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573)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573화(573/599)
[573화] The Road to Lich is paved with RAGE정신을 가격당한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언데드와의 연결이 끊겨 버린 리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불쾌감이라는 감정에 이를 부딪치며 웃어 보였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공명하는 탓에 같은 방바닥에 대충 쓰러져 있던 마족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그 외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른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리치가 웃음을 멈춘 거였다.
“꽤나 과격한 것들이 왔군.”
오로지 마력과 혼만으로 유지되는 해골에게 감각이나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처음 리치가 되었을 땐 학습된 습관과 경험들로 인해 그러한 것들을 느낀다고 ‘착각’했었으나, 아직까지도 그러기엔 리치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도 길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자극도 느낄 수 없는 건 아니다. 자극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지.
예를 들면, 방금처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드는 신성에 직격당했을 때라던가.
“이 일대는 마왕군이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교단의 끄나풀이가 대뜸 치고 들어올 줄이야.”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불쾌감을 느낄 정도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리치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머지않아 자신에게 이 불쾌감을 선물한 존재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겨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을 욕보이고 필멸자들을 농락하는 것.
리치에게 있어 마법을 연구하는 것 이상으로 쾌락을 안겨주는 몇 안 되는 행위였다. 한동안은 자질구레한 거래와 관련된 일만 해 오던 리치는 모처럼만의 유희거리에 기뻐하며 몸을 일으켰다.
“지난 방문 때 받은 실험체들을 써볼까…”
이제는 스스로의 성별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 아직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였던 시절의 리치는 스스로의 힘으로 리치가 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죽음을 목전에 둬야 했다.
죽음의 불안, 밀려오는 후회, 삶에 대한 갈망과 자신이 닿지 못한 경지를 향한 애증 속에서 발버둥 치던 그가 악마와 계약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악신의 추종자들보다는 악마를 만나는 게 더 쉽던 시절이었다. 간만에 아련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감회가 새로워진 리치는 퍽 즐거운 마음으로 여러 가지 기억들을 회상하다가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신앙심이 깊은 자의 혼을 제공하면 별도의 도움을 준다고 했었지.”
워낙 오래된 약조인 데다가… 리치가 될 당시 외에는 성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 보니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성직자들의 혼을 대가로 이런저런 이득을 봤었지. 성법을 구사할 수 있는 전사였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 게 분명하다고 여긴 리치는 주저 없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지팡이를 마법으로 움직여 마법진을 그리며 주문을 외웠다.
“나, 필멸의 굴레를 버리고 수탈收奪의 업을 진 채 과거와 싸우는 자로서 그대를 바라노라.”
마법진이 완성되고 주문이 이어질수록 같은 공간에서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마족의 몸이 이번엔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바람에 휘둘리는 회전초처럼 데굴데굴 굴러 리치의 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리치는 거기에 관심을 두는 일 없이 계속 주문을 영창했고, 이내 초점을 잃은 마족의 눈에서 스멀스멀 피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산 것의 피와 신성을 저주하는 마음을 담아 그대에게 건넬 잔을 채우니, 오랜 약조에 따라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낼지어다…”
마족의 피는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르거나 바닥에 떨어지는 일 없이 허공을 배회한다. 그리고 점차 지팡이가 그려놓은 마법진을 채우듯 움직이며 붉은 문양을 완성해나갔다.
그렇게 모든 마법진이 피로 완성되고 마족이 완전히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주문이 완성되었다. 오랜만에 시도했음에도 깔끔하게 성공한 주문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리치는 힘 있는 어조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거래에 응하라, 악마 잉글라디우.”
그저 피가 맺혔을 뿐이었던 마법진이 붉게 타오른다. 시뻘겋던 불길은 이내 푸른빛을 띄며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환 의식은 완벽하다. 이제 악마가 모습을 드러낼 떄였다.
“……?”
분명 그랬을 터였다.
“…거래에 응하라, 악마 잉글라디우!”
불길은 여전히 거세게 타오른다. 주문이 옳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마지막 말을 반복해서 입에 담을 때마다 불길은 더욱 거세진다. 악마를 불러내기 위해 더욱 강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래에 응하라! 악마 잉글라디우!”
그런데 어째서인지 당사자가 나오질 않는다. 이쯤 되니 오래전에 인간성과 함께 없어진 줄 알았던 의구심마저 되살아났다.
