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514)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514화(514/599)
[514화] 세로 리피티의 자식들장대한 떡대와 묘하게 힘 있는 어조 때문에 잔뜩 경계한 이들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가니, 금방이라도 ‘난 라쿤이야 병신아.’ 라고 말할 것 같은 미녹카가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엘드미아 에가로군.”
공용어가 어눌하기 그지없었던 크룰과 달리 라쿤 수인 미녹카는 칼 칸시만큼이나 능숙한 발음을 구사했다. 발음이 쉽지만은 않은 것인지 좀 과장되게 입이 움직이느라 묘하게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원활한 소통을 위해 저렇게까지 열심히 언어를 배웠다는 뜻이기도 하니, 위협적인 외견과 달리 말이 통하는 인물일지도 몰랐다.
“예. 칼 칸시는 어디 있습니까?”
당장에 나를 보고 두 번 물어보지 않는 걸 보면 이미 칼 칸시에게 내 인상착의에 대해 들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잠시 침묵한 채 나를 응시하다가 다른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대는 크룰이 누구인지 아는가?”
“…실력 있는 주술사?”
굉장히 모호한 질문이라서 나도 모호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겨우 한 번 봤을 뿐인데다가 송곳니만 받고 헤어진 인물이 누구인지 아냐는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대답을 들은 미녹카와 주변의 수인들 사이에서는 조금 전까지 험악하던 분위기와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굉장히 김빠진다는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 그게 다라고?”
“…뭔가 더 필요한 겁니까?”
상대가 수인들이라서 정확하게 표정을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저 반응은 분명 허탈함이었다. 마치 코끼리가 뛰어오는 줄 알았다가 개미가 기어 오는 걸 본 것처럼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마저 뺀 미녹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자기 입을 가리고 있다가 아주 천천히 질문이 아닌 대답해주었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다. 우리는 그대를 크룰 피탈리 바자소의 은인이자 수인들의 친구로서 맞이할 것이나, 저 마족들은 아니다.”
미녹카가 손가락질이 아닌 정중한 손짓으로 내 뒤를 가리키자, 돌아보지 않아도 무슨 반응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웅성거림이 커졌다.
하지만 일방적인 경멸이나 거부라고 하기엔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정중하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미녹카가 첨언했다.
“우리가 그대를 도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기회를 주길 바란다. 그동안 이곳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약속 한다면 저들은 이곳에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괜찮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대표로…”
“아니, 그대만 가능하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미녹카의 단호한 한 마디는, 그 내용과 달리 묘한 정중함이 담겨 있었다.
보통 저런 말은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거 같긴 하지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 고개를 돌려 데오니 성녀님을 바라봤지만 그녀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내 판단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저 묵묵히 우리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대들을 위한 일이다. 부디 믿어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저렇게까지 정중하게 대해 놓고 안쪽에서 뜬금없이 날 공격하거나 내가 떨어진 사이 일행들을 공격할 것 같진 않았기에, 자세한 내막이라도 알기 위해 그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내 대답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미녹카는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수인들을 사이로 그 뒤를 따랐지만, 다른 수인들은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따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세로 리피티의 자식들은 이곳을 지킬 것이다. 약속만 지킨다면 해를 끼치지 않는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미리 알려주는군. 혹시 뒤에 눈이라도 달려 있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여 봤지만 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냥 경계에 불과하니 놀라지 말아라.”
“예?”
한동안 말없이 눈 덮힌 평원을 걸으며 이렇게 어디까지 가야 하나 싶던 찰나, 미녹카가 갑자기 던진 말에 반응하며 세 걸음 정도 더 내딛는 순간 뭔가 기묘한 감각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지만,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게 뭐였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오만가지 산과 나무와 사람 사는 흔적들이 나타났으니까.
“…결계입니까?”
“놀라지 말라고 말은 했어도 정말 안 놀랄 줄은 몰랐는데.”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미녹카에게서는 처음 봤을 때의 위압감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선 이런 식으로 그대를 맞이하게 되어 미안하다. 하지만 워낙 큰 문제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크룰이 준 증표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
솔직히 수인 몇 명 도와 준 걸로 받은 증표를 가지고 2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이동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 것부터 염치없는 행동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저 멀리 지어진 경계탑 위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미녹카는 천천히 걸음을 늦춰 내 옆에 서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만약 그대가 같은 수의 인족들을 데려왔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대를 도왔을 것이다. 크룰은 자신을 증명한 주술사고, 그런 그가 목숨을 걸고 증명한 이가 행한 일은 분명 선한 일일 테지. 하지만 마족은 우리들의 영지를 무사히 넘어갈 수 없다.”
