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11)
111. 피는 모래를 적시고(2)
#111
“그래, 니가 좋겠다.”
부원들의 이목이 쏠렸다. 로난의 검지는 탁자 앞에 앉아 칼을 손질하는 슐리펜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묵하던 슐리펜은 손질을 다 마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실망스럽군. 고작 그런 소리를 하려고 부른 거였나.”
“일단 들어나 봐. 제법 괜찮은 여행이 될 텐데.”
“어차피 방학 기간에는 후계자 수업이 예정되어 있어서 불가능하다. 다른 부원을 데려가도록.”
“후계자 수업이라···그렇군. 아쉽게 됐어.”
로난이 입맛을 다셨다. 별안간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그가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소정의 보상도 준비했는데 말이지. 어이쿠, 떨어졌네.”
로난이 작위적으로 손가락을 벌렸다. 미끄러지듯 낙하한 종이가 슐리펜의 검 위에 착지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종이에는 활짝 웃는 이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그림하고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비록 색이 없는 흑백이긴 했지만 꼭 현실의 일부를 잘라서 붙여놓은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슐리펜의 동공이 빠르게 진동하고 있었다.
“아무튼 알았다···수업 잘 받고.”
다시 그림을 집어든 로난이 다른 부원들에게 향하는 차였다. 별안간 그의 어깨를 붙잡은 슐리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로난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뭐냐?”
“생각해 보니 견문을 넓히는 것 또한 제왕학의 일종이다. 갈수록 시간이 없어질 테니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고 말이야.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내가 협조하도록 하지.”
“어련하시겠어. 일 다 끝나면 줄게.”
동행인이 결정되었다. 간택을 피한 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로난과 함께 벌여 온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이틀이나 사흘로도 버거운데, 한달 가까이 같이 지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다행이군.’
안도한 것은 로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의 일을 떠올린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괜찮은 발명품이야. 디디칸.’
디디칸은 로난과 아데샨의 무기를 전해주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의 허리춤에는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다는 기계가 매달려 있었다.
로난은 디디칸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이릴과 자신을 몇 차례 찍어 달라 부탁했다. 당시에는 딱히 의도가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갈 줄은 몰랐다.
어찌됐건 잘 된 일이었다. 이번만큼은 정말 슐리펜이 필요했다. 다인하르는 실전 경험을 쌓겠답시고 애송이들을 데려갈만큼 만만한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오필리아는 그나마 좀 나았지만, 시종일관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땅이라 그녀가 활약하기에는 불리한 환경이었다. 용무를 마친 로난이 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 학기간 고생 많았다. 갈수록 바빠질 테니까 푹 쉬다 와.”
그렇게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부원은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아셀은 부모님이 계신 님버튼으로, 마르야는 장거리 교역을 위해 저 멀리 동부의 팔치온으로 떠났다.
브라움 역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제국령 최북단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돌아가지 않는 오필리아는 아예 동아리 건물에 눌러앉아 버렸다.
“오필리아 너는 어디 안 가냐?”
“응···부모님도 뭐라 할 거고···여기 있으면 발자크랑 마주칠 일도 없으니까···.”
“하긴 그 미친놈이 있었지. 고생이 많아.”
“아냐···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게.”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녀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로난과 슐리펜은 다인하르로 출발하기 전 이틀간 준비 기간을 가졌다.
한 달에 가까운 여정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많았다. 꼼꼼한 아데샨이 여행 채비를 도왔다.
“침낭은 길드에서 만들어 파는 게 좋아. 사막은 일교차가 크니까 두꺼운 옷도 꼭 챙겨 가고···미리 알았으면 내가 만들어 줬을텐데.”
“괜찮아요. 아, 기껏 손봐 준 교복인데 태워먹어서 미안해요.”
“신경쓰지 마. 또 고쳐줄 테니까. 포션이랑 스크롤은 다 챙겼지?”
두 사람은 온 제도를 돌아다니며 물품을 구비했다.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아침. 한적한 필레온의 정문, 출발을 앞둔 로난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뺘!”
