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08)
108. 백수제(8)
#108
“해주를 해야겠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일이 있던 게냐? 아침부터 표정이 영 심상치가 않구나.”
“별 건 아니고, 좀 더 서둘러야 할 거 같아서요.”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지난밤에 벌어졌던 사건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증오하는 이로 모습을 바꾸는 오메가 도플갱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전생의 자신으로 변했다.
땀처럼 흐르는 피, 부러진 검. 모든 것을 잃고 텅 비어버린 눈동자와 몸을 갉아먹고 있던 일곱 개의 저주. 도플갱어가 반복하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한심한 넋두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일상에 희석되어 묽어졌던 위기감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다시는 그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힘을 길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장을 제약하는 저주부터 몸에서 제거해야 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세크리트가 입을 열었다.
“이거 참 신기하구나.”
“뭐가요?”
“불과 며칠 전에 네 저주 하나를 해석하는 데 성공했단다.”
“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난 세크리트가 책상 앞으로 향했다.
한참이나 서류 더미를 뒤적이던 그는 웬 공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베개로 써도 될 정도로 무지막지한 두께가 인상적이었다.
“이걸로 52권째군. 내가 앞으로 천 년을 더 살아도 이만한 저주는 보지 못할 것 같구나.”
세크리트는 공책을 한번 훑어보더니 바로 옆의 책장에 꽂았다. 책장 하나가 방금과 같은 공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모두 네 저주에 대한 분석을 적어 놓은 거란다. 저 난리를 치고 나서야 겨우 한 개의 해주법을 설계할 수 있었지.”
“자세하게 말해 줘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첫 번째로 해주할 당시를 기억하고 있느냐? 눈에 얽혀 있던 금제를 풀었을 때 말이다.”
“당연하죠.”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경험이었다. 직접 심상 세계로 진입하여 저주의 원흉을 제거하는 해주법.
그는 기억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옛 고향과 기억에 없는 어머니, 그림자의 형태로 끓어오르는 아버지를 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를 베던 감촉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래. 이번에도 그 방법을 사용할 거란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어.”
“그게 뭐죠?”
“이번에 해주할 저주는 처음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단다. 심상세계로 진입하는 데만 해도 엄청난 양의 마력과 촉매가 필요해. 마력은 자로딘이 제정신을 차렸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촉매가 문제군요.”
세크리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뭐가 필요하길래 그래요? 많이 비싼 건가요?”
“비싸다기보다는···물량 자체가 없어서 그렇단다. 다인하르라는 지명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다인하르면 거기잖아요. 남서부 사막에 있는 마경.”
전생에서도 익히 들은 이름이었다. 다인하르. 대륙에 산재한 험지 중에서도 어지간히 지랄 맞은 곳이 아니고서야 얻지 못하는, 마경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장소 중 하나였다.
사막으로 둘러싸인 험난한 지형과 좆같은 몬스터, 외부인을 대접하는 방법을 모르는 원주민들은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모험가의 목숨을 앗아갔다. 다인하르에 대한 정보를 반추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 설마 필요하다는게 그 시커먼 돌덩이에요?”
“알고 있다니 설명이 빠르겠구나. 그래. 다인하르 산 마석이 필요하단다. 아무리 대체품을 찾으려 해봐도 그만한 촉매가 없어.”
세크리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까지 실험에 사용된 소재 중 다인하르 산 마석만이 유일하게 촉매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고 설명했다.
“보통 일년에 세 덩어리 정도가 제국 경매장이나 하이 르미엔에 올라온단다. 그리고 올라오자마자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낙찰되지. 유감스럽게도 내가 가진 것은 오래전에 실험용으로 구매한 파편 하나란다.”
“그걸로는 안 되겠죠?”
“그렇지. 적어도 엄지손가락 만한 크기는 되어야 촉매로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구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돈이 많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인 다인하르 산 마석은 사람들이 그 머나먼 지옥까지 기어가서 죽게 만드는 가장 큰 원흉이었다.
