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12)
112. 피는 모래를 적시고(3)
#112
“잘 됐네. 안 그래도 성능이 궁금했는데.”
팔을 교차한 로난이 두 개의 칼자루를 동시에 잡아당겼다. 시커먼 라만차와 못 보던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슐리펜은 로난의 왼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단검이었나. 의외로군.”
“나도 처음 받았을 때 이게 뭔가 싶었지.”
로난의 새 무기는 단검이었다. 총길이가 기껏해야 30cm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생소한 날붙이는 여러모로 라만차와 반대되는 인상을 풍겼다.
검신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있었다. 이름 모를 문자가 아로새겨진 칼배는 겨울날의 별빛처럼 정순한 백색을 띠었다. 습관적으로 단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젠장, 역시 더럽게 무겁네.”
어깨가 확 내려가는 것이 무슨 양손검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가는 무게 또한 라만차와 대비되는 점이었다.
마나로 근육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자유자재로 다루기 어려울 정도였다. 문득 무기를 받을 당시를 떠올린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이 기억 안 나네. 디디칸이 알려줬었는데. 이···이미···뭐더라.”
“검 자체는 좋아 보이는군. 헌데 칼자루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슐리펜이 단검을 노려보며 말했다. 새하얀 검신과는 달리 칼자루는 시커먼 흑색을 띠었다. 슐리펜은 여행 내내 느끼던 불길한 기운이 저곳에서 풍겨온다는 것을 눈치챘다.
로난은 그것이 바쥬라의 조각으로 마감 처리를 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반짝이는 마나가 단검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글쎄다.”
하지만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상황에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이야기였다.
횃불과 함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순간 바람이 거세지며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물러났다. 성난 사람들의 면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있다! 잡아라!”
“토네이도를 쓰는 걸로 봐서 한 명은 마법사야. 그놈을 먼저 처리해!”
“젠장, 먼저 공격을 당할 줄이야···!”
남자가 일곱에 여자가 셋이었다. 무리의 정체는 예상대로 다인하르의 패배자들이 맞았다.
도적 떼라기에는 번지르르한 행색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온갖 준비를 하고 다인하르에 도전하는 모험가들을 등쳐 먹었으니 한두 명만 털어도 수입이 짭잘했을 터였다.
슐리펜이 자세를 잡았다. 어느새 전투태세를 갖춘 시타 또한 혈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했다. 별안간 앞으로 걸어나온 로난이 슐리펜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거냐.”
“잠깐만 기다려 봐.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해보고 싶은 거?”
“그래. 처음 받은 무기인데 쓸만한지는 봐야지. 시타 너도 잠깐 기다려 봐.”
“뺫.”
시타가 혈탄을 쏘기 위해 모으던 피를 도로 흡수했다. 슐리펜이 마지못해 뒤쪽으로 물러섰다. 문득 무리 중앙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스톤 핸드!”
“오?”
영창을 들은 로난이 입을 둥글게 말았다. 도적떼 주제에 마법사까지 대동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콰앙! 별안간 눈앞의 지면이 폭발하더니 바위로 이루어진 손아귀가 솟아났다. 면적이 족히 3m는 되어 보이는 손바닥이 두 사람을 향해 강하했다.
“멍청이들아. 이 정도면 도둑질 안 해도 먹고 살겠다.”
바닥에 침을 뱉은 로난이 라만차를 휘둘렀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표면 위에 수 획의 선이 그려졌다. 퍼석! 산산이 조각난 바위손이 형체를 잃고 폭발했다. 마법을 시전한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너구나.”
마법사의 위치를 파악한 로난이 단검을 내던졌다. 무게가 묵직하여 투포환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쐐액! 하얀 단검은 완벽한 직선을 그리며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조심해!”
전위를 맡은 사내가 방패를 치켜들며 여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반응 속도가 빠른 걸로 보아하니 상당한 실력자인 듯했다.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퍼억! 그대로 방패를 부순 단검이 사내의 목울대를 관통했다.
“캬악···!”
피가 솟구쳤다. 목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여인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였다. 푹! 사내의 뒷목을 찢고 튀어나온 칼끝이 그녀의 이마를 꿰뚫었다. 뒤로 날아간 여인의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주위에 있던 도적들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미, 민디! 빌어먹을···!”
“제길, 지금 단검에 방패가 뚫린 거야?!”
의심할 여지도 없는 즉사였다. 두 구의 시체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로난이 만족스레 휘파람을 불었다.
“쓸만하네.”
상상 이상의 관통력이었다. 단검이 날아가던 경로만 봐도 얼마나 잘 만들어진 무기인지 알 수 있었다.