그의 등에는 자신의 몸통만한 배낭이 짊어져 있었다. 어깨에 올라타 있는 시타도 인사하듯 날개를 파닥였다.
시타 또한 이번 여행의 동반자 중 하나였다. 미소를 머금은 아데샨의 입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조심해. 다인하르라니···마음만 같으면 말리고 싶지만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별일 없을 거예요. 방학에는 뭐 해요?”
“아버지랑 고향에 다녀오기로 했어. 어머니랑 오빠들에게 안부를 전해야지. 그 다음에는 바로 필레온에 돌아올 것 같아.”
“왜요? 기왕 가는거 좀 더 쉬다 오지.”
“후후···뒤쳐진 만큼 더 열심히 해야지. 지금 내 몸에는 마나가 거의 없으니까.”
아데샨이 면목 없다는 듯이 뺨을 긁적였다. 실제로 그녀의 경지는 아직도 소드 유저에 그쳐 있었다. 그림자의 마나를 각성할 당시 기존의 마나를 전부 날려 버린 탓이었다.
‘마냥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억세다. 좋은 자질이야.’
로난이 미소지었다. 그림자의 마나가 아니라 평범한 재능만 갖고 태어났어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을 위인이었다.
“맞아. 겸사겸사 새 무기 다루는 연습도 하고 있어요. 생소할 텐데.”
“아, 응.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걸 받아서 깜짝 놀랐어.”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론이 새로 만들어 준 무기는 평생을 검만 휘두르던 아데샨에게는 영 낯선 것이었다.
다만 그녀의 능력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잘만 다루면 그만큼 좋은 것도 없을 터였다. 아데샨과 악수를 나눈 로난이 히죽 웃었다.
“나중에 봐요. 성취가 있기를 바랄게요.”
로난은 그 말을 남긴 채 발걸음을 돌렸다. 제도의 남문을 벗어난지 머지않아 팔짱을 끼고 있는 슐리펜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푸르죽죽한 유령마 두 마리가 동상처럼 서 있었다.
“늦었군. 로난.”
“난 정시에 왔어 인마. 네가 빨리 나온 거지.”
“어서 짐이나 실어라. 해가 지기 전까지 남서부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니까.”
“그렇게 합죠. 소공작님.”
틱틱거리던 두 사람이 고글을 착용하고 유령마에 올라탔다. 지난번 경주로 혼쭐이 난 시타는 유령마와 속도를 겨루는 대신 로난의 배낭 속에 자리를 잡았다.
팡! 고삐를 잡아당기기 무섭게 유령마가 쏘아져 나갔다. 목적지는 칼라일. 다인하르가 있는 붉은 사막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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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하르로 가는 길은 멀고 복잡했다. 유령마를 타고도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머나먼 거리를 반증하고 있었다.
그나마 칼라일까지는 도로가 깔려 있어서 유령마를 비롯한 탈것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붉은 사막을 가로질러 다인하르까지 가기 위해서는 두 다리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내가 이래서 남부가 싫어.”
“뺘이이이이···.”
확연히 달라진 날씨에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태양이 점점 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더위에 헥헥대던 시타가 다시 배낭 속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닷새째 오후에 칼라일에 도착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황무지 위로 조잡한 건물 몇 채가 세워져 있었다.
필요한 물건은 대부분 챙겨 왔기에, 그들은 짧은 휴식만 취한 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령마들도 더위가 지긋지긋했는지 반납 처리를 하기가 무섭게 달아나 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 빌어먹을 놈들.”
어쩐지 경쾌해 보이기까지 한 발재간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하긴 이 더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옥에서 해방된 기분일 터였다.
두 사람과 한 마리는 그렇게 육로 여행을 시작했다. 슐리펜과 나란히 걷던 로난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안 덥냐? 너도 폼 그만 잡고 써 인마.”
“나는 괜찮다.”
로난의 머리에는 챙이 넓고 둥그런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이 폭염 속에서도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모자를 벗는 순간 정수리를 꿰뚫고 들어온 햇살이 뇌를 익혀 버릴 것만 같았다.