그저 무한히 솟아나는 송곳니를 대충 뽑아 만든 줄 알았던 증표에 그렇게나 무거운 의미가 부여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에 내심 당황했지만, 그보다는 이어지는 미녹카의 설명이 더 신경 쓰였다.
“그건 우리의 도움과 별개로 저 탐욕스러운 놈이 마족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족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낱 몬스터로 저런 반응을 보일 거 같진 않아서 지레짐작해서 던진 질문에, 미녹카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풍왕 이라노레프. 초원의 용이다.”
그 입에 담긴 이름은 조금도 덤덤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게 문제였다.
비룡이 아니라 용이라고?
순간 내 귀를 의심해서 표정으로 물어 봤지만 나와 눈을 마주친 미녹카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상황을 따라가지 못 하는 뇌와 함께 벙찐 상태로 미녹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수인들의 거대한 마을이었다.
사실 이걸 마을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매우 거대한 규모의 거주지였다.
좀 부정타는 표현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덩이에 자리 잡은 탓에 수몰되기 딱 좋아 보이는 그들의 거처에는 높은 건물 하나 없이 몽골의 게르 같은 구조로 지어진 집들이 한가득 깔려 있었다.
미녹카의 설명에 의하면 이 거대한 구덩이가 세로 리피티가 대륙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물리적으로 남긴 족적足跡이고, 그래서 이 신성한 대지에 터를 잡은 수인들이 모여 산다고 하더라.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들었지만 이런 거대한 구덩이가 여덟 개나 있다는 말에는 순수하게 경악했다.
“이런 형태로 일족의 은인을 모시게 되어 송구하군. 나는 여덟 번째 발자국의 대족장 레델이다.”
그리고 여기는 세로 리피티가 남긴 여덟 개의 발자국 중 가장 마지막 발자국이었다. 미녹카를 따라 한참을 걸어 유독 거대한 게르에 도착하기 전까지 몰랐던 사실을 호랑이와 사자를 섞어놓은 듯한 오묘한 생김새의 대족장에게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부족 이름만 들어도 몇 번째 발자국 사람인지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심플한 구분법이라는 생각하며 최대한 정중히 예를 취하려는 나를 붙잡은 것은 자신을 대족장이라 밝힌 레델의 억센 손길이었다.
“일족의 증표를 지닌 이는 가족과 같다. 가족끼리 그런 딱딱한 인사를 나눌 이유는 없지. 앉게나. 먼 길을 여행하느라 피곤할 터인데 조금은 편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그는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차려진 진수성찬이 있는 곳으로 손짓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날 붙잡고 이끌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천수만 명의 수인들 중 한 명이 준 증표로 여기까지 친근하게 대해주는 건 너무 하지 않나 싶어 동공 지진이 일어났지만, 정작 대족장 레델은 그런 내 불편함을 곡해해서 받아들이고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안쪽까지 맞이해 줄 수는 없지만 풍족한 식사를 제공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른 이들을 통해 음식은 전했으니 마음 놓고 먹게.”
“…감사합니다.”
뭔가 오해를 바로잡으려다가 괜히 이야기가 장황해질 것 같아 포기했다.
풀링도 그렇고 수인도 그렇고 이종족들의 친근감 포인트는 아직 내가 이해하긴 힘든 영역이었다. 그런 거로 시간을 보내며 불편해하느니 차라리 본론부터 꺼내는 게 나았다.
“이곳에 오며 이야기는 얼추 들었습니다만, 제가 이곳의 지식이 없어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째서 용이 마족의 접근을 막는 겁니까?”
“바로 본론이라니, 호쾌해서 좋군. 허나 우리도 이유를 모른다네.”
“…예?”
호탕한 웃음소리와 달리 멍청하게 느껴지는 대답이었지만 대족장의 표정만큼은 한없이 진지했기에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대충 칠면조 비슷하게 생긴 통구이의 다리를 뜯어 내게 건넨 대족장은 자기도 한쪽 다리를 뜯어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풍왕은 분명 용이지만 격이 낮아 몬스터에 가까운 존재라네. 대화가 성립하지 않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놈이 마족에게만큼은 아무런 자비도 베풀지 않는 잔혹한 성정을 지녔다는 것과, 그래도 우리에겐 거기까지 지랄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라네.”
수인들은 아무래도 대수로운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게 종족 특성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