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04)
104. 백수제(4)
#104
“···니가 왜 여기 있어?”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밀렵꾼 발루스. 로난의 징벌 부대 동기이자 대륙에서 손꼽히는 밀렵 조직 카리볼로의 말단.
과거 로난은 그에게 자신을 흑마법사로, 시타를 악마의 전령이라 속여 가짜 계약을 맺게 했다. 꼼짝없이 속아 넘어간 발루스는 카리볼로에 대한 정보를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첩자가 되었다.
그것이 발루스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찰나 머릿속을 떠다니던 조각들이 맞춰졌다. 밀렵꾼, 진귀한 환상종이 한 자리에 모이는 축제. 상황을 파악한 로난이 눈을 치켜떴다.
“이 개새끼. 기껏 살려줬더니 다시 밀렵꾼 노릇이나 하기로 한 거냐?”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제발···.”
“설명해. 간단하고 명료하게.”
“어윽!”
로난이 머리채를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발루스는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몇 차례 심호흡한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카리볼로에서 큰 작전을 하나 진행하고 있습니다. 백수제가 열리기 전에 도플갱어를 비롯한 희귀한 환상종들을 탈취하는 게 목적이죠. 저도 작전 인원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네. 카리볼로 정도 되는 조직이면 돈줄도 많을 텐데, 왜 필레온까지 기어들어와서 이 지랄을 떨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작전입니다. 최근 들어 조직의 위상이 말이 아니거든요.”
발루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밀렵 조직 카리볼로는 창설 이래 유례없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제국령 내에 있는 지부 몇 개가 차례대로 궤멸당하고, 제국 밀렵 단속반의 전력이 배 수준으로 강화된 탓이었다. 곰곰히 상황을 정리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가 바뀌었군.’
원래대로라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건재할 조직이었다. 발루스의 첩보활동으로 시작된 눈덩이가 착실하게 구르고 있는 듯했다.
“돈이나 다른 환상종 따위는 부록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필레온의 보안을 뚫고, 세상에 단 둘뿐인 도플갱어를 탈취하는 행위 그 자체지요. 카리볼로의 올가미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대륙 전역에 알리는 것이 조직의 목적입니다.”
“하긴 니네 조직 정도가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긴 하지.”
로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레온 아카데미를 건드리다니, 대륙에서 제일가는 밀렵 조직이 아니라면 감히 발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 너 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쫄따구 아니었냐? 이런 중요한 작전에 투입됐다고?”
“그게···부끄럽지만 인정받고 말았습니다.”
“인정?”
“네. 첩자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했는데···상부에서 그걸 좋게 본 모양입니다.”
발루스가 무안하다는듯이 뺨을 긁적였다. 요컨대 첩자질을 하기 위해 조직의 일을 열심히 처리했는데, 그게 눈에 띄어 승진을 거듭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갈수록 양질의 정보를 빼돌릴 수 있게 되었죠. 울칸토 지부의 모든 문서는 저를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이가 없구만.”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전생에서는 밀렵하던 이야기나 지껄이며 껄렁이던 양아치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문서 작업이나 정탐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발루스는 이번 도플갱어 탈취 작전에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미리 잠입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열쇠를 복사했습니다. 바렌이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녀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죠. 어쨌든 해내긴 했습니다만.”
발루스의 임무는 학생으로 위장해서 백수제와 도플갱어에 대한 정보를 긁어 오는 것이었다. 그가 필레온에 잠입한 것은 보름 전. 정확히 라코타가 사라졌던 날과 일치했다. 로난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 라코타는 어디 갔냐? 죽였어?”
“저희 측에서 납치해서 데리고 있습니다. 아직 건강하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발루스는 인질극을 위해 라코타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가 갇혀 있는 장소까지.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죽지 않았다면 구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도플갱어는 왜 풀어준 거야? 시간이 없다는 건 무슨 소리고.”
“인명 피해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풀어줬습니다. 바렌을 비롯한 모두가 그 자리에서 경계를 설 줄은 몰랐거든요. 만약 제가 그때 도플갱어를 풀어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조직원이 익스플로전 스크롤을 발동시킨 뒤 도플갱어를 챙겨 갔을 겁니다.”
