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427)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427화(427/599)
[427화] 피리 기사요새 도시 레비엥이 인족의 침공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함락된 지 9일 째.
이틀 만에 뚫린 외성 탓에 내성은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밀려 버리고, 결국 협공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인족의 군대에게 협공을 당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패배는 마왕군 전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대사건이었다.
전장에서 이탈한 이티스엘의 은수리 여단이 그만한 전력을 지니고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총사령관이라는 명분으로 함께 이동한 레비엥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불세출의 천재이거나 용사일 가능성까지 염두하고 조사하는 등, 갑작스러운 변화에 말 그대로 모든 전선이 발칵 뒤집힌 상황.
그런 혼란 속에서 레비엥의 보급을 담당하던 인근의 마왕군들은 인족이 레비엥을 완전히 되찾고 정비에 들어가기 전에 서둘러 재탈환하고자 하루가 멀다 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 노력 덕분에 인족도 완벽하게 레비엥을 장악하지 못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 나가는 중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왕군의 피해가 일방적으로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것도 문제였으나, 인족의 전술에 변화가 생긴 탓이 컸다.
“빌어먹을, 비룡 기사다!”
숲속에 거점을 세우고 레비엥 공략조를 보조하던 마왕군 경비가 외치자 숙영지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인족의 새로운 습격 수단은 마왕군으로 하여금 뒷목을 잡게 만드는 악랄함을 자랑했다.
바로 지금 새벽 하늘을 가로 지르며 날아오는 스무 마리의 비룡들이 그러했다. 경비는 비룡 기사라고 불렀지만, 거점의 지휘관은 저 악마들이 비룡 기사와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최근 갑자기 등장하여 마왕군의 후방을 괴롭히는 저놈들은 비룡 기사가 아니라 이동식 기사 발사대이자, 투석기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아주 끔찍한 악몽이었다.
“신호탄을 쏴라! 별동대를 불러! 본대를 우회해서 접근했을 게 분명하니 버티기만 하면 된다!”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외치긴 했으나, 지휘관은 죽음을 예견했다.
애당초 이곳은 보급 물자를 관리하고 부상병을 수용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거점이었기에 제대로 된 병력이 한정적이었다. 저들도 그걸 알기에 노리는 거고, 스무 마리의 비룡 위에 타고 있는 이들 모두가 여기 있는 마왕군보다는 강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다 꺼져가는 불길 속에 아직 한 줌의 희망은 남아 있었다. 피리 기사만 아니면 된다. 그러면 버틸 수 있다.
-피이이익!
그리고 지휘관의 바람은 처참하게 박살 났다.
“피리 기사다!”
휘파람 소리를 신호 삼아 비룡들이 일제히 날개를 접고 고도를 낮추며 대지를 향해 돌격한다. 얼마 없는 마법사들이 공격 마법을 던져 보지만 날랜 비룡들을 맞추는 건 무리였다. 되려 한 차례 더 휘파람이 울려 퍼지자 마법을 쏘았던 마법사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에 맞고 픽픽 쓰러졌다.
“제기랄…!”
레비엥의 외성을 홀로 돌파하고, 빛을 쏘는 자 이라프를 떨군 인족 기사.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후방을 뒤엎어서 보급로의 악마로 통하는 놈.
“싸워라! 싸워서 버텨야만 한다!”
놈은 지휘관을 살려 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휘관은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부하들을 다독이고 지휘해야 했다.
그는 마력을 폭주시켜 신체를 강화하며 천막 옆에 세워 두웠던 기창을 뽑아 선두에서 돌격해 오는 피리 기사를 겨눴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피리 기사를 죽인다!”
부질없는 꿈이었다. 피리 기사를 이길 수 있는 실력자는 이곳에 없었다. 그런 이들은 전부 최전선에 있다. 마왕군에게 후방과 전방의 구분은 그런 거였다.
군인으로서의 의무감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던진 창이 예상했던 대로 빗나가고, 갑자기 방향을 트는 비룡 위에서 사람이 뛰어내리는 걸 확인한 지휘관은 검을 뽑아 들었다.
“자유를 위하여!”
투구를 써서 표정을 알 수 없는 피리 기사는 허공에서 능숙하게 자세를 취하며 양손 도끼를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게 지휘관 생애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압도적인 마력으로 게이트를 운용하여 물리적인 거리를 단축함으로써 인족보다 주 전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은 이미 거점에 틀어박힌 적들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물론 다른 전선의 병력들을 끌고 올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전쟁 초기와 달리 지금의 인족과 마족은 박빙薄氷이다.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 것에 가깝던 인족의 군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졌고, 일개 마왕군 병사로도 다섯을 상대할 수 있었던 왕국 병사들이 이제는 두 명만 모여도 하나를 상대할 지경에 이르렀다. 은수리 여단의 이동으로 인해 생긴 공백마저 제국이 용사를 이끌고 참전하며 채워버린 탓에 마왕군이 기용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후방 병력 정도였다.
균형이 어긋난 탓에 졸지에 인족의 정예들과 맞붙게 된 후방 병력이 온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마족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무기는 어차피 마장금이라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식량같은 물자 위주로 파괴하십시오. 항복하는 이들은 포박하여 중앙에 모아두시고…”
레비엥 공략은 마치 전쟁 초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거점은 자연스럽게 구호소로써의 비중이 커져 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투 가능 병력과 부상자의 비율이 1:4에 이를 정도였다.
