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ly Do Not Touch Eldmia Egga RAW novel - chapter (84)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84화(84/599)
일반적으로 살면서 마음대로 되는 일은 몇 가지나 있을까?
잘은 몰라도 최소한 내 이번 생에서만큼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꽤 많은 편이다.
물론 첫 단추를 거창하게 부숴먹은 마왕군 씹새를 죽인 뒤에야 현생을 논할 여유가 생기겠지만, 적어도 그걸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생각보다 순탄한 것도 사실이니까.
근데 또 이게 마냥 계획대로 굴러간다고해서 마음 편한 것도 아니라는 게 탐탁지 않은 부분이다.
프로그래머들은 프로그램에 버그가 있어도 문제, 버그가 없어도 문제라고 했던가? 딱 그런 상황이라는거지.
아예 인지를 못하면 모를까,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명확하게 알고 있는데도 여기까지 순탄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판타지 세계답게 온갖 이종족에 신적인 존재에 초월자 뺨치는 해괴한 놈들이 공존하는 곳이라 더 하다.
나도 모르게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무언가에게 저항조차 못하고 두 번째 삶마저 끝장나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 항상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꾸준히 내 신경을 갉아 먹는다. 내가 이래서 강박증에서 벗어나질 못해.
그나마 그걸 버틸 수 있는 건 순전히 내가 한 번 더 살고 있기 때문이지 정신 공격에 면역 같은 속 편한 패시브 스킬이 있어서가 아니다.
형체 없는 불안감을 이겨내는 노하우 한 두 개 정도는 달고 사는 게 사회인 아니겠어?
“이 꼬치구이는 참으로 신묘한 맛이 나는구나. 질이 떨어지는 고기를 강한 양념에 재워두는 것으로 눈가림을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자꾸 손이 가느니라.”
“천천히 먹어. 그런 건 너무 갑자기 먹으면 배 아파.”
“음. 확실히 후환이 두려울 정도로 자극적이긴 하느니라.”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에스뮈에는 그렇지 않다. 얘는 그냥 평범한 천재다.
평범한 천재라는 게 좀 어처구니 없긴 하지만 근처에 이세계 전생자가 둘 씩이나 있으니 천재 정도는 평범하지.
아무튼, 그녀가 천재라 한들 인생 첫 트라이인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고, 천재이기에 주변에서 경외하고 숭상하여 고고히 홀로 서 있기를 강요 받다보니 쉽게 고립된다. 심지어 역대급으로 기대받는 유망주라니 말 다했지.
그런 상황에서 오만한 것도, 안일한 것도 아닌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이가 매번 새로운 위협을 예상하고 준비하고 나아가는 게 과연 말처럼 쉬울까? 힘들다고 터놓을 상대 한 명 없는 상황인데?
내 눈에는 용사가 느꼈을 고독감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걸 품고 있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걘 지 몸 하나만 감수하면 되지. 에스뮈에가 감수해야하는 건 제국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이런 것들을 모르고 지낸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로고.”
베시시 웃는 모습은 영락없이 평범한 소녀다.
철혈 황녀로 불리고 실제로 감히 엄두도 안 날 정도로 정치를 잘 한다 한들 희노애락을 느끼는 건 똑같다. 어디 하나 뒤틀린 감성을 지닌 존재인 것도 아니다.
그런 애를 숭배하다니, 신이 있는 세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기준에서는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다.
물론 이해는 한다. 그녀가 자신이 맡는 일을 너무나도 잘 해온 것이 문제인 거겠지. 그러니까 그녀를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지금도 이 시장 곳곳에 퍼져있는 수준급 기사들이 정체를 숨기고 입을 꾹 닫은 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이 당장 뛰쳐나오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에스뮈에가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가 올바른 판단과 정확한 지시를 내릴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내가 수업마저 제끼며 그녀를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나와서 원래대로라면 황녀에게 감히 입힐 수 없는 평범한 옷을 입힌 채 길거리 싸구려 음식들을 먹고 먹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거다.
이 무슨 광신도적인 신뢰란 말인가. 18살짜리 애한테 어른들이 보일 태도는 결코 아니라는 게 내 소신있는 의견이다. 능력을 존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야 이건.
저런 사람들에게 둘러쌓인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뛰어난 인재라는 반증일지는 몰라도, 평범한 사람인 내 입장에서는 제대로된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한 채 모두를 이끌고 나아가야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질주하다가 언젠가 번아웃으로 나자빠지기 딱 좋은 극한의 환경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예 내 눈에 안 들어왔으면 모르겠는데 이미 들어온데다가 호감 스택까지 쌓아버린 이상 그 꼴을 마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최소한 그녀가 정말 천재 중에서도 끝판왕급 천재여서 내 이런 모든 게 기우에 불과했다는 식의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
에스뮈에는 나에게 황녀이기 전에 햄찌다.