“니미, 그 자리에 밀렵꾼 새끼가 하나 더 있었다고?”
“네. 시간이 없다고 한것도 그 때문이지요.”
발루스는 자신을 제외하고도 필레온에 잠입한 밀렵꾼들이 있다고 했다. 필레온의 보안이 뚫린 걸 보면 어지간히 철저히 준비한 작전 같았다. 바닥에 침을 뱉은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랄났네. 이놈의 학교는 조용할 날이 없어.”
“면목없습니다. 그···로난 님이라고 하셨죠.”
털썩. 별안간 발루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느닷없는 행동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지금 뭐 하냐?”
“염치없고 뜬금없는 부탁인 걸 알고 있습니다. 카리볼로를 막아주십시오.”
“안 말해도 그럴 거긴 한데···갑자기?”
“당신을 만난 이후 저는 밀렵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도플갱어가 조직의 손에 먼저 들어간다면 그간 잦아들었던 패악질이 다시 들불처럼 번질 겁니다.”
발루스의 입에서 흐느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카리볼로의 행각을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었다. 그간 첩보 활동을 하면서 끔찍한 꼴을 어지간히도 많이 봐온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난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거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을 텐데.”
“조직에서 나오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그렇지. 솔직해서 좋네.”
로난이 낄낄거렸다. 발루스는 자력으로는 결코 발을 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지옥 같은 나날을 계속 보내게 될 것이고, 작전이 실패해서 혼자만 살아서 돌아간다면 책임을 물고 처벌받을 가능성이 컸다.
‘많이 부려먹긴 했지.’
애초에 옛 동기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발루스는 카리볼로에 심어져 있는 동안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는 활약을 해주었다. 원체 능력도 있는 놈이니 수틀리기 전에 빼오는 것이 맞는 판단이었다. 결단을 내린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았으니까 일어···음?”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별안간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픽 웃은 로난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자리를 너무 오랫동안 비웠나 보다.”
“네?”
“아까 소연회장에 있을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어. 계속 꼬나보더라고. 기척 감추는 걸 보니 제법 쓸만하네.”
“그게 무슨···어어?!”
별안간 발루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가 로난의 뒤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뒤, 뒤쪽에!”
“나도 알아.”
로난은 칼을 뽑아듬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서걱! 매끄러운 검로를 따라 피보라가 튀었다. 단검을 쥔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허어억!”
몸을 완전히 돌린 로난이 칼을 고쳐 잡았다. 전신 갑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잘려나간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소연회장에서 로난을 힐끔거리던 수위였다. 깔끔한 절단면에서 피가 울걱울걱 솟구치고 있었다. 투구의 가느다란 틈새로 핏발 선 눈동자가 번득이고 있었다.
“바, 발루스···이 배신자 새끼가!”
“히이익···!”
“역시 너였구나. 좆같은 밀렵꾼 새끼.”
한순간 로난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검격이 수위를 향해 쏘아졌다. 서걱! 갑옷으로 뒤덮인 왼팔과 양쪽 발목 위에 붉은 선이 생겼다. 촤악! 절단된 갑옷의 틈새로 피분수가 솟구쳤다. 팔다리의 힘줄이 전부 끊어진 수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흐아아악!!”
“울거면 저 안에서 울어.”
로난은 수위의 팔을 붙잡아서 사일런트 마법의 범위 내로 던졌다. 개구리처럼 엎어진 수위가 재차 비명을 터트렸다. 건물이 쩌렁쩌렁 울리는 크기였지만, 마나로 이루어진 방음벽이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했다.
“맘껏 소리 질러도 되니까 좋지? 귀찮으니까 빨리 끝내자.”
“커억!”
퍽! 수위를 걷어차서 눕힌 로난이 그의 가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발광하는 수위의 목을 움켜잡으며 칼끝을 투구 틈으로 밀어 넣었다. 버둥거리던 수위가 삽시간에 얌전해져다.
“흐어억···누, 눈은 안 돼! 제발···!”
“그래. 이제 혼자 걷지도 못할 텐데 앞까지 안 보이면 얼마나 서럽냐.”
시커먼 칼끝이 그의 눈동자에 겨누어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버둥거리면 각막에 구멍이 뚫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깡깡. 수위의 투구를 노크하듯 두드린 로난이 말을 이었다.
