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497)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497화(497/599)
[497화] 이유있는 폭력크룰의 송곳니를 받은 칼 칸시는 말보다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라 여겼는지 그대로 짐을 싸서 도시를 떠났다.
합류 시점에 대한 문제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고, 그가 송곳니를 들고 튈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알아서 잘 찾아올 것이고, 크룰의 말대로 징표를 알아 본 수인이니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이다.
이번엔 노리고 한 연출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첫 등장처럼 효과가 좋았다. 회의를 진행하던 이들의 표정과 행동엔 활기가 돌기 시작했으며 그 분위기는 일시적인 게 아니라 활로活路란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칼 칸시 경이 확신한 것처럼 수인들의 영토를 가로지를 수 있게 된다면 이런 것도…”
부정적이고 당장 눈에 보일 정도로 현실적인 제안과 상황밖에 제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오는 의견이라는 건 결국 그 수가 한정될 뿐만 아니라 점점 소심해지기까지 한다. 자연스럽게 사고도 획일화 되고, 어쩌면 가능할 수 있는 일조차 배제해 버리는 상황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 칸시가 자리를 떠난 뒤에 이어진 회의는 정말 활기찼다. 모인 사람들의 인식이 ‘도망’에서 ‘반격’으로 바뀌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쓰느라 당이 떨어진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지친 듯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를 마시는 휴식기를 가질 때까지 이어진 회의를 홀로 곱씹으며 그들이 내놓은 의견에 대해 몰래 공부하는 동안 어째서인지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고 있던 팀시브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외람되오나, 잠깐 휴식을 가지는 동안 용사님께 한 가지만 여쭤볼 수 있을련지요.”
회의 중에 물어보지 않았다는 건 회의와는 별개의 이야기라는 거겠지. 그래도 뭐 얼마나 사적인 걸 물어보겠나 싶어 시선을 마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더니 내심 화색을 띤 그가 말을 이었다.
“피리 기사의 악…명이라고만 여겨지던 위업이 들려올 때마다 항상 궁금했었습니다. 레비엥은 마족과 인족의 경계에 위치하여 수년간 방패의 역할을 해온 도시였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함락되었을까 하고 말이죠.”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조용히 눈을 빛냈다.
하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건 단순한 흥미보다 전술적 가치를 찾아내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어쩌면 다른 이들도 따라 하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기 위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기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별거 없습니다. 벽을 타고 달렸을 뿐입니다.”
그랬기에 간단하게 대답한 뒤 다시 시선을 내려 눈앞에 있는 지도와 문서들에 담긴 정보를 머릿속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의도가 가득 담긴 내 태도를 뚫고 질문을 던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는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거의 반나절 가까이 이어진 회의가 끝난 뒤.
내 방이라며 안내 받은 호화스러운 침실의 푹신한 침대에 몸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꾸역꾸역 참으며 장비를 벗고, 씻고, 정비까지 마친 뒤에야 무너지듯 쓰러진 나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마디를 힘겹게 입에 담았다.
“정치랑 전쟁은 역시 가까이 할 게 아니야.”
이야기를 따라가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그야말로 사활을 건 회심의 작전이라 더욱 그랬다.
한 번의 전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후로 마신교와 마왕군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열댓 명의 셰릴들이 모여 전쟁의 방향성을 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와중에 혼자 망부석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그만한 노력을 들인 보람은 있었다. 그런 행동을 통해 ‘주변의 의견도 잘 경청하는 용사’ 라는 인식을 줄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작전 결행이 사흘 뒤인 것도 알았으며, 내일 할 일도 생겼으니까.
쉴 틈도 없이 짐 싸서 출발한 칼 칸시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푹 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로 하며 잠을 청했다.
◈
문명의 감사함을 만끽하는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나와 성녀님은 극소수의 이단 심판관들과 함께 도시를 순찰하기 위해 새벽 일찍부터 움직였다.
목적은 신성력이 약화된 원인을 찾아보는 것. 전장에서 경험했던 바늘의 성능 감소에 대해 성녀님께 이야기한 결과였다.
“악신의 잔재로 만든 마도구에 신성을 억제하는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실상 어제 늦게까지 회의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감과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해서 당시 환영 마법사들과의 싸움을 떠올리며 마도구의 범위를 대략적이나마 추측하고, 그걸 기반으로 도시 지도 위에 마도구가 위치할만한 장소를 예측하는 과정은 꽤 까다롭게 진행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목적은 마도구의 파괴가 아니라 발견 후의 검증에 있었기에 마도구가 반드시 있을 법한 장소를 추리는 게 까다로운 것에 가까웠다.
당장 내일이면 떠나는 마당에 도시 전체를 쑤시고 다니면서 정상화를 시킬 이유가 없다. 어차피 나중에 다시 싸워야 할 때 적들은 또 마도구를 심어놓을 텐데, 우리가 미리 발견하고 파괴해봤자 경각심만 일깨워주는 꼴이다.