최상급 마석보다 훨씬 농후한 마나를 품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수한 형질까지 띠고 있어 대체할 수가 없는 소재였다. 만 명중 한 명. 운과 실력이 따라주는 극소수의 모험가만이 마경에서 그 돌멩이를 쥐고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풀이 죽은 세크리트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알아낸 뒤에도 연락하지 않았던 거란다. 혹시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있겠느냐? 내가 반드시 다른 촉매를 찾아내 보마.”
“됐어요. 그냥 제가 구해올게요.”
“응?”
로난이 덤덤하게 말했다. 벙찐 채 서 있던 세크리트가 미간을 좁혔다.
“진심인가···?”
“네. 혹시 모르니 연구는 계속 해 주시면 감사하구요. 어쨌든 다인하르 산 마석만 있으면 바로 해주할 수 있는 거죠? 더 필요한 것도 없고?”
“···일단은 그렇다만.”
“알았어요. 제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로난이 세크리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당당한 몸짓에서는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로난은 전생에 다인하르에 한 번 다녀왔었으니까.
‘그 좆같은 곳을 다시 가게 될 줄이야.’
기억을 떠올린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밥 먹듯이 넘나들던 그에게 있어서도 다인하르는 끔찍한 장소였다.
‘저번보단 낫겠지.’
그래도 두 번째니 초행길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소요되는 시간이었는데, 다인하르의 위치상 동아리 활동 따위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출발해야겠군.’
다행스러운 점은 여름방학이 머지않았다는 점이었다. 잠시 계획을 고안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준비할 것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될 것 같았다. 용건을 마친 로난이 작별의 악수를 건넸다.
“고마워요 세크리트. 모처럼 축제인데 좀 나가서 즐기고 그래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백수제였군. 도플갱어가 온다지?”
“네. 기회가 되면 꼭 가서 봐요. 진짜 더럽게 힘들게 잡은 거니까.”
“으음? 잡다니?”
“그런 게 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로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파라치오를 떠났다. 자로딘이 꾸벅꾸벅 졸며 그를 배웅했다.
옷매무새를 간단하게 다듬은 로난은 곧장 갈레리온 관의 정문으로 향했다. 어제 새벽에 누군가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
아침공기가 선선했다. 포근한 빛무리가 교정을 감싸고 있었다. 어젯밤에 그런 난리가 벌어진 장소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억울할 정도로 평화롭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원래 한적해야 할 거리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 백수제를 즐기기 위해 아침잠을 포기한 이들이었다.
머지않아 익숙한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정문 앞, 장신의 소녀는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입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난이 팔을 크게 휘적이며 외쳤다.
“선배! 나 왔어요.”
“아, 로난.”
로난을 발견한 아데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새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칼의 대비가 아름다웠다.
접선한 두 사람은 곧장 필레온 대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수제의 개막식이자 최고 명물인 백수 대행진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어때, 몸은 좀 괜찮아요?”
“으응. 이제 완전히 나아졌어. 고마워.”
“내가 고맙죠. 덕분에 더러워질 수 있는 싸움을 순식간에 끝냈잖아요. 이야, 독침 꽂힐 때 그 자식 표정을 선배가 봤어야 하는데.”
로난이 낄낄거렸다. 실제로 아데샨은 어젯밤의 전투에서 승리의 주역이라 해도 믿을 활약을 펼쳤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만티코어를 조종해 독침을 꽂아넣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란히 대로를 거닐던 와중이었다.
“저기···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요?”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데샨이 힘겹게 입을 뗐다.
“그, 어제 있잖아···안 무거웠어?”
“네?”
“아니, 업혔을 때 말야. 나···남자들보다 키도 크고···.”
“뭐야, 그때 일어나 있었어요?”
“핫···!”
