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383)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83화(383/599)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 것도 없었기에 길드에서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자마자 나는 귀족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 과정에서 번거로운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다. 귀족원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내를 받고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 버린 레스롬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는 과정이 되려 너무나도 자연스럽다는 게 어색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찜찜함을 버리지 못했지만 그의 방문을 열 때까지도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순간 겨우 수도 안에서조차 그런 걸 걱정하는 내 신세가 좀 웃겼지만… 그런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어쨌든 내 얼굴을 마주한 레스롬 공작은 무언가를 적던 걸 멈추고 예의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 한 잔 하겠나?”
“…예.”
“아주 좋군. 추운 날에 어울리는 찻잎을 어제 막 들였네.”
나름 열심히 오가토르프 저택에서 일했음에도 기온 따져가며 차를 마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그렇다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길드에서 질리도록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왔지만 말하다 보면 목이 마르는 건 변함없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이제와서 이상한 걸 넣을 양반같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는 사이 레스롬 공작은 매우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능숙한 동작으로 차를 준비하며 물 흐르듯 돌직구를 던졌다.
“자네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굳이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 없겠지. 따로 궁금한 게 있나?”
내가 돌아왔을 때를 대비한 대책을 왜 세웠는지, 어떻게 날 보고 놀라지 않았는지 등등은 다 부질없는 질문이긴 했다. 왕실과 함께 움직이는 공작이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랬기에 나 역시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제가 뭘 받게 되는 겁니까?”
“걱정 말게. 훈장이니.”
말이 잘 통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잘 통하면 조금 무서울 정도다. 저 ‘걱정 말게’ 가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도 명확했으니까.
“은 방패 훈장이라는, 수도 방위와 관련된 공을 세웠을 때 얻는 훈장 중 하나일세. 화려하지도 않고, 주로 군인들이 패용해야 하다 보니 크기도 거추장스럽지 않지. 하지만 수도를 지켰다는 확실한 상징성을 지녔기에 희소성이 있으며 그만큼 명예롭다는 인식도 있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네. 요즘 자네 흉내 내는 사람들이 참 많다지?”
전시라서 저렇게까지 온갖 정보를 쥐고 있는 걸까 아니면 공작이라는 위치가 저래야만 하는 것일까. 뭐가 됐든 줘도 사양하고 싶은 자리라는 생각을 하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칭을 하고 다니면 큰일 나겠군요.”
“교수형이지. 몇 명 죽고 나면 그런 무리들도 순식간에 사라질 걸세. 조금만 참아줬으면 하는군. 아, 혹시나 싶어 미리 말하지만 제국에서 어떤 걸 줄지는 우리도 모른다네.”
농담 반, 진담 반인 태도로 티 세트를 가져오며 말하는 레스롬 공작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찬가지의 태도로 대답했다.
“그거야 뭐, 설마 작위를 주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는 에스뮈에가 그런 걸 줄 리가 없으니 한 말에 가까웠지만, 그 대답에 웃음을 유지하고 있던 레스롬 공작이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야 다른 누구도 아닌 제 1 황녀를 구했는데 자네가 바라면 작위 정도는 그냥 주겠지.”
그리고 이어진 건 지극히 평범한 정론이었다. 순간 내가 사고를 잘못했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뇌 정지가 올 뻔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자넨 정말 수시로 감각이 어그러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군. 자네가 작위보다 훈장을 더 선호할 거 같아서 그렇게 추진한 게 불안해질 정도야. 혹여라도 나중에 작위를 받고 싶으면 그냥 말로 하게나. 서운하게 대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의도치 않게 요상한 불신을 심고 뻘쭘해져 버렸지만 다행히 레스롬 공작은 더 파고들지 않았다. 평소에도 워낙 기행이라 할 만한 일들을 저질렀으니 어쩌면 사고방식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엄연히 왕실의 감사를 담은 훈장이니 괜히 자네를 포섭하겠다며 번거롭게 하는 이들이 생기더라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걸세. 그리고 그건 비단 귀족원 뿐만 아니라 자네가 엔벨데를 직접 단죄했던 행동이 무슨 의미였는지 이해한 왕실 쪽 역시 마찬가지지. 덕분에 자네의 영웅적인 업적을 두고도 이용해 먹어보자는 담 큰 의견을 제시하는 이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네.”
이미 내가 뭘 궁금해할지 예상했다는 듯 포인트만 짚어서 설명해주는 레스롬 공작은 과연 능구렁이였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호의적이라 한들 같이 앉아 오래 이야기할수록 괜스레 불편해지는 사람이다.
“오히려 자네가 확실하게 의사만 내비친다면 성년이 되자마자 방랑 기사 서훈을 받게 한 뒤 한시라도 빨리 전장으로 보내는 게 어떠냐는 의견까지 나오더군. 어떻게 생각하나?”
적절하게 내가 원하던 반응을 보이는 귀족이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유예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할 일이 있기에 한동안은 경과를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할 일이라 함은?”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도 있고, 지인의 연구를 도와야 하는 것도 있어서요.”
