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507)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507화(507/599)
[507화] 행군어느 세상이나 소통은 역시 중요했다.
얼마나 중요했냐면, 이등병의 군생활만큼이나 깜깜했던 미래에 100,000 루멘짜리 손전등이 켜지는 수준으로 중요했다.
내가 월담이 가능하다는 걸 밝힘과 동시에 지휘소의 사람들은 고민을 멈추고 행동에 나섰다. 나를 필두로 서른 명의 습격조가 편성되는 데 5분이 걸리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백작령을 가로질러 내성과 인접한 외성의 후방으로 접근하기까지는 세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뽑혀서 작전에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습격조의 일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덕분에 나는 지금 그들과 함께 야트막한 언덕에 엎드린 채 통금 시간을 알리는 기나긴 나팔 소리가 성에 울려 퍼지는 걸 들으며 외성 위의 경비병들을 구경하는 중이다.
솔직히 상황이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투구도 제대로 안 쓴 채 창 끝에 걸치고 있는 놈, 성벽에 등을 기댄 상태로 거꾸로 경계 근무를 서는 놈, 딱 봐도 창끝만 보이는 것이 주저앉아서 쉬는 놈 등등 현대였으면 군기 위반으로 영창에 갔을 행위인데 쟤네는 그런 규칙도 없는 것인지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한 상태였다.
“개 빠졌네.”
“예?”
법보다 칼이 빠른 세상에 살면서도 저 지랄인 게 웃겨서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니 옆에서 진지하게 가장 경계가 소홀한 위치를 찾고 있던 기사가 퍼뜩 놀라며 되묻는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 기사의 얼굴에서 선임에게 수차례 굴러본 자의 숙련된 동공 지진이 느껴졌기에, 나는 짧게 헛기침을 한 뒤 순화된 표현으로 다시 말했다.
“적들의 군기가 해이하다고 말했습니다.”
“아, 그렇죠. 저 정도면 어디를 노려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자신을 향해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에 크게 안도하는 기색이 겉으로 느껴질 정도였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까지 작전에 임하고 있어서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을 뿐이지, 신실한 신앙인의 입장에서 용사라는 인간이 주는 압박감이라는 게 만만하게 볼 수준은 아닐 것이다.
밥 먹는데 옆에 사단장이 앉아 있는 기분 아닐까?
“밧줄의 길이는 준비한 걸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위치는… 망루의 정면 사각 지대가 가장 무난할 거 같습니다. 원래는 가장 경계해야 하는 곳인데 저것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더군요.”
다행히 그의 동공 지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했던 모양인지 일 처리는 확실했다. 다른 기사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의견에 공감한 나는 어깨에 둘러멘 밧줄을 고쳐 쥐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성벽 위에 올라가면 다른 뭔가가 더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여기서 봤을 때 다른 마법적인 장치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제가 성벽 위에 올라가면 바로 움직이십시오. 꼴을 보아하니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마력을 끌어 올리고 축복을 부여하며 천천히 성벽으로 이동한다. 마음먹고 거리를 좁히면 순식간이겠지만 놈들이 아무리 경계 근무를 개판으로 서며 수다를 떤다고 한들 고요한 밤에 울려 퍼지는 갑옷 절그럭 거리는 소리는 꽤 시끄러운 법이다.
아무리 병신같이 굴어도 쇳소리 정도는 듣고 반응할 터이니, 시끄럽게 구는 건 성벽을 오를 때 해도 늦지 않다.
사박사박 밟히는 눈소리조차 나에게는 크게만 느껴졌지만 괜히 심장 졸일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아직 한참 거리가 남아 있음에도 전해져오는 성벽 위의 잡담 소리와 담배 연기가 더 강렬했으니.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내 갑옷 소리보다 놈들이 내는 소음이 더 크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새하얀 눈밭 위애 발자국을 찍어가며 이동한 끝에 성벽 아래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게 착각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깨달았다. 목청 껏 떠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목소리를 죽여가며 떠들지도 않은 놈들 덕분에 경비병들이 필요 이상으로 뭉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거기서 조금 더 먼 곳에 자리 잡은 뒤 여섯 개의 바늘을 꺼내 들었다.
전생에서도 평생 클라이밍같은 걸 해 본 적은 없었으나 문제 될 건 없었다. 압도적인 피지컬과 확실한 받침대가 있으니 클라이밍보다는 사다리 타기에 가까웠고, 실제로도 그랬다.
팔다리를 움직이며 마력과 힘을 주어 성벽에 박아넣을 때마다 바늘이 돌을 부수고 고정되는 걸 두어 번 반복하고 나니 감도 금방 잡혔다. 드높은 성벽의 1/3 정도 이르렀을 땐 속도가 붙어서 정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경비병들의 태평한 수다와 흡연은 계속 이어졌다. 혹시 몰라 올라오면서 따로 바늘 하나를 더 꺼내 마왕군의 마도구로 인한 저항 같은 게 있진 않을까 확인해봤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외적인 문제는 하나도 없다. 남은 건 도적도, 확실한 적도 아닌 이들의 생명을 암살로 앗아가야 하는 내 마음가짐이 문제일 뿐.
다행스럽게도 난 딱히 이상론자가 아닌지라 그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후우.”
마지막 도움 닫기로 성벽 끄트머리에 오름과 동시에 경비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주저 없이 바늘을 날렸다. 대부분은 나를 발견조차 못했지만,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수다를 떨던 경비병 하나가 제 눈을 의심하는 것처럼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인다.
창 끝에 투구를 걸어두고 있던 놈이었다.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대가로 녀석은 제일 먼저 이마에 바람구멍이 나며 죽은 놈이 되었고, 눈앞의 죽음을 목도하자마자 다급하게 움직이려던 다른 경비들 또한 그 뒤를 따랐다.