뒤늦게 실책을 알아챈 아데샨이 입을 가렸다. 새하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 내가 착각했나 봐.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잠들어 있었는걸? 오늘 아침에 눈 뜰때까지 계속. 응. 아마 다른 날이랑 헷갈렸나 봐.”
“제가 선배를 업어준 적이 또 있었나요?”
“어, 없던가? 그럼 꿈이랑 헷갈렸나 보다. 응. 자주 그러거든.”
“아데샨, 아직 아픈 거 아니죠?”
로난이 걱정스레 물었다.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평소의 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데샨은 다소 고양된 어조로 대답했다.
“그, 그럼···! 완전 멀쩡해. 걱정하지 마.”
“흐음···아닌 거 같은데. 아직 아프면 말해요. 보건실 데려가 줄 테니까.”
“괘, 괜찮다니까.”
아데샨은 로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할 수 없었다. 업히는 그 순간부터 쭉 깨어 있었다는 사실을. 어젯밤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린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멍청이, 어제도 들킬 뻔한 주제에···!’
등이 넓고 따뜻해서 그냥 가만히 있던 것부터가 실책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알파 도플갱어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데샨이 전전긍긍하며 침음을 흘리던 차였다.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괜찮으면 됐고요.”
“으응. 정말 착각했어. 신경 쓰지 마.”
아데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대광장이 있는 방향에서 요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린 로난이 별안간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크, 시작했나 보다. 조금만 서두르죠.”
“로, 로난? 손이···!”
“어제도 잡아 놓고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지름길을 아니까 따라와요.”
로난과 아데샨은 손을 맞잡은 채 교정을 가로질렀다. 두 사람이 대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행진이 한창이었다. 사람과 짐승으로 가득 찬 대광장의 하늘 위로 온갖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미친, 진짜 만티코어를 가져다 놨네.”
“꺄아악, 저기 샐러맨더도 있어!”
“선두에 있는 건 바렌 교수님인가?”
둥···! 둥···! 웅장한 북소리가 느린 간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백수제에 전시되는 모든 환상종과 몬스터들이 줄을 지어 행진하고 있었다.
교수진들이 행렬과 학생 사이에 서서 안전요원 역을 맡고 있었다. 생전 본 적 없던 진풍경에 아데샨이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와아아···대단하다. 천막에서 본 것보다 훨씬 많아.”
“끝내주긴 하네요.”
로난이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젯밤에 한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휘자를 맡은 바렌은 행렬의 맨 앞에서 거대한 북을 두들기고 있었다. 종족이 종족인지라 거의 인간 백 명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 같았다. 바로 뒤쪽에서는 아론데일에게 독침을 꽂은 만티코어가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크허어어엉!”
“와아아아아아!!”
만티코어가 멋들어지게 포효하자 모든 학생이 환호를 터트렸다. 로난이 만티코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한 번만 더 조종해서 영원히 잊지 못할 백수제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이번에는 독침으로 바렌의 엉덩이를 한번 찔러 주는 거예요.”
“으응? 그럴까?”
“내가 미안해요 선배. 그러지 마요.”
“농담이야.”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키득거렸다. 문득 로난의 시선이 안전요원 역을 맡은 기도칸 교관에게 닿았다.
웬일로 허름한 셔츠 대신 갑옷을 차려입은 웨어울프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 듯 했다. 별안간 로난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참, 축제 끝나고 주말에 어디 갈 곳 있어요?”
“딱히 없는데···왜?”
“그럼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요. 다른 놈들은 다 데리고 갔는데, 선배만 안 갔네.”
“···응?”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이 반짝이는 금속패 하나를 꺼내들었다.
백금으로 만들어진 패에는 그랑시아 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대륙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어음패는 동시에 어느 장소에 대한 통행증도 되었다.
“재건했다는 소식은 제법 전에 들었는데···기대되네.”
여름방학까지는 고작 보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다인하르에 가서 써먹기 위해서는 지금 의뢰를 넣어야 했다.
두 번째 무기를 제작하러 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