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03)
103. 백수제(3)
#103
로난이 라만차를 납도하며 일어섰다. 농담으로 받아치기에는 나비로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라면 괜찮겠지. 도플갱어들이 사라졌다.”
“네?”
“설명할 시간이 없다. 협조할 의사가 있다면 따라오도록.”
나비로제는 그 말과 함께 등을 돌렸다. 잠시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깜빡이던 로난과 아데샨이 그녀를 뒤따랐다.
세 사람은 최소한의 조명만 켜진 복도를 따라 걸었다.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벽과 바닥을 타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자정에 근접한 시간이라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데샨이 양팔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밤이라 그런가? 좀···으스스하네.”
“선배가 여명 마탑을 가봐야 하는데. 내가 불이 다 꺼진 도서관에서 뭘 봤냐면요···”
“하, 하지 마!”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예상과 달리 이동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나비로제는 어느 거대한 이중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다.”
“의외로 가깝네요. 갈레리온에 있었구나.”
도플갱어를 가뒀다는 장소는 갈레리온 관에 자리한 소연회장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비로제가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수색을 마저 하겠다. 자세한 사항은 관계자들에게 전달받도록.”
“아, 고마워요.”
“그리고 투기장 말고도 좋은 곳이 많지 않느냐? 사계의 언덕이라거나. 이해가 안 가는군.”
“예?”
“됐다. 간다.”
나비로제는 이해 못할 말을 남긴 채 발걸음을 돌렸다. 아데샨의 얼굴이 단풍처럼 달아올랐다.
“그, 그런 게···.”
“무슨 소린지.”
어깨를 으쓱인 로난이 문을 열었다. 널찍한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곱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죽상을 지은 채 소연회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황상 모두 백수제의 관계자로 보였다. 교수진으로 보이는 사람이 둘, 갑옷을 입은 수위가 넷. 한 명은 교복 차림의 남학생이었는데, 웬지 모르게 얼굴이 익숙했다.
“응?”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남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로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히이익?!”
“뭐야?”
새하얗게 질린 남학생이 고개를 확 숙였다. 영문 모를 행동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연회장 한구석에서 잠옷 차림으로 서 있는 웨어라이온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이 책임자였지. 살금살금 다가간 로난이 그의 등을 쿡쿡 찔렀다.
“바렌. 나 왔어요.”
“로, 로난? 여긴 어쩐 일로···?”
“나비로제 교관님이 도와주라면서 보냈어요. 도플갱어가 사라졌다면서요?”
예상치 못한 만남에 바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갈기를 한 번 쓸어넘긴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그렇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바렌의 몰골은 로난의 동아리 활동 보고서를 읽은 직후만큼이나 초췌해져 있었다. 윤기가 흘러야 할 갈기는 상한 비누처럼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벌어진 그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자살할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갑자기 도플갱어가 들어 있는 궤짝이 열렸습니다. 이게 악몽이라면 부디 누군가 깨워줬으면 좋겠군요···.”
“궤짝?”
로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대한 궤짝 두 개가 입을 벌린 채 소연회장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굉장히 복잡하게 생긴 자물쇠 네 개가 그 아래를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게 간수 좀 잘 하지. 꿈새랑 만티코어 때도 그렇고 영 칠칠치 못하네요.”
“끄흐흑···저도 노력했습니다. 절대 풀 수 있는 자물쇠가 아니었는데···!”
바렌은 양손으로 갈기를 쥐어뜯으며 흐느꼈다. 그는 백수제에 차질이 없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도플갱어를 관리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수 제작한 자물쇠로 궤짝을 잠그고 바렌을 포함한 아홉 명이 소연회장에 자리를 잡았다. 어중간하게 자리를 비우거나 경계를 세워서 빈틈을 만들 바에는 다같이 밤을 지새우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상황을 떠올리던 바렌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실을···화장실을 다녀왔으면 안 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플갱어들은 탈출했다. 그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다. 두 개의 궤짝은 덩그러니 열려 있었고, 소연회장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두 마리의 도플갱어는 서리 트롤과 매력적인 금발 여인, 거대한 거미와 모두의 어머니로 모습을 뒤바꾸어 가며 탈출을 감행했다. 사람들은 그 괴이한 생명체를 저지하지 못했다. 외부인의 침입에는 대비가 되어 있었지만, 설마 내부에서 도플갱어가 바로 풀려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물쇠는 어쩌다 풀린 거예요? 특수 제작까지 했다면서요.”
“그, 그게 정말로 의문입니다. 이 열쇠가 없다면 절대로 풀 수 없는 자물쇠거든요. 열쇠는 저만 가지고 있고요.”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바렌이 열쇠 꾸러미 하나를 꺼내 보였다. 자물쇠만큼이나 복잡하게 생긴 열쇠 네 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는 세상 침울한 목소리로 자신이 제작한 자물쇠의 장점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면 조금 구차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만, 정말로 좋은 자물쇠입니다. 미스릴 코팅이 되어 있어서 부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고, 잠금해제 마법 방지 인챈트도 되어 있지요. 그런데 풀렸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바렌. 나한테 그 자물쇠 팔 생각 아니면 조용히 해요.”
“죄송합니다···.”
주절대던 바렌이 고개를 떨궜다. 그런 대단한 자물쇠가 열린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자물쇠가 풀리는 과정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로난이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폐급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뭐가 됐든 그냥 감시만 제대로 했으면 될 일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경계근무를 서던 작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흠씬 패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백수제가 한나절도 남지 않은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도플갱어의 포획. 머리를 거칠게 긁적거린 로난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사람들부터 다 깨워서 잡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예요? 당장 내일이 축제잖아요.”