별안간 로난이 오른발을 치켜들었다. 저런 잽싼 놈들은 바퀴벌레처럼 흩어지기 전에 단번에 처리해야 했다. 그가 슐리펜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내가 발 구르면 회오리 좀 쏴라.”
“그게 무슨 소리지.”
슐리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은 대꾸하는 대신 발을 굴렀다. 쿵! 발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마나의 파문이 퍼져 나갔다.
다만 로난의 발치가 아닌, 여인의 이마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단검을 중심으로. 콰아아! 난데없이 자라난 반짝이는 뿌리가 여인 주변으로 모여 있던 도적들을 휘감았다.
“이, 이게 뭐야?!”
“몸이···!”
난데없이 발이 묶인 도적들이 당황하며 버둥거렸다.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저 기술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돌란 경의···! 네가 어떻게 그 기술을 쓰는 거지?”
“설명해 줄 테니까 저것들부터 치우자. 아직 생각보다 약하거든?”
로난이 턱 끝으로 도적들을 가리켰다. 그의 말마따나 몇 명은 벌써 뿌리를 떨쳐내려 하고 있었다.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슐리펜이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폭풍을 머금은 오러가 검신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지.”
슐리펜은 도적들이 있는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로를 따라 발사된 뾰족한 검기가 도적떼의 중앙에 처박혔다. 콰아아아! 지름이 10m에 이르는 회오리가 도적들을 집어삼켰다.
“끄아아아악!!”
“···살려···!”
발이 묶인 도적들은 회오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바람 소리에 희석된 비명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비산한 선혈이 이슬비처럼 뿌려졌다. 칼바람에 찢겨나간 팔다리가 바람을 타고 춤추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가라앉았다. 퍼억! 퍽! 회오리의 정상까지 올라갔던 시체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추락했다. 고기 스튜를 쏟은 것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매운 고추와 토마토로 국물을 우려낸.
“으, 씨발.”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삼 일은 밥 생각이 나지 않을 듯했다. 슐리펜의 폭풍검은 중간 평가때 봤던 것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이것만큼은 나비로제의 만사와 더불어 절대로 베끼지 못할 것 같았다.
“너는 어떻게 된 게 적당히란 걸 모르냐.”
“악인에게 선처 따위는 필요 없다.”
당연히도 생존자는 없었다. 그때 참상의 한복판에서 반짝이는 빛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슬렁거리며 다가간 로난이 내장 사이에 파묻여 있던 단검을 집어들었다.
“이거 하나는 좋네.”
자칫하면 칼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도 폭풍검을 쏘라 지시한 이유였다. 문득 잊고 있던 단검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낸 로난이 혼잣말했다.
“이미르.”
듣자하니 무슨 거인의 이름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하필이면 거인과 관련된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름이 뭐건 간에 로난은 새로운 무기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겉보기와는 다른 무게도, 반짝이는 마나를 기반으로 하는 오러를 위치를 바꿔 시전할 수 있는 기능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챙길 수 있는 물건을 챙긴 뒤 발걸음을 돌렸다.
“시타. 치우자.”
“뺘!”
시타가 네 장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사방에 고이고 튀어 있던 핏물이 방울의 형태가 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소년들의 몸과 옷에 묻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시타는 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피를 전부 흡수했다.
“잘했어. 아직 감 안 잃었네.”
“뺘아~”
로난이 목을 긁어주자 시타는 눈을 감은 채 갸르릉거렸다. 오필리아의 말에 따르면 피를 흡수할수록 혈마법이 강해진다 했으니,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마시게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유능하군.”
옷이 깔끔해진 것을 확인한 슐리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패배자들을 소탕한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만 같으면 본거지를 찾아가서 전부 작살내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여유가 얼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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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드디어 도착했네.”
“여기인가. 실제로 보는건 처음이군.”
슐리펜이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너른 모래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물결 무늬가 선명한 사구들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조금씩 바스라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 펼쳐진 별의 바다는 당장이라도 지평선 아래로 범람하며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도보 여행을 시작한지 닷새째 되는 날 밤. 두 사람은 붉은모래 사막에 진입했다. 한껏 기지개를 켠 로난이 투덜거렸다.
“흐으으으··그 잡것들에게 힘을 너무 썼어.”
“올바른 선택이었다. 희생자는 확실히 줄어들 테니.”
“그건 맞지.”
두 사람은 로난이 예고한 대로 닷새를 더 걸었다. 해가 네 번 뜨고 지는 동안 서른두 명의 패배자를 처리햇다. 대부분은 기척을 감지한 슐리펜이 선공을 날리면 로난이 가서 죄다 썰어 버리는 방식이었다.
