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469)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469화(469/599)
[469화] 소환 용사는 전생의 꿈을 꾸는가.분위기를 풀고자 던진 농담에 지크프리트가 보인 반응은 헛웃음과 함께 자신의 볼을 꼬집는 것이었다.
엔티레가 있는 천막부터 들렀다가 왔을 텐데도 저런 반응이라니. 마지막 기억보다 좀 초췌해진 얼굴도 그렇고, 메시나 왕녀의 말대로라면 밤잠을 설친다는데 피로의 여파가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이게 꿈이라도 그렇게 꼬집어서야 깰 수나 있겠어?”
물론 그런 것치고 참 시원찮게 꼬집길래 한국어로 한 마디 거들어주자, 조금 더 세게 꼬집으며 확실하게 반응한 지크프리트는 방금 전까지 에셀루아 황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부터?”
돌아오는 대답도 한국어인 게 정겹기 그지없다. 참으로 두서없는 질문이라서 한 마디 더 쏠까 싶었지만, 빙의자라든가 뒤늦게 기억을 자각한다는 형태의 클리셰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분위기나 전환할까 싶어서 짧은 순간 참 많은 드립들이 떠오르고 사라졌으나 그걸 전부 던진다고 한들 녀석의 긴장감이 풀릴 것 같지는 않아서 일단 정상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처음부터.”
“아니, 진짜!?”
“진짜로. 내 카테고리는 전생자야.”
굳이 번거롭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같은 지구 출신이라는 게 확실해진 이상 전생자네 빙의자네 하는 걸 거짓말로 밝힐 이유 따위 없다는 걸 지크프리트도 알고 있었으니.
당장 지금도 ‘그럼 진짜 야카 화살이었다는 거잖아.’ 같은 소리를 하며 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지크프리트는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걸 지금까지 숨겨 왔던 이유는 뭐야?”
“굳이 밝혀서 좋을 게 있나? 원래 이번 일만 없었으면 앞으로도 밝힐 생각은 없었어.”
“아예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낼 생각이었다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썹마저 팔八자로 휘어가며 되물어보는 지크프리트였으나, 내 대답은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당연하지.”
당시의 나는 용사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미 날 때부터 용사로 점지되었으나 에파가 님께서 내가 용사의 과업을 짊어지길 바라지 않으셨기에 굳이 용사짓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에 가깝지만 아무튼.
마왕군이 우리 마을만 박살 내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모험가를 꿈꾸면서 조금 잘난 모험가로 죽을 때까지 살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세계의 균형을 유지한다거나, 마왕을 무찌른다거나, 악마들을 토벌한다는 목적성과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악마 새끼들 정도는 보이는 족족 다 죽여 버리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딱히 퀘스트라고 할 것도 없는 힐링 오픈 월드 게임 같은 인생인데 굳이 메인 퀘스트가 확실하게 정해진 용사의 고행길에 동참하여 고난의 행군을 함께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아는 척해봤자 내가 얻을 거라고는 동향 사람을 만남으로써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반가움 정도밖에 없었어. 내가 여기서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으면 모르겠는데, 알다시피 좀 각박하게 흘러가다 보니 그런 건 별로 메리트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엮이면 귀찮은 일만 엮일 게 뻔하니 입 꾹 닫고 버틸 생각이었지.”
“…그래서 척후 제안도 계속 거절했던 거고?”
“비슷하지. 너도 소설 좀 봤으면 알 거 아냐? 뭔 좋은 꼴 보겠다고 용사 하렘 파티에 기어들어가서 안팎으로 고생해? 마왕을 물리치고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원래는 딱히 마주칠 생각도,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피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지라 의도치 않게 엮이고 꼬인 탓에 나름 정이 들어서 돕게 된 거지.
대답을 마치고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사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어. 난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전생이랑 이어진 것뿐이야. 지구에서는 죽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지. 너하고는 좀 다르지?”
제국에서 술 마실 때 강제로 끌려왔다는 뉘앙스로 한탄하던 게 떠올라 넌지시 물어보자 답잖게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는 지크프리트였다.
“…하아, 이젠 모르겠다.”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이었다. 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신께 불만만 가득했다면 한국어 들렸을 때 갈대처럼 흔들린 게 아니라 진즉에 넘어가서 부리부리 대마왕처럼 굴었겠지.
갑자기 끌려온 것으로 인해 짜증은 났어도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푸대접을 받았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아니니, 여기서 지낸 시간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아차렸음이 분명하다.
“너, 환영 마법사가 한국어 좀 썼다는 이유로 흔들렸다며?”
아직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겠지만 지구 썰을 풀면서 노가리를 깔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환경은 아니었기에, 이 기회에 주제를 틀어서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들었어.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말. 그거에 혹 한 거잖아.”
“…그랬지. 이젠 아니지만.”
엔티레가 꽤 큰 영향을 끼친 걸까? 솔직히 이곳이 좋고 싫고를 떠나 귀환에 대한 것만큼은 아직도 우왕좌왕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깔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는 길에 엔티레를 봤어. 네가 치료해줬다고 벨레시카 성녀가 말해주더라.”
깊은 한숨과 함께 에셀루아가 쓰던 잔에 차를 따르며 지크프리트는 먼저 말을 이었다.
“두고는 못 돌아가겠구나, 싶었다는 소리로군?”
“…그래 씨발. 그래서 일단은 다 제치고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 싶었다.”
“운이 좋았던 거야. 원래는 그냥 내가 지구 출신이라는 것만 밝혀서 네가 섣부른 판단하는 걸 막는 걸 목적으로 온 거였으니.”