“싹 다 불어. 몇 명인지, 어디에 있는지.”
****
그로부터 십 분 정도가 지났다. 로난은 발루스를 남겨둔 채 소연회장으로 돌아왔다. 핏자국을 지우고 병신이 된 수위를 숨기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서둘러야겠군.’
전부 도플갱어를 찾으러 떠났는지 소연회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아데샨만이 남아 도플갱어가 들어 있던 궤짝을 괜스레 여닫으며 로난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 왔네 로난. 같이 갔던 애는?”
“변기에 빠져서 씻고 있어요. 아마 오래 걸릴 거예요.”
“으응? 변기···?”
“선배, 잠깐 나 좀 봐요.”
소연회장의 문을 닫은 로난이 아데샨을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는 발루스와 수위로 위장한 밀렵꾼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미, 밀렵꾼?! 지금 필레온에?”
“네. 크게 벌일 일은 아니고,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요. 종이랑 연필 있어요?”
“있기는 한데···어디에 쓰려고?”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데샨에게서 수첩과 연필을 받아든 그는 수첩에서 종이 다섯 장을 뜯어낸 뒤 각각 다른 내용을 끄적였다. 작금의 상황과 밀렵꾼들이 활동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정보였다. 연필을 내려놓은 로난이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선배, 혹시 이제 새도 조종할 수 있어요?”
“새?”
“네. 일곱 마리만 불러 주세요. 똘똘한 놈들로.”
영문 모를 소리였지만 표정 하나만은 진지했다. 아데샨이 창문을 열고 상체를 내밀었다. 맑고 서늘한 밤공기가 보름달이 비추는 교정을 표류하고 있었다.
주위를 훑어본지 머지않아 건물 지붕에 늘어선 채 졸고 있는 까마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기다란 손가락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이리 와.”
그림자의 마나가 전방으로 퍼져 나갔다. 잠에서 깬 까마귀들이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까마귀 일곱 마리가 소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아데샨의 앞에 도열해 있는 까마귀들의 눈동자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로난이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엄청 늘었네요. 생쥐랑 놀던게 엊그제 같은데.”
“네 덕이야. 이제 뭐 하면 돼?”
“이거 좀 다리에 묶어 주세요. 어디에 가라는 명령 정도는 내릴 수 있죠?”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과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쪽지를 까마귀의 발목에 하나씩 묶었다.
“좋아요. 받을 사람들을 말해 줄게요. 먼저 바렌이랑 나비로제. 그리고···”
로난은 쪽지를 전달할 일곱 명을 호명했다. 아데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당황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카, 카리볼로의 밀렵꾼들이라면서? 전부 실력자일 텐데 괜찮겠어?”
“그 정도는 잡아 줘야 나중에 써먹죠. 아론데일이라는 놈이 문제기는 한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현재 필레온에 침투해 있는 밀렵꾼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발루스의 설명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나머지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일 것 같았지만, 딱 한명 마음에 걸리는 놈이 있었다.
“뭐, 어쩌겠어요. 그 새끼는 나비로제 교관님이나 바렌이랑 마주치길 바래야죠.”
“확실히···우리가 상대할 만한 적수는 아닌 것 같아. 발카르의 투사가 왜 밀렵꾼 같은 짓을···.”
“돈 앞에서 뭔들 못하겠어요.”
다시금 발루스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이번 계획을 주동한 카리볼로의 간부에 대해 경고했다.
삼거수(三 巨獸)중 한 명인 아론데일. 맨손으로 웨어울프 부족을 학살한 전적이 있는, 오러 각성의 경지에 이른 격투가였다. 로난이 말했다.
“일단 출발하죠. 시간이 없으니.”
“응.”
로난과 아데샨이 소연회장을 나섰다. 동시에 일곱 마리의 까마귀가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해가 떠오르기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백수제가 개최되기 전에 도플갱어를 찾고 밀렵꾼을 축출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도플갱어를 찾는게 최우선이에요. 혹시 알아낸 것 좀 있어요?”
“소연회장에서 고유 마나를 발견하긴 했어. 띄엄띄엄 끊어져 있긴 한데···.”