그런 곳에 소문의 피리 기사가 나타났으니 결과는 뻔했다.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천막을 지키고 있던 마왕군은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며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했다.
최후의 발악을 해야하나, 아니면 그냥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나. 그래도 방금 작게 들리는 대화를 보면 항복한 사람을 따로 모아두는 거 같은데 항복하는 게 맞나?
하지만 저들에게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다. 포로를 취급할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쩌면 전부 모아서 산 채로 매장하려는 게 아닐까.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죽게 될 줄이야.”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참담한 심정만 곱씹다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침대에 누워 있던 부상병 하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우리 의료병 친구 동정이었어?”
한쪽 다리가 날아가고, 팔에도 큰 부상을 입은 여군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진즉에 말하지 그랬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 한 번 대줬을 텐데.”
“지랄한다. 쟤가 뭐가 아쉬워서 다리 하나 없는 년이랑 붙어 먹고 싶겠냐.”
“염병할, 이 상황에 다리가 대수야? 박을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차라리 옹이 구멍에 박고 말지.”
그녀의 옆에 누워 있던 부상병은 훨씬 상태가 심각했기에 상체조차 일으켜 세우지 못했지만 여군은 일말의 주저 없이 자신이 쓰던 물컵을 집어던졌고, 정확하게 이마를 얻어맞은 부상병이 비명을 지르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미 거점이 적의 정예에게 다 털렸다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으나, 오히려 그랬기에 모든 걸 포기한 결과였다.
“뭐… 고생 많았다. 기왕이면 싸우다 죽고 싶었는데 말이지.”
“좆 같은 전쟁.”
“지긋지긋 했는데 차라리 잘 됐…”
하나둘 씩 터져 나오는 작은 불만과 담소를 끊은 건 입구를 뚫고 들어온 한 자루의 검과 이에 반응한 의무병이 발작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자아낸 소음이었다. 시선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 전부가 입구를 바라보는 가운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검이 천막을 들추었다.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인족 기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고, 갑옷의 양식도 달랐으니까.
“구호소 확인. 에가 경께 보고해.”
투구에서 들려오는 웅웅 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던 의무병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천막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등을 기댔다.
기사는 여전히 검으로 천막을 들춘 채 내부를 바라볼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고, 들춰지지 않은 천막을 손으로 들추며 모습을 나타낸 이를 알아본 마족들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뒤따르는 기사들과 홀로 다른 형태의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는 자. 피리 기사였다.
“수는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대체 얼마나 많은 마왕군을 죽였는지 그의 손에 들린 도끼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긴장한 마족들은 그 모습에 새삼 두려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이 천막은 오십 정도인 것 같습니다. 비슷한 크기의 천막들이 다른 곳에도 있었으니 부상자는 더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항복한 이는 어느 정도죠?”
“방금 확인했을 땐 스물 정도였습니다.”
대답을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피리 기사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듯한 착각이 느껴지며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만큼 피리 기사가 단기간에 쌓은 악명은 굉장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피리 기사를 보는 의무병의 안색이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모두가 침 넘기는 소리조차 내지 못 하는 와중에 격한 기침 소리가 울려 퍼진 건 피리 기사가 의무병에게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피리 기사의 투구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격하게 기침을 하는 부상병에게로 다가갔다.
“아…”
심장 소리가 고막을 터트릴 것처럼 커져가는 와중에 의무병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기침 좀 했다고 먼저 죽는 게 대수인가 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그냥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기가 무섭게 자기 혐오가 치고 올라왔지만 그마저도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랬기에 연신 기침을 하며 어떻게든 물병으로 손을 뻗으려는 부상병의 바로 옆까지 도달한 피리 기사가 물병에 손을 뻗어 물을 따르고, 그 컵을 부상병에게 건네는 광경을 봤을 땐 자신이 미쳐서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콜록!”
물컵을 받는 순간 죽이려는 건가? 아니면 죽을 땐 죽더라도 물은 마시고 죽게 해주나?
보고 있는 모든 마족들이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결국 기침을 견디지 못한 부상병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컵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피리 기사는 그가 물을 마시는 걸을 확인한 뒤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입구로 향했다.
“전부 중상인 거 같군요. 굳이 끌어낼 필요 없습니다. 다른 천막도 확인하고 비슷한 상황이면 담당하고 있을 의무병과 함께 대기시키세요.”
“항복한 이들을 미리 붙일까요?”
“아뇨. 괜히 딴생각하게 둘 필요는 없죠. 그들은 저희가 떠난 뒤 풀어 줄겁니다.”
자연스럽게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천막에서 멀어지는 그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의무병은 새하얗게 비어 버린 머릿속에 가까스로 생각을 채워 넣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의무병 친구, 지렸어?”
“씨발. 그러네요.”
하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이나 저들의 의도가 뭔지 의문을 가지는 것보다도 축축해진 아랫도리를 파악하는 게 가장 빨랐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목숨이 붙어 있다는 안도감에 의무병은 웃어 버렸고, 다른 부상병들 역시 뒤늦게 숨을 내쉬며 웅성거리는 와중에 상체를 세우고 턱을 괴고 있던 여군이 심각한 표정으로 옆에 누워 있던 부상병에게 물었다.
“솔직히 다리 하나 없는 게 거슬려도 오줌싸개면 어찌저찌 상충되지 않을까?”
부상병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뒤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