굳이 구체적으로 말할 이유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적당히 둘러대자 레스롬 공작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와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 뒤로 레스롬 공작이 내놓은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적당히 호응하는 식의 ‘평범한 담소’를 나누기를 삼십 여분 정도 반복했을 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귀족원을 나오게 된 것이다.
‘자주 오게나. 덕분에 휴식도 가지고 말동무도 생기니 좋군.’ 이라는 평범한 인사말과 함께 나를 배웅해준 레스롬 공작의 미소 때문에 뭔가 당한 거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걸 제외하면 참으로 평화적인 결말이었다.
“…아 진짜, 왜 자꾸 뭔가 당한 거 같지?”
문제는 그래서 괜히 더 켕긴다는 거지. 애써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다가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결국 찜찜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역시 정치인은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차라리 빨리 멀어지고자 발걸음을 서둘러 발쿤 씨의 공방으로 향했다.
괜히 쫓기듯 서둘러서 예의 선물로 넘길 술을 사 들고 발쿤 씨의 공방에 도착하자 나는 엄청나게 환대받으며 산지 직송의 해산물처럼 즉시 발쿤 씨와 만나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 환대가 술 때문인 건 아니었다.
한 달 사이 내 이름이 퍼진 만큼 가게로 몰린 손님이 더 늘어난 게 원인이었다. 덕분에 이번엔 거의 모든 방어구를 무료로 뜯어 고치게 되었다.
“이거 이번엔 좀 험하게 굴렸나보군.”
“뭐… 좀 많이 돌아다녔죠.”
귀 사냥꾼과의 전투에서 상한 것도 있지만 실상 대초원에서 오크놈들을 상대할 때 생긴 자잘한 손상들이 컸다. 잠깐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이동하는 내내 오크 집단과 싸우다 보니 아무리 놈들이 별거 아닐지라도 깔끔하게 끝낼 수는 없는 법이더라고.
어느 정도 내 사정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던 발쿤 씨는 어떻게 굴렀냐고 물어보는 대신 다른 대장장이에게 넘겨 견적을 내보라고 건네줄 뿐이었다.
“용사도 데려온 마당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방어구 말고 뭐 더 필요한 건 없나?”
“딱히 사고자 하는 무구는 없습니다만, 혹시 그림자 발을 만날 방법이 있을까요?”
“그놈을? 왜?”
“지난번 받은 포션을 써봤는데 효과가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여유가 있을 때 몇 개 정도 사둘까 싶은데, 괜찮은 거래처가 따로 있는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결과적으로 좀 아깝게 써버렸지만 그림자 발이 준 파란 포션은 확실히 비싼 값을 하는 물건이었다. 배에 구멍나는 것에 비해 작은 상처들이었다고는 하지만 회복 후의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았을 뿐 더러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하나뿐인 목숨을 연명하게 만들어 준다는 메리트를 생각해 보면 서부에서 얻은 자금을 싹 다 털어도 아깝지 않을 수준이다.
하지만 알고봤더니 정해진 구매처 외엔 짝퉁의 위험성이 있다거나 효능에 차이가 있다는 식의 상황과 부딪치게 되면 뒷목 잡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위기에 처할 수 있으니, 되도록 그림자 발의 조언을 받고 싶었다.
“끄응… 원래는 일행이랑 움직이느라 잘 안 오던 놈이긴 한데… 돌이켜보면 최근에는 묘하게 자주 왔으니 가능성이 있으려나?”
의외로 그림자 발은 혼자 움직이지 않고 파티로 움직인다는 게 발쿤 씨의 설명이었다. 그의 척후 실력에 부합하는 파티라는 걸 봤을 때 자급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모험가들이 분명했다.
“어차피 이번에 자네 방어구 손 보려면 하루는 족히 걸릴 테니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도록 하지. 다짜고짜 자주 묵는 숙소를 알려주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말이야.”
지극히 합당한 발쿤 씨의 타협안과 별개로 방어구 수리에 하루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이번은 말이 수선이지 보강 작업도 같이 하는 거였다. 전투를 하면서 자주 닳는 부분을 철판으로 덧대고 알게 모르게 빈틈처럼 칼이 파고들 법한 부분에 사슬을 붙이는 작업도 작업이지만, 지금 대장간에는 휴식기를 맞이한 모험가들이 수선을 맡긴 물건들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보다 먼저 맡긴 사람들을 싹 다 제치고 먼저 봐준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갑작스러운 특혜로 인한 당혹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더니 발쿤 씨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자네의 명성 덕을 본 것도 있으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네. 그리고 다른 녀석들은 죄다 쉴 겸 맡기는 거지만, 자네는 항상 바쁘게 어딘가로 달려나가는 느낌이 강하잖나. 죄다 여유를 부리고 있으면 바쁜 사람 물건 하나 정도 먼저 처리해도 뭐라 하지 않겠지.”
내 행동이 그리 보일 정도인가? 라는 고민을 아주 잠깐 해 보는 것만으로도 답이 나왔다. 한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죽는 병에 걸린 것처럼 싸돌아다니긴 했으니.
이제는 정말 한동안 공부만 하면서 쉬지 않으면 몸이 축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