챈 전사놈이 버벅거리며 내뱉은 말에 난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혹시 밤눈 어둡습니까?”
“에, 예?”
“밤눈 어두운 거 아니면 그 횃불부터 끄는 게 나을 겁니다. 이 정도 어둠은 익숙해지면 어지간한 건 다 보일 정도로 밝은 거니까요. 오히려 어중간하게 빛에 의존하니 지금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왼쪽에서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조금만 집중 한다면 저런 횃불없이도 멀쩡하게 주변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광원이 있는 시간대였다. 저들의 꼴을 보아하니 길을 잃었다는 불안감과 밤 중 무리한 강행군을 펼친 탓에 잔뜩 긴장해서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나보다.
하도 답답해서 늘어놓은 내 지적에 전사놈은 어버버하고, 다른 계집 셋은 어중간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길을 잃으면 밤에 움직이지 말고 아침까지 기다리십시오. 아침에도 못 찾던 길을 밤에 막무가내로 걷는다고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인근에 오크 잔당이 퍼져서 용병단까지 움직인다는데 그대로 길을 잘못 들었다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오크들과 마주쳤으면 당신들 다 죽었습니다.”
“그, 그쪽이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요!”
“피, 피냐!”
딱 봐도 마법사인 꼬맹이가 당돌하게 외치자 주변에서 기겁을 하며 만류하는 꼴이 우습기보다 그냥 재밌었다.
세상에, 이런 애들이 진짜로 있긴 하네. 멋모르고 던전 들어갔다가 고블린들에게 뚝배기를 까이는 완벽한 고문관 조합이다.
“길 가던 사람에게 당장 처한 위기의 해답은 듣고 싶어 하면서 앞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는 이야기는 자존심 때문에 걷어찬다는 발상부터 글러 먹은 겁니다. 뭐, 방금 내가 한 말에서 이상한 것도 눈치채지 못한 수준이니 기억한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 살지는 모르겠다만.”
“…무슨…?”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오크들과 마주쳤으면 너흰 다 죽었다고.”
의아함이 잔뜩 담긴 시선을 보내는 전사놈에게 손짓하자 녀석은 멀뚱멀뚱 눈을 뜨면서도 순진하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횃불을 달라고 추가로 손짓하니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 순순히 횃불을 건네준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원.
“하아… 너넨 진짜 운 좋았다.”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더 말할 게 없었기에 난 저 멀리 오른쪽 숲쪽을 향해 횃불을 집어 던졌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전사놈은 아니었다. 어김없이 피냐라는 고문관 꼬맹이가 지른 외침이었다. 심지어 이 꼬맹이는 거기거 그치지 않고 내가 던진 횃불을 주으려고 냅다 달려갔다.
“쟤 때문에 횃불을 들고 다녔구만. 겁 많고, 생각도 짧아. 마법은 제대로 쓰나?”
“꺄아아악!!”
물론 그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거기로 횃불을 던진 이유들이 횃불 빛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까.
“꾸, 꾸이익! 꾸익! 꾸익!!”
“오, 오크야!!”
허겁지겁 자빠질 기세로 몸을 돌려 돌아오면서도 제 모자와 지팡이만큼은 제대로 챙기는 걸 보니 정신머리를 완전히 놓고 다니는 애는 아닌… 게 아닌가?
이 와중에도 바락바락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최악의 고문관인가?
뭐가 됐든 전사놈 일행의 얼굴에 절망이 내려앉은 건 똑같았다. 열 마리 정도의 오크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쟤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 했다.
“꾸익! 이, 잉간! 무기 버려라! 그럼 다 주겨 주마!”
“머저리! 하나만 살려 준다다!”
“꾸익? 그, 그러타! 하나 살려 준다!”
오크놈들도 골때리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던진 횃불을 한 놈이 냉큼 움켜쥐니 대여섯이 그 주변으로 다가가 온기를 쬐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니 동물 가죽을 좀 많이 껴 입고 있긴 했다. 대초원보다는 여기가 더 추워서 여러모로 고생하는 모양이다.
과연 저놈들이 끝일까? 용병단을 대대적으로 고용할 정도니 그럴 리가 없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른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당장 저것들을 싹 다 죽이더라도 이 한심한 꼬맹이들이 내가 말을 타고 수십 분을 지나온 길을 따라 도시로 향하다가 죽을 가능성이 넘친다는 의미다.
생판 모르는 남이지만, 얘들로 인해 오크 새끼들이 득을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았았다.
판단을 끝낸 나는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일단 다가오는 놈들이 볼 수 있게 안장에 걸어줬던 도끼를 꺼내 들었다.
“카쿨라 따라서 하늘의 대초원으로 가고 싶은 새끼들부터 덤벼.”
오크들이 갸웃거리고, 방금 전까지 공포에 떨던 전사놈 일행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러는 이유는 전혀 달랐다. 오크들은 도끼를 보고, 꼬맹이들은 날 보고 있었으니까.
‘대체 왜 저 도끼가 여기 있지?’ 라는 반응과 ‘이 인간은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지?’ 라는 시선을 받고 서 있길 수십 초.
오크놈들의 단추 구멍 같던 눈이 횃불의 빛 속에서 주먹만하게 커졌다.
“뀌, 뀌이이이익! 엘두미아 에가다! 엘두미아 에가가 대족장 카쿨라를 죽이고 도끼를 드렀다!”
“마, 마, 말도 안댄다! 대족장과 가치 문 너머로 사라져썼는데!!”
“번개다! 어제 친 번개를 타고 도라온 거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아직도 자연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준이… 아닌가? 여기는 진짜 가능성이 있을지도?
“뀌이이이익!! 전쟁신이 지키는 잉간드리어따! 도망처!”
그래도 천하의 개쫄보 상태인 놈들이라 그런지 효과는 확실했다. 들고 있던 횃불마저 집어던지고 숲속으로 사라져가는 오크들을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꼬맹이들이 그대로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잘 기억하십시오. 너흰 잘못된 판단으로 오늘 한 번 뒈진겁니다.”
저 오크 새끼들이 저들끼리 소문을 낼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건 지들 운이지 뭐.
난 여전히 얼빠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꼬맹이들을 뒤로한 채 다음 도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