근무지 이탈을 한 놈들만 셋이었기에 그 뒤로는 놈들이 뭉쳐 있던 곳의 횃불을 꺼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시 바늘을 회수하여 혹시라도 반응하는 경비들이 있는지 잠깐 살펴봤지만 성벽 위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정확히는 다른 경비병들의 잡담 소리가 아련하게 들릴 정도로만 고요했다. 이에 만족하며 고개를 돌려 성벽 밖을 바라보니 기사들이 내가 말했던 대로 열심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늘들을 성벽에 대각선으로 박아 지주 핀처럼 고정하고, 단단하게 고리를 만들어 묶은 밧줄을 떨어뜨리자 얼마 가지 않아 나처럼 밧줄을 멘 기사 한 명이 열심히 타고 올라와 내가 미리 박아둔 다른 바늘에 밧줄을 걸었다. 그렇게 세 명 정도가 더 밧줄을 내리고 나니 남은 사람들이 올라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혹시 레비엥의 외성도 이렇게 돌파하신 겁니까?”
“아뇨. 그땐 달렸습니다.”
스물아홉 명의 기사들 머리 위로 갈고리가 떠올랐지만 그건 나중을 위한 의문으로 남겨둔 채 움직이기로 했다. 놈들도 교대 시간은 있을 테니 잡담이나 주고받을 시간은 없었다.
“제가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꺼낸 건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기사였다. 그만큼 경험도 많았고, 그 경험에 비레어 내성 방문이라는 바람직한 경력이 포함되어 뽑힌 인선이었기에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굳이 계단을 찾을 것도 없이 올라올 때 썼던 밧줄을 재활용해 성벽을 타고 내려온 우리는 그렇게 노기사의 뒤를 따라 달렸다.
예전에 아실리에와 함께 산적들을 털었을 때 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접근해서 마법사들의 위치를 털어보고 싶기도 했으나 어차피 마법사들을 처리한 뒤에도 한바탕 싸워야 하는 만큼 머릿수를 미리 줄여놓는 게 나았기에 포기하기로 했다.
정작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 내성에 도착할 때까지 순찰병 하나 마주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기, 기사님들이 어째서…”
내성의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우리가 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춤거리던 두 경비병들의 목이 베이는 것을 시작으로 6인 5조로 나뉜 기사들이 전력을 끌어올리며 안으로 뛰어들어가자 대학살이 이어졌다.
순간 떠오르는 건 가엔달 파티와 처음으로 함께 했던 비밀 의뢰였다. 폐던전을 은신처로 쓰고 있던 마족 추종자들의 숙소를 털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기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특수 부대원처럼 능숙하게 손발을 맞춰가며 눈에 보이는 이들을 베어 넘겼다. 그렇게 1층 전체를 쓸어 버렸을 땐 슬슬 비명 한 번 새어 나갈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무섭도록 신속하고 정확한 기사들은 경계 근무를 소홀히 한 이들에게 비명 한번 지를 틈조차 주지 않았다.
물론 거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기사도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는 나와 저들은 입장이 전혀 달랐기에 적잖이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렇다고 일반 사용인들까지 싹 다 몰살 시킨 건 아니었다. 틈틈이 정보를 얻고 기절시키는 과정도 잊지 않고 수행한 기사들이 다시 뭉치게 된 것은 2층마저 정리하고 마지막 3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도착한 뒤였다.
“3층에는 영주 가족의 침실과 집무실. 그리고 조언자의 위치에서 오랫동안 비레어 가문과 거래해 온 마법사의 개인실이 있습니다. 다행히 마법사가 그리 많지는 않아서 2층에서 죽인 둘 외엔 그가 유일하게 남은 마법사라고 하더군요.”
섬기는 게 아니라 거래라.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니 거래가 성립된 것일 텐데… 보통 이렇게까지 아무런 마법적인 조치없이 내부를 방치하나?
심히 어중간한 관계 설명이 영 꺼림칙했지만, 당장은 어디서 마법을 시전하느라 마력이 움직이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일단 3층으로 올라갔다.
2층까지는 백작이 수도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검소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3층은 달랐다. 복도에 깔린 카펫이며 여러 미술품들을 보면 열심히 긁어 모으면 모았지 덜 긁어 모으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경비는 오히려 더 적다. 당장 우리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는 경비 넷을 바늘로 죽이는 것만으로 정리가 끝날 정도였다.
“이쪽이 마법사의 방입니다.”
혹시라도 다른 움직임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와중에 작은 목소리와 함께 노기사가 가리킨 방은 영주의 방을 잘못 말한 게 싶을 정도로 화려한 장식과 문이 돋보였다.
이게 마법사의 방이라는 건 저 멀리 보이는 심플한 방들이 영주의 집무실이나 침실이라는 건데… 너무 대조가 심각하다.
마치 뭔가 있을 것처럼 꾸민 미믹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구심에 반응하여 마력시에 좀 더 집중하는 순간, 나는 그제야 여기가 마법사의 방이라는 걸 납득할 수 있었다.
“먼저 진입…”
“멈추십시오.”
기괴할 정도로 많은 마력이 문 전체를 휘감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기에.
“문에 뭔가 걸려 있습니다.”
마법사들을 자주 상대해 온 건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저건 결코 어중이떠중이가 설치한 게 아니다.
“이 마법사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아는 분 계십니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런 허술한 군기로도 비레어 백작령이 철통같은 비밀 유지 속에서 사치와 향락을 누릴만큼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었던 건, 이 방 너머에 있는 마법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