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527)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527화(527/599)
[527화] 용살자龍殺者축하연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나서야 마무리되었다.
인족이었다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이 기회를 틈타 인맥을 다지고 윗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움직였겠지만, 수인들은 그저 순수하게 술과 음식만을 즐겼다.
나쁘게 말하면 뒤가 없이 노는 거였지만,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떠한 것도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축하한다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실제로 내가 보고 느낀 수인들의 모습도 그러했기에.
그 모습은 나뿐만 아니라 긴 행군 끝에 간만에 휴식을 얻게 된 우리 일행들에게도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영향을 줬는지, 안락함에 안주하기 위해 행군을 거절하거나 남기를 소망하는 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너무 길고 화려한 휴식이 앞으로 이어질 고난을 두려워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우려 했던 이들은 이 예상외의 결과에 크게 안도했다. 철없는 아이들조차 칭얼대는 일 없이 ‘다음엔 어디로 가?’ 같은 말을 해맑게 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긴 여행이 이어졌는데도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군.”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직접 움직인 레델이 부모들의 말을 듣고 마차에 오르는 아이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술 못 마시는 레델’ 이라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 축제 내내 대족장들과 함께 나에게 달라붙어 주량 대전을 펼쳤던 탓인지 이제는 그의 표정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단순히 음식과 편의 뿐만 아니라 장거리 여행을 위한 마차의 보수까지도 신경 써 준 그였기에 이제는 칼 칸시만큼이나 정겹기 그지없다. 어쩌면 고기를 더 떼어 주려고 했는데도 한사코 거절하며 호의를 거래로 만들지 말아 달라는 모습이 그림자 발을 떠올리게 만들어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대는 실로 용사의 귀감이라네.”
“제가 아니라 저들이 부모의 귀감이자 신앙의 귀감인 것이죠. 아이들은 저에게 말도 못 겁니다.”
당장 내가 지나가면 동경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자애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호다닥 도망친다. 쟤들 입장에서는 용사님이 뭐 하셨다, 뭐 해주셨다는 그냥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이 들려주는 재밌는 이야기에 불과할 터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냥 군인 아저씨들과 기사님들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 아직 16살인 몸이니 진짜 군인 오빠나 형이라고 불려야 하는 입장이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건 주변에 있는 어른들 덕분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그로 인한 결과를 저들이 사리사욕만을 위해 소비했다면 지금 행렬의 절반도 따라오지 못했을 겁니다.”
평소라면 입발린 말을 떠들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눈에 보이는 신앙의 힘이라는 건 굉장했고, 이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선행은 더욱 굉장했다. 처음 이 행군을 따라온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이미 심정이 남다른 자들만 걸러진 거겠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 단위, 달 단위의 피난길 속에서도 그게 이어진다는 건 역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론을 말했을 뿐이라 여기는 나와 달리 레델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크게 감격했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봐서 심히 부담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 작정하고 사탕발림을 할 때 이런 시선이 쏟아지는 건 의도한 바니까 상관없지만 의도한 것도 아닌데 이러면 역시 좀 그렇단 말이지.
“풍왕의 부산물은 내 이름을 걸고 제대로 이티스엘의 수도까지 가져가겠네. 다시 보는 날에는 인족의 술로 재대결을 해 보세.”
용의 피로 인한 해독 효과 때문에 절대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했음에도 포기를 모르는 정대만 같은 수인, 레델은 씨익 웃으며 악수를 권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게 힘써야겠군요.”
“하하하!”
레델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직접 이티스엘까지 물건을 배달할 테니 거기서 만나 한 판 더 술파티를 벌이자는 약속을 잡은 거였다. 그 미워할 수 없는 호쾌함에 기가 차면서도 웃음이 나와 내민 손을 맞잡으니 힘차게 손을 흔든다.
“‘밖’까지의 안내는 미녹카와 그의 부대원들이 해줄 것이라네. 부디 그대들의 신앙이 바로 설 수 있길 바라겠네.”
깔끔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레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발자국으로 향했다. 그 자리를 대신해 앞으로 나온 라쿤맨 미녹카가 되려 고개를 슬쩍 돌려 레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사람한테 귀찮은 일이나 시키는 주제에 본인은 엄청 호탕하단 말이지. 안 그런가 용살자?”
“그런 것 치고는 꽤 만족스러워 보이십니다만.”