“나도 이렇게 노는 건 정말 오랜만이니, 신나게 즐겨보자고.”
“후후. 기대되는구나. 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이니 에스코트를 기대하겠느니라.”
귀여운 우리 친구 햄찌.
그리고 엘드미아 에가는 친구를 버리지 않지.
◈
수도를 종횡무진 돌아다녀도 자신을 알아보고 기겁하거나 무릎을 꿇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서 자신감을 얻은 에스뮈에는 상당히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중 대부분은 먹거리라는 게 또 재밌는 점이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갖 고급진 치장품과 의상들은 다 겪어 봤을 그녀이기에 처음보는 서민들의 먹거리가 가장 흥미로울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오그웬은 언급할 가치도 없고, 이티스엘의 수도조차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여가 시설이 풍부한 제국의 수도는 그만큼 먹을 것도 많았고, 우리는 지루할 틈 없이 가게들을 구경하며 이것저것 사 먹으면서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스뮈에도 보다 활달하게 움직인 덕에 우리의 먹거리 투어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어질 수 있었다.
에셀루아만 하더라도 용사랑 끈적하게 붙어다니는 걸 보면 딱히 제국의 황녀라고해서 이런 여가 활동을 못하게 막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무래도 업무에 치이며 지낸 세월이 길다보니 시간도, 기회도 놓친 듯 싶다.
그렇게 다양한 군것질을 하고도 모자라서 저녁 식사까지 마쳤을 즈음엔 이제 내 어깨 위에서 능숙하게 자리를 잡는 에스뮈에만이 남아있었다. 맨몸이었다면 아무리 그녀가 가벼워도 진즉에 어깨가 작살났을 테지만 마력 앞에서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거 참. 아카데미에서의 모습은 순 내숭이 아니었느냐 엘드미아여.”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고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능력이라고 해줬으면 좋겠네. 내숭과는 차원이 다르지.”
“하여간 설득만 능해서는…”
웃으면서 익숙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앙증맞지만 따스했다.
감시 중인 기사들도 퇴근은 해야한다는 이유로 적당히 일탈을 마무리 지은 우리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내가 그들을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딱히 놀라지 않은 에스뮈에는 조금 아쉬움이 남은 듯했지만 주저하지는 않았다.
“지금에와서 하는 말이다만, 왜 갑자기 무단 결석을 하고 놀러 나오자고 한 게냐?”
“처음 만난 날 말했잖아. 도구도 쉬지 않고 쓰면 제 명을 다하는 법인데 사람이라고 별 반 다르겠냐고.”
“여도 쉴 땐 쉰다만?”
“한 나라를 이끌 사람이 쉰다고 해봤자 얼마나 쉬겠어. 쪼개던 수면 시간을 좀 더 늘리는 정도겠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해서 할 말이 없을 정도구나.”
진짜였냐고. 아무래도 에스뮈에의 빈약한 성장은 적은 수면 시간에 영향을 받은 거 같다.
“이리도 총명한데 어째 눈치는 없을꼬..”
“눈치 빼면 시체인데요.”
“그렇다면 여는 지금 시체를 타고 있는 것이니라.”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에스뮈에였다.
얘가 내가 다 대 일로 싸우는 걸 봐야 이런 소리를 안하지. 내가 눈치가 없었으면 이미 네 번 정도는 더 죽었을텐데 말이야.
“어째 머리에서부터 불만의 기운이 샘솟는 느낌이니라.”
“아니, 그게 느껴진다고?”
“후후. 글쎄다? 하지만 눈치 빠른 엘드미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저 앞에 서 있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구나.”
“에?”
저 앞에 있는거라고는 우리 저택 밖에 없는…데…
음. 지금은 라그니스도 있네.
대체 뭐라고 해야할지 속으로 진땀을 빼며 다가가니 의외로 에스뮈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도 타보겠느냐? 의외로 안정감이 있느니라.”
“황녀님이 아니라 에스뮈에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니라. 여는 유리하고 불리할 때를 구분지어 권위를 내세우지 않느니라.”
“좋습니다 에스뮈에. 저희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에스뮈에를 내려주며 슬금슬금 눈치를 봤지만 라그니스는 에스뮈에하고만 이야기 할 요량인지 나를 따로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최근에 보여준 모습과 달리 차분했으니…별 문제는 없겠지…?
“엘드미아 경은 저하고 이야기 좀 하죠.”
그렇게 안도하려는 찰나 딱 봐도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레니사가 나를 붙잡았다.
그래. 잘못한 건 잘못한거니까. 달게 받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