반면 슐리펜의 머리에는 어떤 것도 씌워져 있지 않았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거니는 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각설탕처럼 보였다.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괜찮다.”
“이런 시발. 아데샨이 니 거까지 챙겨서 하나 더 있다니까? 십 초 줄테니까 쓸지 말지 정해. 십···구···”
배낭에서 같은 모자 하나를 꺼내든 로난이 빠르게 초읽기를 셌다. 슐리펜은 둘을 세는 시점에서 말없이 모자를 집어들었다. 두 사람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인하르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엿새 정도. 이틀은 사막 위에서 보내야 하고. 말한 대로 침낭이랑 가죽옷은 챙겨 왔지?”
슐리펜이 주억거렸다. 나머지 물건은 챙겨와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쉬지 않고 걸었다. 평소에 비인간적인 체력 단련을 해 온 덕이었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향수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 남서부.”
방황하던 소년기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막과 그 주변의 풍경이란 별로 다채로울 것이 없었다. 무릎까지도 안 오는 짧은 식생들이 황량한 땅 군데군데 자라나 있었다.
하늘은 파란색을, 흙과 초목은 누런 빛을 띠었기 때문에 녹색이라고는 정말 가끔씩 나타나는 수원(水源)인근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문득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그게 이번에 새로 받은 무기인가. 도론 장인이 제작했다는.”
“엉? 아, 이거.”
슐리펜의 시선은 로난의 오른쪽 허리춤에 머물러 있었다. 못 보던 칼집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집 너머로 올라오는 기운을 감지한 슐리펜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가는 곳이 확실히 위험하기는 한가 보군. 그런 걸 만들어 올 정도면 말이지.”
“그렇긴 하지.”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후텁지근하던 공기가 급속도로 식으며 바람이 거세졌다. 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설 테니까 눈좀 붙여 둬. 칼은 언제든지 뽑을 수 있게 머리맡에 두고.”
로난이 진중한 표정으로 당부했다. 영문 모를 노련미를 감지한 슐리펜이 눈썹을 으쓱였다.
“그렇게 하지. 몬스터라도 출몰하는 건가.”
“아니. 몬스터는 사막에 들어간 뒤부터 조심해도 충분해. 대신 이 주변에는 패배자들이 널려 있거든.”
“패배자?”
“그래. 다인하르에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진 멍청이들이지.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야.”
전생의 여정을 떠올린 로난이 혀를 찼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불쾌한 족속들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 도전했으나 실패하고, 끝내 일확천금의 미련을 놓지 못해 도적으로 전락한 모험가들.
그들의 주 먹잇감은 다인하르에 도전하는 또다른 모험가들이었다. 로난의 설명을 들은 슐리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베어도 문제가 없는 건가?”
“엉? 당연하지. 아주 갈아 버려 그냥.”
“알았다.”
스르릉! 별안간 슐리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로난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어둠 한복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슈아악!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시야 저편으로 사라졌다.
“얌마, 갑자기 뭐 해?”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아! 달빛 아래에서 일어난 회오리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다급한 비명과 외침이 산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끄아아악!”
“···다!”
“젠장···모···움직여..!”
로난의 눈이 커졌다. 소리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슐리펜은 아무런 부연설명도 없이 세 번의 검기를 더 쏘았다.
쾅! 쾅! 쾅! 다시금 폭발음과 함께 세 개의 회오리가 솟구쳐 올랐다. 슐리펜이 검기를 쏜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적치고는 실력이 좋군. 제법 많이 피했어.”
“미친 자식. 지금 저기 있는 걸 감지한 거냐?”
“마나로 감각을 확장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이쪽으로 오는군.”
그제야 로난은 악의에 찬 인기척과 발소리를 눈치챌 수 있었다. 화르륵! 불현듯 열 개는 되어 보이는 빛무리가 어둠 속에서 일제히 피어났다.
그것들이 횃불임을 눈치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시 이 자식을 데려오기 잘했군. 그리 읊조린 로난이 두 개의 칼자루를 동시에 잡아당겼다.
“잘 됐네. 안 그래도 성능이 궁금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