“이것보다 배는 귀찮은 일을 군말 없이 하는 대족장이라서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
“술 마시는 거 빼고는 다 잘 하나보군요.”
가볍게 던진 농담에 라쿤맨을 비롯한 다른 수인들이 폭발하듯 웃음을 터트렸고, 그 큰 웃음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던 레델로 하여금 잠깐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수인들의 영역을 뒤로하고 다시 여행에 나서기에 딱 알맞은 유쾌함이었다.
◈
수인들의 영역을 벗어나는 길은 아무런 위협도 존재하지 않았다.
라쿤맨조차 이렇게까지 조용할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이라노레프가 죽으면서 이변이 생긴 것일지도 몰랐으나 어차피 그놈 아래로는 다 고만고만한 몬스터들이었기에 수인들도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안정적인 행군은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졌다.
“이 앞으로 반나절만 더 나아가면 영역을 벗어나네. 민간인들이 많으니 어쩌면 하루를 더 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방향이 이쪽이니까… 라이토르엔 대충 나흘 정도 후에 도착하게 되겠는데.”
아직은 해가 떨어지는 속도가 빨랐기에 서둘러 숙영지를 건설하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라쿤맨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칼 칸시가 라이토르까지의 일정을 계산하자, 지도를 보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계시던 데오니 성녀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이토르에도 귀는 있지만 저희가 수인의 영역에 있어서 그런지 아직 들어온 정보가 없습니다. 밖으로 나간 뒤에도 별다른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행군 속도를 조금 늦추고 직접 정찰에 나서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칼 칸시가 가져온 정보는 이미 들었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또 무슨 변화가 있었을지는 아무도 몰랐기에, 성녀님의 의견에 부정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밋, 원거리 감시 마법의 최대 거리가 어떻게 되나요?”
“매개체가 없으면 그리 효과가 좋진 못하네. 그래서 마왕군도 인족들의 군대를 감시할 땐 사역마나 정신 조종을 통해 몬스터나 동물들을 이용하지.”
“몬스터요?”
“어중간한 지능을 지닌 놈들은 생각보다 쉽다고 하더군. 보통은 조류를 이용하지.”
그 말을 듣고 나니 최전선으로 날아올 때 마주쳤던 하피 떼들이 생각났다. 유달리 공격적이고 겁대가리를 상실했다 싶었는데, 어쩌면 에밋이 말한 정신 조종의 결과일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결론은 소식이 없을 경우 발로 뛰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발자국에서 벗어나 처음 한 회의는 그렇게 뚜렷한 계획없이 끝났다.
지휘소를 벗어난 나는 용사라는 타이틀 덕분에 불침번조차 설 필요 없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끼며 숙면에 들어갔고, 분명 방금 눈을 감았던 거 같은데 어느새 밝아오는 태양을 바라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대들의 사냥이 항상 성공하기를 빌겠네.”
라쿤맨과 그 일행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귀환길에 올랐다. 그렇게 그들과 헤어지고 이어진 행군은 어김없이 평범했고, 슬슬 야영을 해야할 것 같다고 느낄 무렵 수인들의 영역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올 가능성을 대비해 소규모 정찰대를 경계 밖으로 보낸 뒤 꾸려지기 시작한 숙영지는 순식간에 모습을 갖추었으나 회의는 없었다. 하루 단위로 모여서 앞날을 예상하고 계획을 수정했던 초기를 떠올리면 굉장한 변화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평화에 찌들어 안일해진 건 아니었다.
“수인들의 영역이 주는 안락함이 크긴 크군요.”
그냥 마왕군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나게 편할 뿐이었지. 그동안 세이프 하우스가 따로 없었는데 내일이면 이것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에 식사를 이어 나가던 성녀님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비슷한 감상을 입에 담았다.
“부디 앞으로의 여정이 지금까지의 반만큼만 순탄하면 좋겠습니다만…”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똑같다는 걸 새삼 느끼며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웃음이 풀어진 것은 정찰병들이 귀환하며 들고 온 소식을 들은 다음이었다.
“라이토르 내부 상황이 저희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굳은 얼굴로 성녀님이 지휘소 탁자 위에 올린 종이에 담긴 내용은 간결했다.
[마왕군 특작부 개입. 상황 불리.]그리고 그 간결한 내용은, 나로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