하다못해 지크프리트가 아기 코끼리 덤보 뺨치는 팔랑귀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면 메시나 왕녀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한동안 오두막에서 느긋하게 쉬었겠지.
그랬다면 엔티레는 도끼쟁이Mk2로 생을 마감하고 이 녀석은 후회, 집착, 피폐물 제대로 찍으며 온갖 삽질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해보면 운이 좋다는 거 외에 표현할 길이 없다.
“…왜 그럴 생각이었는데?”
새삼 이게 용사의 운빨인가 싶기도 하면서, 왜 난 이런 운빨이 없나 싶은 생각도 들다가, 좀 더 생각해 보니 나도 충분히 운이 더럽게 좋았던 거 같다고 결론짓는 사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지크프리트는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뭘? 내 정체 밝히고 너 도와주려고 했던 거?”
“그래, 그거. 아카데미에서 네가 말했지. 마족 전체에 악감정이 있는 게 아니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계자들에게 복수한 뒤 너 못 건드리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그 때 한 말이 진심이었다면 내가 그 마족에게 회유되어 마왕군과 협력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입장이었던 거 아니야?”
굳이 네가 유지하던 거리감을 무너뜨려가면서 마왕군에게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한 이유가 짐작이 안 간다. 결국 그 소리였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 반응에, 문득 적은 미래 예지 내지는 회귀자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쪽은 무식하게 발로 뛰는 것 전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쓸데없이 오해하고 설명하는 건 귀찮았기에 겨우 참았다.
“안 그래도 그게 본론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전에 일단 내 검부터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자 녀석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쏠린다. 지크프리트는 내가 검을 뽑는 걸 보면서도 딱히 경계하지 않았지만, 이내 내 검의 상태를 이해하고는 대충 봐도 머리 위로 수많은 갈고리를 수집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선 이 새끼들이 감히 은혜도 모르고 에파가 님께 반기를 들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마왕군 중 일부가 악신의 잔재殘在를 통해 정당하지 못한 개짓거리를 벌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두 번째 이유되시겠다.”
용사짓을 하기로 한 이상 악신과 연관된 것들은 싹 다 들어내야 한다. 근데 그 빌어먹을 것들에게 속아서 아군이었던 용사가 변절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어떻게 그냥 넘기겠는가.
뭔가 말할 것처럼 움찔거렸던 지크프리트는 내 설명을 듣자마자 검과 나를 다시 한번 번갈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마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과 내 말을 되새기며 열심히 고민하는 모양이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게 맞지? 신성력이랑 마력.”
신성력뿐만 아니라 마력도 눈치챈 걸 보면 은수리 여단 사람들이 나보고 마족 느낌났다고 했던 감각을 지크프리트도 터득했나 보군. 애둘러 용사냐고 물어보는 거였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검을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어차피 전생이라는 패를 깐 이상 다 말할 생각이야. 하지만 지금은 여기부터 집중하자고. 엔티레의 상처가 낫지 못했던 이유와 그걸 내가 고칠 수 있었던 이유.”
“…악신의 찌꺼기.”
짧은 끄덕임과 짧은 대답. 훌륭한 동의에 만족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찌꺼기라는 힘은 사람을 침식시켜서 괴물로 만든다. 원리는 아직 모르지만 에파가 님의 성유물에 담겨 있던 신성력과 이미 죽어버린 악신의 잔재를 무기로 벼린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어.”
“성유물? 마신교도 개입한 거야?”
“전부는 아니지만 정황상 그래 보인다. 거기도 상황이 좀 복잡해. 일단 성녀님은 숙청과 성전을 예고하셨다.”
성녀’님’을 언급하자마자 또다시 얼굴로 의문을 표하는 지크프리트를 위해 이번엔 간략하게나마 성녀님과 엮이게 된 계기를 비롯해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일부를 이야기해줬다. 굳이 늘어지게 이야기할 건 없었다. 내 전생에 에파가 님께서 개입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설명이 끝날 수 있었으니까.
“결국 지금은 찌꺼기에 당할 경우 치료할 방법이 네 검 하나뿐이라는 소리야?”
혹시라도 또 주제에서 새어나가 파고들진 않을까 우려했지만 되려 침착하게 턱을 괸 채 고민하던 녀석은 한참 동안 내 검을 바라보다가 다른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래. 그렇다고 해서 이 검의 기능이 거창한 건 아니야. 악신, 선신 가리지 않고 그저 신성력을 흡수할 뿐. 악신도 결국은 신이라서 가능한 일이지. 비슷한 물건이 있다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넌 그걸 어떻게 얻었는데? 마신교의 성녀가 도움을 준 거야?”
“어허, 씁. 성녀’님’. 괴물이 된 놈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우연찮게 백신 비슷한 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내가 처음부터 운이 좋았다는 걸 계속 강조한 이유지.”
처음 천막에 들어섰을 때의 어벙한 지크프리트는 더 이상 없었다. 녀석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이미 식어버린 차를 한 번에 마시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찌꺼기부터. 하지만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 없이 나머지 이야기도 다 들을 거다.”
철없는 멍청이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챙긴 뒤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나도 최대한 다 이야기할 생각이니 걱정 마라. 아니지, 넌 오히려 걱정해야 하나?”
“… 그건 또 무슨 소린데?”
“무슨 소리긴. 나 저쪽에서 죽기 전엔 20대 후반이었다는 소리지.”
방금까지 진지하기 그지없었던 지크프리트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하지만 그건 이런 상황에 진중하지 못한 나를 질책하기 위함이 아니다.
“어디… 한국인답게 장유유서長幼有序 좀 지켜볼까? 우리 동생은 몇 살 때 넘어오셨나?”
위아래가 바뀌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