그럴 바엔 그냥 확인만 한다. 그렇게 추리고 또 추려낸 장소는 인적도 드물고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도시의 병기고 인근. 이마저도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감시자나 첩자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장소였다.
“용사님.”
병기고에 도착해 최대한 주변 사람들을 물린 다음 나를 부르는 성녀님께 고개를 끄덕인 뒤 휘파람을 불어 바늘을 꺼냈다. 어차피 아군이니 굳이 휘파람을 불 필요가 없다는 게 알려져도 문제는 없겠으나, 세상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니 최대한 조심하기로 했다.
그렇게 바늘을 회전시키니 역시 저항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서 이리저리 움직여보니 확연히 차이가 난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내 집중력의 문제였기에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거닐었다.
살아 숨 쉬는 지뢰 탐지기가 된 꼴이었으나, 알아서 찾아주는 기계와 달리 바늘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저항의 차이를 느껴야 하다 보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냥 한 번에 마력을 훅 쑤셔 넣고 끝내는 것에 가까웠던 전투와 달리 지금은 항상 똑같은 속도가 유지되도록 마력을 신경 쓰면서 속도가 달라지는 걸 확인해야 했으니까.
너무 집중해서 속도가 느려진 듯한 착각이 느껴지는 걸 열댓 번은 반복하고 나서야 감을 잡은 나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도 부담이다. 저들이야 내가 실패를 하고 있는지, 그저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거리에 따른 영향력의 차이는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여깁니다.”
숨소리조차 죽인 채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눈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걷기를 30여분. 주변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늘에만 집중하던 내 감각에 드디어 입질이 왔다.
솔직히 말해 놓고도 놀랐다. ‘여기일 것 같다’ 가 아니라 확실하게 여기라는 말이 나올 줄은 나도 몰랐거든. 하지만 그만큼 확실했고, 스스로 해냈다는 느낌에 미소마저 지어졌다.
흑요석을 깎아 만든 건가 싶을 정도로 깔끔한 구조물 안에, 예의 마도구가 박혀 있음이 분명했다.
“여기에 놈들이 마도구…를…”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조금 목소리를 높여 구조물에 손을 댄 나는 그제서야 내가 보고 있는 게 뭔지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빌어먹을 배교자들이.”
“마신이시여…”
뒤에서 이를 가는 이단 심판관들의 목소리 사이로 자박 자박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성녀님이 다가왔다.
“…이 안에 들어 있는 겁니까?”
발걸음과 달리 목소리는 무겁다. 집 근처 신전에서 분을 참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박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르는 걸 보면 화가 나신 게 분명했다.
“…예.”
그건 나도 다를 게 없었다.
내가 봤던 에파가 님과는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마신상이라 불리는 상징적인 석상에 악신의 잔재가 담긴 마도구를 박아넣는다는 게 무슨 의도인지 너무나도 자명했기에.
“서, 성녀님!”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이단 심판관들이 순식간에 성녀님께 달려들었다.
충격을 받은 성녀님이 뒷목을 잡고 쓰러져서는 아니었다. 되려 반대였다.
“아, 안 됩니다! 저걸 파괴했다간 계획이 틀어집니다!”
“성녀님! 부디 고정하십시오!”
분을 참지 못한 성녀님이 기어이 석상을 머리로 들이받아 박살 내려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으아아!!”
장정 다섯이 달라붙었는데도 질질 끌린다. 덕분에 성녀님이 얼마나 빡쳤는지 절실히 느껴졌으나, 마냥 구경만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재빨리 가세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잔뜩 화가 난 성녀님을 가까스로 진정시켜 뒤로 물리게 된 우리는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 석상과 거리를 두며 신성력의 출력이 어떻게 변하는지 실험하기 시작했다.
“꽤… 넓군요.”
사람이 여섯이니 실험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릴 게 없었으나, 결과가 영 탐탁지 않았다.
마도구의 영향력은 반경 400m가량. 100m만 멀어져도 제약이 대폭 감소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도구가 그 범위 내의 신성력을 꾸준하게 흡수한다는 게 문제였지. 마신교의 총본산에 이딴 게 박혀 있으니 연료가 떨어져서 기능정지가 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쩌면 저렇게 처먹은 신성력으로 기능이 강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이 물건을 이대로 두는 게 맞을까요?”
가까스로 진정한 성녀님이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지만 섣불리 대답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내버려 두고 나중에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날 때 확실하게 찾아다니며 파괴하느냐, 아니면 놈들이 이 마도구를 추가 개선할 방법이 없길 바라며 발견하는 족족 다 박살 내느냐.
단순하게만 보면 전자가 무조건 이득인 거 같았지만 끝없이 신성력을 흡수하려는 꼬라지를 보고 나니 그마저도 불안했다. 마왕군이 저걸 개선할 가능성보다 저게 신성력을 먹고 자체 진화할 가능성이 더 높다면? 그리고 그게 더 위험하다면?
“돌겠…?”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 속에서 모두가 침음을 흘리는 가운데 갑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이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