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390)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90화(390/599)
에스뮈에에게 일방적으로 놀림당하며 도착한 곳은 수도에 살면서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화려한 저택이었다. 귀빈용으로 지어진 저택은 왕성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비싸디 비싼 수도 땅값따윈 개뿔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넓은 정원까지 딸려 있었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휑하니 뚫려 있는 마구간이 아니라 아예 건물 하나가 저택과 통로로 이어져 겨우 마구간과 저택을 이동하는 사이에도 외부로부터 습격을 받는 일이 없도록 구성된 골 때리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막말로 마차와 말만 있을 뿐인 축사가 우리 집보다 크고 좋은 석재로 제작된 건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넓은 저택과 부지를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수많은 사용인들이 분주히 오고 가는 탓에 비어보이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긴, 일반적인 귀족들조차 파티에 초대 받고 이동하면 스무 명씩 식솔들이 따라 움직이는데 제국의 황녀면 오죽할까. 머리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직접 그 스케일을 목도하니 감회가 새롭긴 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그대에게 제국이 줄 보상에 대한 이야기와 굳이 그대를 이렇게 부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호의가 분명한데 오히려 불편해질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집무실에 도착한 에스뮈에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자연스럽게 우리의 뒤를 따라온 노집사가 소파에 앉은 내게 서류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건?”
“보상안과 관련된 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적은 메모이니라. 그대에게 딱딱하게 공식 문서를 보일 이유도 없으니. 그래도 개요는 다 적혀 있느니라.”
뭔 소린가 싶어 살펴보니 에스뮈에의 필체로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된 회의록 같은 거였다. 처음엔 왜 이걸 굳이 보여주나 싶었는데, 다행히 내가 메모를 읽는 동안 에스뮈에는 가벼운 손짓만으로 노집사를 내보낸 뒤 조용히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여는 곧 제국이니라.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런 여를 구했으니 그대는 곧 제국을 구한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느냐?”
작은 체구와 귀여운 얼굴에 맞지 않게 실로 당당하게 엄청난 말로 말문을 연 에스뮈에는 노집사가 나가기 전 준비해 놓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미래를 지켰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 허나 안겨줄 감사와 보상이 그대의 숙원을 방해하면 본말전도이니, 가장 유용한 보상을 쥐어 주기 위해 많은 회의를 거쳤느니라.”
가장 처음 나왔던 제안은 작위였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이의를 제기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티스엘에서의 나는 평민이니 오히려 이 기회에 인재를 제국으로 데려오자는 의견도 있었던 모양이다.
“허나 지위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 이는 그대에게 족쇄가 될 게 분명했기에 여가 거절했다.”
종이에 적힌 ‘귀족 – 귀찮아짐’ 이라는 메모는 아마 저걸 의미하는 모양이군. 이어지는 온갖 보상안들도 대부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영지를 준다, 기사단에 입단시킨다, 일반적으론 엄청나다고 할 수 있는 특혜들이었지만, 하나같이 나를 묶어두려는 의도가 다분한 보상이기도 했다.
“그게 제국이 그대를 바라보는 관점이니라. 이 기회에 미리 언질을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열심히 적었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결국 회의록의 주된 내용은 보상도 보상이지만 이를 통해 나라는 인물을 어떻게 하면 제국이 품을 수 있는가를 두고 치열하게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일부는 이미 에스뮈에가 나를 호의적으로 여긴다고 확정짓고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별도의 접촉을 시도하려는 조짐이 있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죄다 사람을 시켜서 막아 버린다는 메모도 함께 적혀 있었지만.
“그대가 이티스엘에서 보인 돌발적인 행보를 자기들 편의대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아 애를 좀 먹었느니라. 신하들이 국가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좋게 생각하나, 그 자부심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려 죽으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내가 ‘이티스엘’에 불만이 있어 깽판을 치고 있으니 제국에겐 오히려 기회라고 여긴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 에스뮈에와의 연이 없었다면 제국인 여럿이 초상을 치렀을 게 분명하다.
이해는 됐다. 자기 건드린다고 귀족이고 뭐고 다 물어뜯으려는 놈이 있을 거라는 걸 감안하는 것부터 엄청나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우며 정신 나간 발상일 테니.
“그래도 신하들의 합당한 의견을 부당하게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최종적으로 정해진 보상을 여가 직접 수여해 상징성과 제국의 의사를 확실히 전달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니라.”
다른 메모들보다 아주 조금 더 크게 적힌 글씨엔 보기 편하게 동그라미까지 쳐져 있었고, 덕분에 그게 에스뮈에가 말한 보상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갑옷?”
“어차피 제대로 된 갑옷 한 벌은 갖춰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 무기는 이미 충분한 듯했기에 이쪽으로 방향을 돌렸느니라. 자금에 따라 성능이 달라지니 생색도 낼 수 있고, 상징성도 지니고 있으며 그대가 비명횡사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으니.”
비록 투구만큼은 보여줬던 것에 한참 못 미치니 의미가 없어졌다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스뮈에가 탁자 위에 있던 종을 울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이 열리며 시종 둘이 천 덮인 거치대를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수레에 얹고 굴리면 될 텐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품위 없다고 여긴 것인지, 완력으로 거치대를 들어 올린 두 사람은 조용하게 에스뮈에가 앉아 있는 소파 옆에 내려놓고는 신속히 방을 벗어났다.
“나름 유명한 장인에게 부탁하여 제작한 것이니라.”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뮈에가 천을 걷어내니, 거기엔 검푸른빛을 띠는 갑옷 한 벌이 놓여있었다.