“그, 그건 곤란합니다. 도플갱어가 군중 틈에 섞여들면 포획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올라가서요.”
“그럼 어떡해요?”
“가급적이면 소수 인원으로 수색에 나서려고 합니다. 도플갱어를 제압할 수 있는 강인한 분들로요.”
별안간 바렌이 로난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솥뚜껑같은 손이 바들바들 떨려오고 있었다.
“로난 학생이 도와준다면···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애초에 도와주러 왔는데요 뭐.”
로난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바렌을 뒤로 하고 아데샨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소연회장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일에는 저만한 사람이 없지.’
수사와 추격에서 아데샨의 통찰력은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로난이 막 그녀를 부르려는 차였다. 별안간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혹시 잠깐 괜찮으십니까?”
“음? 너는 아까···.”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웬 빼빼 마른 소년 하나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조금 전에 눈이 마주쳤던 놈이었다. 불현듯 그의 이름을 떠올린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라코타?”
“네, 네···맞습니다.”
“그래, 소문 들었어. 약초 따다가 길 잃어서 실종 처리 됐다면서. 어린 놈이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해?”
“아···아하하···그랬었죠.”
라코타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여러모로 어설프다는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손발을 배배 꼬는 모습을 본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왜 그렇게 몸을 꼬아? 똥 마렵냐?”
“그···혹시 잠깐만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남자랑 같이 화장실 가는 취미는 없는데.”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잠깐, 진짜 잠깐이면 됩니다.”
“쯧···바빠 죽겠는데. 별 거 아니기만 해 봐.”
평소에 인사도 안 하던 놈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로난이 라코타를 따라가려던 차였다. 불현듯 뒤쪽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야?”
수위 한 명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투구를 뒤집어 쓰고 있는 탓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라코타와 아는 사인가?’
하도 대놓고 쳐다봐서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로난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기나긴 복도를 지나 계단까지 내려갔다. 참다 못한 로난이 짜증스레 물었다.
“어디까지 가?”
“제발···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고 따라와 주세요. 부탁입니다.”
목소리가 간절했다. 한숨을 내쉰 로난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멈추지 않고 걷던 그들은 결국 아래층 복도 끝의 화장실까지 이르렀다.
“결국 화장실이었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은은한 촛불이 소변기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라코타는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라면···괜찮겠군요.”
“음?”
별안간 라코타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딸깍. 단추를 누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그의 주머니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마나의 파장이 번져 나왔다. 파앙! 순식간에 펼쳐진 반구형의 장벽이 두 사람을 뒤덮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뭐야?”
로난은 외부의 소음이 일절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역시 애용해 왔던 사일런트 마법이었다. 라코타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이제야 대화를 할 수 있겠군요.”
“얼마나 중요한 비밀을 말해 주시려고?”
로난이 헛웃음 쳤다. 난데없이 사람을 부르더니 왜 이런 지랄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던 라코타가 입을 열었다.
“···악마의 전령은 보이지 않는군요.”
“뭐?”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나잇대가 비슷해 보이기는 했지만 설마 필레온에 다니고 계셨을 줄이야···.”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흑마법사였다는 것도 거짓말이었겠군요. 사실 중간부터 예상은 했습니다만.”
난데없이 흑마법사라니? 알아들을 수 없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드는 헛소리였다.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라코타가 말을 이었다.
“…제가 했습니다.”
“음?”
“자물쇠를 해제하고 도플갱어들을 풀어준 것 말입니다. 제가 했습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주먹만한 짱돌에 머리를 맞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그가 라코타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니가 풀어줬다고?”
“네.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자칫하면 피를 보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뻔 했거든요. 다른 조직원이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야 했습니다.”
“피? 조직?”
“당황스러워도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당신이라면 이 사태를 막을 수···”
라코타가 뭐라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바람처럼 달려든 로난이 그의 배를 걷어찼다. 뻐억! 라코타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소변기에 처박혔다.
“어윽! 자, 잠시만···.!”
라코타가 팔을 들어 저지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로난은 그의 머리채를 강하게 움켜쥠과 동시에 라만차를 뽑아들었다. 통증에 신음하던 라코타가 얼어붙었다. 검은 칼날이 그의 목울대와 맞닿아 있었다.
“히, 히이이익···!”
“움직이면 뒈진다. 개수작 부리지 마.”
“지, 진정하세요···! 제발···!”
야윈 목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난은 칼을 거두지 않았다. 라코타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다소 비열한 인상을 주던 중고음은 차분한 저음이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 누구냐?”
분명히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라코타가 바들거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지, 지,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그러니 이 칼 좀···!”
“이대로 해.”
“네, 네···알겠습니다. 흐윽···!”
별안간 왼쪽 귀 아래를 긁듯이 붙잡은 그가 손을 잡아당겼다. 촤아악! 희멀건한 피부가 허물처럼 뜯겨 나가며 가무잡잡한 면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너는···!”
“저, 접니다. 발루스···! 기억 안 나십니까?”
라코타의 목에서 칼날이 떨어졌다. 정보를 인지하는데 실패한 뇌가 삐걱이고 있었다.
밀렵꾼 발루스. 로난의 징벌 부대 동기이자 대륙에서 손꼽히는 밀렵 조직 카리볼로의 말단. 시타를 부화시킨 자리에 있던 밀렵꾼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감정을 추스른 로난이 입을 열었다.
“···니가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