아데샨은 도플갱어 한 마리의 마나를 발견했다 말했다.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며 쾌재를 불렀다. 범인의 발자국을 찾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쪽이야. 여기 나무를 올라갔다 내려왔어.”
“나도 하나 찾았어요. 포석이 부서진 걸로 봐선 뭐 큰걸로 변신했나 본데.”
로난과 아데샨은 최대한으로 감각을 확장한 채 도플갱어를 추적했다. 텅 비어 있는 교정은 주민이 모두 떠난 황촌을 연상케 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인적 없는 거리를 두드려 댔다.
“젠장, 어디까지 간 거야?”
흔적을 따라 걷던 로난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거의 부지를 가로지를 만큼 걸었음에도 도플갱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십 분 정도를 더 걷던 두 사람이 동시에 멈춰섰다. 도플갱어의 흔적은 부지 서북쪽의 숲 앞에서 끊어져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구만···얼른 들어가죠 선배.”
“으, 응. 들어가야지. 알았어.”
아데샨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둠이 도사리는 숲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렇고 어두운 것을 무서워 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로난이 손을 내밀었다.
“손이라도 잡을래요?”
“소, 손?”
“솔직히 무섭잖아요. 털이 북슬북슬한 사내새끼 중에서도 그런 사람 많으니까 그냥 잡아요.”
“···응.”
머뭇거리던 아데샨이 로난의 손을 잡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투박한 손은 온통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다. 노력이 만들어낸 피륙 너머로 뜨거운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그녀가 뭐라 말하려는 차였다.
-쿵.
불현듯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른, 묵직하고 울림이 있는 음성이었다.
두 사람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웬 거대한 도마뱀 한 마리가 침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크르르르르···.
“허.”
머리와 지면 사이의 간격만 5m가 넘어 보였다. 붉고 유려한 비늘은 하나하나가 어른의 손바닥만 했다. 길고 두꺼운 뿔 한 쌍이 돋아난 머리는 드래곤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괴악한 자태를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날개 없는 용. 드레이크였다.
“맞는 거 같죠?”
“···응.”
“저딴 거랑 사랑에 빠질 작자는 없을 테니···오메가겠네요.”
진짜 드레이크일리는 없었다. 만티코어는 그렇다 쳐도 드레이크는 누가 기르거나 다룰 수 있는 종류의 몬스터가 아니었으니. 호흡을 가다듬은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가짜 주제에.”
드레이크는 가만히 로난을 마주 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막 칼자루를 잡아당기려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드레이크의 전신이 거품처럼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아데샨이 뒷걸음질치며 물러섰다.
“꺄악!”
“그래. 간만에 얼굴 좀 보자.”
끓어오르던 드레이크는 인간의 형상으로 서서히 변모하고 있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진정해.’
그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갑자기 나타난 아하유테를 베지 않고 넘어갈 자신이 없었다. 설령 그것의 본질이 도플갱어인 것을 알더라도. 촤악! 마침내 변형을 마친 도플갱어가 바닥에 착지했다.
“···음?”
나타난 것은 아하유테가 아니었다. 웬 덩치 좋은 사내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사내와 눈이 마주친 로난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데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로난?”
사내의 얼굴은 다소 완숙해지기는 했지만 로난과 똑 닮아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로난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장성하여 190cm에 육박하는 신장이 그러했고, 몸에 걸치고 있는 제국군 군복이 그러했다. 아데샨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저런 모습이야?”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만신창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몰골이었다. 군복이 찢어져 살이 드러난 부위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에 쥐어진 검은 처참하게 박살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몸 군데군데 붙어있는 검은 덩어리였다. 일곱 개의 시커먼 덩어리가 곰팡이처럼 사내의 몸 곳곳을 좀먹고 있었다. 고통에 신음하던 사내가 로난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너는···.”
멍하니 서 있던 로난이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그 순간 사내가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간 사내는 순식간에 검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젠장, 멈춰!”
“로, 로난!”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난이 숲 속으로 달려갔다. 잠시 주저하던 아데샨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를 뒤따랐다.
쏴아아- 거센 밤바람이 숲의 머리를 휩쓸고 있었다. 손짓하는 나뭇가지 아래로 세 개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