정대칭으로 제작되는 일반적인 갑옷과 다르게 그녀가 준비한 갑옷은 비대칭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왼쪽 견갑보다 두드러지게 큰 오른 견갑. 좀 더 자세히 보니 비단 견갑 뿐만 아니라 오른팔의 갑옷은 팔꿈치 보호대부터 해서 전체적으로 왼팔보다 두껍다. 흉갑은 복부까지 내려오는 게 아니라 딱 갈비뼈만을 가리는 형태를 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허리를 숙여 땅을 짚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 관절식 철판과 촘촘한 사슬 갑옷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엉덩이를 비롯해 골반 부근을 보호하는 폴드fauld는 없었다. 대신 내 건틀릿과 비슷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허벅지 보호대가 일반적인 위치보다 조금 더 높게 자리 잡고 있다. 모양을 보아하니 군대에서 방독면 케이스를 허벅지에 찰 때처럼 가죽끈을 감아 고정시키는 듯하다. 무릎 보호대와 정강이 보호대 역시 너무 과도하게 꾸미는 것 없이 굉장히 수수한 형태로 효율성만 따진 디자인이다.
사실 투구도 상당히 멋 드러졌지만 이미 의미가 없었기에 딱히 눈이 가지는 않았다. 난 그렇게 한 차례 갑옷을 훑은 다음에야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에스뮈에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내 검술에 맞춰 제작된 거야?”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사실 완벽하게 맞춰 제작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대가 아카데미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기반으로 만든 건 맞지.”
애초에 특출난 검술을 쓰는 것도 아닌데 검술 맞춤형 갑옷이 다 뭔 소용인가 싶지만, 당장 갑옷이 살짝 비대칭인 것부터가 내 몸에 익은 습관과 연관있었다.
심장을 보호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보통 앞으로 나가는 건 오른쪽이 되거든. 하반신이야 보법에 맞춰 매번 달라진다 쳐도 상체를 쓸 땐 거의 고정에 가까운 습관이었다. 제국에서 지내면서 대련을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습관을 귀신같이 캐치해서 적용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런 내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은 탓일까,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에스뮈에가 내 케이프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자, 이제 오늘 그대를 부른 목적을 달성할 때이니라. 입어 보거라.”
“어? 어어…”
갑옷의 조정을 말하는 건가 싶어서 순순히 그녀의 손길에 따라 케이프와 외투를 벗은 뒤 갑옷을 입기 위해 준비했다. 그러자 혼자서 착용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빠르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 당연히 사람을 부를 거라 여겼던 내 예상과 달리 에스뮈에가 낑낑거리며 거치대에 있는 갑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에스뮈에? 사람을 부르는 게…?”
“이, 이게 목적이었느니라.”
“…갑옷을 조정하는 거?”
“정확히는, 그대에게, 이 갑옷을 처음 입히는 것을…! 여가 하고 싶었느니라.”
무슨 소린가 싶으면서도 일단 그녀를 도와 흉갑부터 벗겨 입기 시작했더니 에스뮈에가 작은 손을 움직여 나를 도와가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라그니스도, 아실리에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대와 같은 전장에서 싸울 수 있지만 여는 아니잖느냐. 이는 결국 그대의 서임식이 끝나고 저 먼 전선으로 향한 순간부터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진다는 뜻이지. 연인인 기사들을 배웅하며 매일 기도나 올리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참으로 한심하다 여겼거늘, 정작 여조차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니라.”
보통 그런 여인들의 이야기는 삼류 로맨스 기사 소설에서나 나올 텐데, 에스뮈에도 그런 걸 읽었다는 사실이 되려 참신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감정에 오래 집중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입에 담는 내용은 더없이 진중했으므로.
“그렇다면 하다못해 그대를 지킬 갑옷만큼은, 여가 준비하고 싶었느니라. 그래서 직접 수소문하고, 준비하고, 최측근인 시녀에게 몰래 부탁해 이렇게 갑옷 착용을 돕는 법을 배웠지.”
갑옷의 무게를 힘들어할 뿐, 확실히 에스뮈에는 내 예상 이상으로 능숙하게 착용을 도왔다. 천재라서 금방 익힌 것인지 아니면 이를 위해 많은 연습을 했는지까지는 물어볼 수 없었다.
이내 갑옷을 전부 착용하고 그녀를 마주하니 앳된 얼굴 위에 조금은 씁쓸한 감정이 베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이후로는 이제 행사가 열리는 날까지 제대로 얼굴도 볼 수 없을 것이니라. 행사 당일은 말할 것도 없지. 결국 이렇게 그대에게 손수 갑옷을 입힐 수 있는 건 오늘 뿐이었기에, 오롯이 여의 사심을 위해 불렀느니라.”
나를 바라보는 에스뮈에의 얼굴에 후회와 아쉬움의 감정이 얼핏 드러났다. 마치 이 갑옷을 선물함으로써 자신이 내 등을 떠밀었고, 그로 인해 내가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감정들을 순식간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약속하거라. 원수를 찾아내, 그대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제국으로 오겠다고.”
미안함 때문에 말문이 막혀 잠깐 맴돌던 침묵을 뚫고 대뜸 내뱉은 에스뮈에의 부탁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왜?”
“오늘 갑옷 입는 것을 도와준 것처럼, 그 때는 갑옷 벗는 것을 도울 것이니라.”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흉갑을 통통 두드리는 에스뮈에의 모습이 마치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것 같았기에 적당히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럼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와야겠네.”
“걱정 말거라. 갑옷만 벗길 생각은 없으니.”
장난기 넘치는 미소와 함께 대답한 그녀는 해맑게 웃어 보였고, 이에 나도 따라 웃었다.
…?
잠깐, 방금 얘가 뭐라고 한 거야?
나 갑자기 웃기 힘들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