“……죽었나?”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악마는 물질계에서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불멸, 불사인 건 아니다. 신조차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데 악마라고 죽음을 완전히 피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세상, 흔히 만마전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경우 두 번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소멸을 겪는다는 것까지는 리치도 알았다. 하지만 잉글라디우가 그렇게 죽었다면 소환 의식이 성공하면 안 됐다.
“이게 대체 무슨…”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잉글라디우 본인이 소환에 응하는 걸 거부하고 있다는,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기어이 참지 못하고 투덜거림을 내뱉으려는 찰나.
“후우! 이야, 이거 미안하게 됐어 해골 선생! 잠깐 착오가 있어서 말이지!”
얇고 경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함께 악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는 잉글라디우가 아닐진대?”
무지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형형색색 물든 긴 머리카락.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드레스를 전투용 의복으로 개조한 것 같은 기묘한 차림.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
리치가 기억하는 잉글라디우라는 악마는 저렇게 정신 사나운 몰골이 아니었다.
“하아아아아…. 이게 말하자면 정말정말정말 저어엉말 긴 이야기인데 말이지. 나랑 대신 거래한다고 장담해주면 짧게 요약해서 말해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때?”
심지어 복장뿐만 아니라 행동거지와 말투마저 정신 사납다.
악마라기보단 어릿광대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그 혹은 그녀는 악마가 분명했기에 리치는 의문을 지우고 정신을 다잡았다.
“…뭐든 상관없겠지. 신앙심을 지닌 영혼을 바치고 대가를 받고 싶었을 뿐이오. 이 거래에 응할 생각이 있다면 이름 모를 악마인 그대와 거래를 해 볼 의향도 있소.”
“아주 좋아! 받아들이지! 사실 별거 아니야. 잉글라디우 그 머저리는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더라구. 딱히 해골씨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
악마가?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 진짜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뿐만 아니라 그 내용 때문에 있지도 않은 미간이 일그러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광대 같은 악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무튼, 그렇게 빈 자리에 누가 가도 신경 안 쓸 거 같길래 바로 나, 세닛히구아가 몸소 강림 하셨다는 거지! 내가 가려니까 뒤늦게 뭐라고 발악하는 거 같긴 했는데 딱히 중요하진 않을 거야. 빨리 움직이는 악마가 영혼을 갈취한다? 그런 거 아니겠어? 하! 하! 하!”
“세닛히구아…?”
“그래! 그게 내 이름이야. 아, 혹여라도 들어 본 적 없을까 싶어서 기억을 되새겨보는 시간 낭비는 하지 않길 바랄게. 난 그리 유명한 악마가 아니거든. 그래도 잉글라디우 대신 일을 처리할 정도는 되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세닛히구아라고 자신을 밝힌 악마의 말을 들으면서도 리치는 기억을 되짚는 걸 멈추지 않았으나, 정말로 떠오르는 건 없었다. 정작 세닛히구아 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이미 말라 죽어 버린 마족 옆에 누워 마족의 머리카락을 인중에 끼워 콧수염을 흉내 내는 등의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는 중이었으나, 유명하지 않은 악마와 거래한다는 건 말처럼 가벼운 일이 아니다.
악마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딱 두 가지뿐이다.
잔챙이 이거나,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 자들을 은밀하고 확실하게 파멸로 이끌어가며 자취를 감추었거나.
“그래서? 뭘 부탁하려고 그러나?”
콧수염에 어울리는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라도 하는 것인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중저음을 흉내 내며 콧잔등을 찡그리는 악마의 행동은 천진난만하기 그지없어 보였지만 리치는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그냥 거래를 원할 뿐이오. 내가 영혼을 채취하고, 그대에게 판다. 딱 그뿐이지.”
“흥정인가? 흥정 좋지! 그래, 물건은 어디 있나? 보여 줄 수 있어?”
“다른 언데드와 연결해서 확인하려고 하면 자꾸만 매개체를 파괴하는 바람에 당장 보여 줄 순 없소. 하지만 곧…”
“에이, 나 그런 거 못 참아. 기다려 봐, 내가 직접 보면 되지 뭐.”
아직 사후 경직이 일어나지 않은 마족이 시체를 마치 꼭두각시 인형 움직이듯 가지고 놀던 세닛히구아의 흰자위가 돌연 까맣게 물들더니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인식조차 못 할 정도로 순식간에 완성된 빙의 마법에 리치가 내심 놀라는 사이 동공없이 새까맣기만 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세닛히구아의 입이 길게 호를 그렸다.
“찾았…끄악!”
그와 동시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틈도 없이 대뜸 세닛히구아가 쥐고 있던 마족 시체의 머리통이 반으로 쪼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