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388)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88화(388/599)
자폭성녀의 방문 이후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또다시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녀의 방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님이 에스뮈에의 방문 일정에 대해 언질을 주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화를 나눴던 것이 가장 큰 사건이었을 정도로 정말 오랜만에 맞이한 무난하기 그지없는 일주일이었다.
정작 내 몸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으으으, 인생…”
그런 일상에 감사함을 느껴야할 정도로 막장으로 굴러다닌 삶을 반추하면서 잠을 깬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추워지는 날씨에 치를 떨며 침대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끔찍한 근육통에 몸부림치며 일어나자 같이 자고 있던 라이카가 슬쩍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옆으로 누운 채 꿈틀거리며 내 움직임 반경 밖으로 이동했다. 이젠 정말 영락없는 개일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서 요물이 되어 버린 꼬락서니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창가로 비추는 햇살만큼은 더할 나위없이 쨍쨍한 아침이었다.
밤새 적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소량의 마석만 넣어 틀어놓았던 마석 난로는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내가 일어날 때면 항상 어중간하게 잠에서 깨 비척이던 아실리에가 없다는 사실에 신선함을 느끼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실리에가 기적적으로 일찍 일어난 건 아니고, 내가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눈 떴을 뿐이다. 이 역대급 늦잠은 어제 늦게까지 교수동에 남아 세네란이 남기고 간 조언과 스승님의 도움을 받아 조정한 방법으로 마력 기관에 손을 댄 여파였다.
출력을 올리는 게 아니라 효율을 조정하는 것에 불과했기에 후폭풍을 우습게 봤는데, 어처구니없게도 하루 두어시간 쪽잠을 자며 오크 놈들을 뚫고 싸웠던 대초원 때보다 심각한 피로와 근육통이 찾아왔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스팔트에 매장되어 있는 수도관을 교체하기 위해 아스팔트를 싹 다 박살 내고 다시 설치한 느낌이라고 할까.
…생각하고 나니 정말 적절한 비유같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기분이었으니.
그런 생각이나 하며 어기적 어기적 계단을 내려가자 마침 타이밍 좋게 커피를 내리고 있던 티에가 나를 보며 가볍게 인사했다.
“오늘은 늦게 일어나셨군요.”
“그러게. 누나는 나갔어?”
“길드에 용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남들은 여유 부릴 시기에 되려 묘하게 성실해진 아실리에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 정도 뭘 하나 구경하러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늦잠을 잔 탓에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아쉬움 속에서 티에가 건네주는 커피를 홀짝이며 정신을 차리는 동안 그녀는 마치 오늘의 일정을 보고하는 집사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예복은 미리 다려놓았습니다.”
“…우리 집에 다리미가 있던가?”
“샀습니다.”
실로 당당하게 대답하는 티에의 반응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이었다. 애초에 귀족이 아닌 이상 옷을 다려 입을 정도로 격식을 차릴 일은 평민들의 일상 속에 존재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안 샀던 물건인데, 오늘은 그게 무조건 필요한 날이었다.
“황실 사절단에서 보낸 마차가 곧 약속된 위치에 도착할 시간입니다만, 가볍게 식사라도 하고 가시는 게 어떠실련지요.”
“만나서 식사를 할 여유는 없겠지?”
“정석적인 관례를 거친다면 그럴 겁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유사 샌드위치를 내놓는 티에의 유능함에 다시 한번 고개를 주억거린 뒤 묵묵히 커피와 함께 식사를 마쳤다.
에스뮈에가 사절단을 이끌고 이티스엘로 넘어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예정보다 빠르게 방문하게 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사절단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깔끔하게 열린 걸로 봐선 다 예정된 일인 듯했다.
나도 아카데미에 있다가 입소문을 듣고 졸지에 셰릴과 함께 구경을 나갔었는데 장관이긴 했다. 폭죽을 터트리고 빵파레를 부는 일은 없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와 열을 맞춰 나아가는 호위들과 마차 그 뒤를 따르는 제국 군악대가 연주하는 제국의 국가國歌때문에 가슴이 절로 웅장해지는 퍼레이드 그 자체였다.
근데 마차가 오픈카여서 보는 사람이 다 추울 지경이더라.
주변에 잔뜩 펼쳐진 보호 마법과 성기사들조차 한 수 접고 갈 만큼 육중해서 파워드 슈트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갑옷을 걸친 흑기사 스무 명이 호위하고 있었으니 암살은 꿈도 못 꿀 환경이라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꼿꼿하게 정면만 바라보며 고고함을 유지한 채 털망토에 휩싸인 햄찌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나름 재밌는 구경을 했다고 만족하며 돌아온 내게 황실 사절단이 머물고 있는 거처로 방문해 달라는 공식 서한이 온 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내 집 주변이 괜히 시끄러워지지 않을 수 있도록 마차까지 다른 곳에 대기 시켜 놓겠다는 치밀함을 선보인 초대장 밑에 에스뮈에의 사인이 박혀 있었기에, 나는 순순히 준비하기로 했다.
비록 온몸이 뻐근하고 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나중에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몰랐기에 선택지가 없었다.
“파우치… 챙겼고, 구슬도 챙겼고… 바늘도 챙겼고.”
“설마 도끼까지 챙기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어… 음. 저건 테가 안나서 좀 그렇지.”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격식을 맞추려고 했기에 도끼 뿐만 아니라 라이카도 두고 가기로 했다. 정작 내가 일어날 때는 귀찮아서 꼼짝도 안 하던 녀석이 두고 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굴었지만 나중에 티에가 대신 산책을 시켜 주기로 했더니 금방 수긍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벗어난 내가 예정된 장소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심플한 마차 한 대와 함께 가벼운 장비만 갖춘 용병 같은 이들 넷이 말을 타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딱히 군기도 안 잡혀 있는 그들에게 시선이 쏠리는 일은 없었다. 저 정도는 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나조차도 그렇게 여기며 별생각 없이 보고 있었기에, 나는 그들이 내 앞에 서서 정중하게 말을 걸었을 때 살짝 놀라고 말았다.
“황실의 별을 구한 영웅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껄렁하기 그지없는 고용인 그 자체였던 이의 태도가 급변하며 격식에 맞춘 예를 취하는 걸 보고 나서야 그들이 기사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수 부대라도 되는 것인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에 미처 다 놀랄 틈도 주지 않으며 그는 정중히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마차 내부는 심플한 외부와 달리 매우 고급졌는데, 마석 난로라도 틀어놓았는지 문을 열자마자 포근한 공기가 와닿았다.
“이십 여분 정도 걸릴 겁니다. 편안하게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야 제국의 기사라면 제 1 황녀를 구한 사람에게 예를 갖추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작 내가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익숙하지 않다보니 라비엘 인근의 개척 마을에서 평기사 비스퀜테를 처음 만났을 때만큼 어색했다.
그래도 괜히 뻘쭘하게 버벅거리다가는 불필요하게 주변의 시선을 모을 수 있어서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더니, 마차 밖에서는 미처 보이지 않던 공간에 앉아있던 인물이 나를 반겼다.
“음, 아주 완벽하게 시간에 맞춰 왔구나.”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에스뮈에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차의 문은 닫히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중간한 자세로 서 있으면 다치지 않겠느냐.”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잠깐, 그럼 지금 밖에 있는 저 기사들이…?”
열심히 눈을 굴리며 일단 자리에 앉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에스뮈에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마치 이렇게 놀라는 모습을 기대한 것처럼 말이다.
“음. 여의 친위대 중에서도 실력 있는 이들로 선별한 이들이니라. 자신있게 평범함을 연기하겠다고 하던데, 어땠느냐?”
“감쪽같이 속았어. 오…”
오러를 볼 수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라는 말을 하려다가 이게 지금 마차라는 게 떠올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에스뮈에가 밝게 웃더니 슬쩍 내 쪽으로 다가와 옆에 앉으며 말해주었다.
“방음 마법도 걸려 있느니라. 이미 눈치챘겠지만 세간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는 용도로 제작된 마차라서 말이지. 그러니 일반적인 수준으로는 목소리를 내도 아무 문제 없느니라.”
“그거… 아주 다행이네. 아무튼, 오러라도 볼 수 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저분들이 예를 취하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어.”
“흐음, 그 정도인가? 어쩌면 한때 연기에 뜻을 두었다는 말이 마냥 농담이었던 게 아닐지도 모르겠군.”
대체 뭘 어떻게 하면 황실 친위대가 한때나마 배우를 꿈꿨던 것인지는 몰라도, 에스뮈에가 거기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신 아주 자연스럽게 내 팔을 안은 그녀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맑은 눈동자로 연신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선을 받는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군.
“어째 그사이 팔이 더 굵어진 것 같구나. 정말 북부의 전사들처럼 거대해지려는 것이냐?”
“누나도 심심하면 그런 소리를 하던데…”
“지난번에 셋이 모였을 때 이야기를 나눠서 여도 알고 있느니라. 하루가 멀다 하고 거대해졌다는데, 지금도 그런 것 같구나.”
최근엔 따로 근력 운동을 안 했던 거 같은데 실전을 자주 겪어서 그런가. 당장 떠오르는 그럴싸한 이유는 없었기에 조용히 있었더니 헤실헤실 웃던 에스뮈에가 갑자기 정색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니, 아니지! 여가 이렇게 기다리지 못하고 마차까지 타고 나온 이유는 이런 게 아니었다. 대체 성녀랑 무슨 이야기를 한 게냐!”
음. 솔직히 갑자기 표정이 바뀌어서 뭐 실수라도 했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 역시 하고 싶은 말과 물어보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대화 주제였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게 됐지만 결국 가장 적절한 서두는 정해져 있었기에, 나는 확신을 담아서 에스뮈에에게 말했다.
“걔 완전 미친년이야.”
그러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에스뮈에가 갈고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