나름대로 소문이 퍼졌는지 도적들 또한 갈수록 전략적인 대응을 했지만 어김없이 다진 고기가 되어 버렸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전술 따위는 무의미했다. 슐리펜의 옆모습을 힐긋 쳐다본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자식을 데려오기 잘 했군.’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악인을 베는 행위에 대한 주저가 없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도적떼를 소탕하며 왔음에도 빠르게 사막에 진입할 수 있었다. 별안간 팔을 뻗은 로난이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보인다. 저기가 다인하르야.”
슐리펜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오밀조밀하게 자라나 있는 바위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꼭 왕관이나 뒤집힌 손아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다인하르를 노려보던 슐리펜이 입술을 비틀었다.
“느낌이···심상치 않군.”
“그치? 가까워질수록 왜 마경인지 알게 될 거야.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전생의 개고생을 떠올린 로난이 몸서리를 쳤다. 좆같은 샌드웜과 로크 버드, 원주민들이 매설해 놓은 함정만 피할 수 있어도 선방은 할 터였다. 그가 짊어지고 있던 배낭을 내던지며 말했다.
“어쨌든 고생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슐리펜이 주억거렸다.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침낭을 깔았다. 사막의 밤은 추웠기 때문에 두꺼운 가죽옷을 입고 잠을 청해야 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오늘은 슐리펜이 먼저 불침번을 서는 날이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피고 선 채 사막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침낭으로 몸을 둘둘 감은 로난이 시타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시타.”
“뺘?”
모닥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시타가 로난에게 다가왔다. 침낭 입구를 벌려 주자 시타는 순순히 그 안으로 들어와서 로난의 가슴 위에 웅크려 앉았다.
로난이 시타를 와락 끌어안았다. 푹신푹신한 깃털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이거지. 젠장, 이제야 좀 살만하네.”
“뺘아~”
애완동물의 순기능이었다. 시타가 기분이 좋다는 듯이 갸르릉거렸다. 로난이 막 잠을 청하려는 순간이었다.
“···네가 시온을 구해줬다고 들었다.”
“엉?”
“내가 오라비가 되어서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동안 말이다.”
로난이 머리를 들었다. 슐리펜의 시선은 여전히 모래 위에 머물러 있었다. 로난은 머지않아 그가 여명 마탑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 꼬맹이가 네 동생이었지. 어때, 건강하게 지내고 있냐?”
“그래. 여명 마탑의 연락을 받기 무섭게 전속 주치의를 보냈지. 다행히도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거 다행이네. 걔는 너랑 다르게 좀 귀염성이 있더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지. 우리 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마법에 재능이 있다.”
무사하다는 말을 들은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내심 궁금하던 차였다.
금서들에게 조종당해 비공정을 날려 버리고,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서관에 불을 지를 뻔한 것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슐리펜이 말을 이었다.
“함께 있는 이틀간 너와 아칼루시아 영애의 이야기만 재잘거리더군. 특히 아칼루시아 영애와는 거의 친자매와 같은 사이가 된 것 같다. 적대관계인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
“별 거 없다. 다만···”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대화를 끌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슐리펜이 로난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 여동생을 구해 줘서 고맙다.”
“허.”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로난이 헛웃음쳤다. 살다살다 이 자식이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볼 줄은 몰랐다. 괜스레 불편해진 로난이 손사래를 쳤다.
“싱겁긴. 됐어.”
“이미 온 가문의 사람들이 네 공을 알고 있다. 그랑시아의 이름을 걸고 보답하지.”
“보답은 지랄. 그렇게 고마우면 한시간만 네가 더 서 주던가. 나 잔다.”
로난은 그 말을 남긴 채 돌아누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서 받는 보답은 어쩐지 개운하지가 않았다.
진작에 잠든 시타의 입에서 고롱거리는 소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몸이 따뜻해지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눈꺼풀이···서서히···내려앉기 시작했다···.
.
···쿵!
.
“로난. 일어나라.”
“···어엉?”
로난이 눈을 떴다. 여전히 찬란한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은하수 너머로 검붉은 성운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째 몸의 피로가 전혀 해소되지 않은 것 같았다. 슐리펜은 처음에 봤던 것과 같은 자세로 기립해 있었다.
“뭐야,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삼십 분 정도다.”
“이런 배은망덕한 새끼가···더 서 주지는 못할 망정 두 시간 삼십분을 먼저 깨워? 니가 사람이냐?”
“저길 봐라.”
슐리펜은 별다른 대꾸 없이 사막 한복판을 가리켰다. 투덜거리며 일어난 로난이 슐리펜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씨발. 저 괴물이 왜 여기 있어?”
“방금 다인하르가 있는 방향에서 날아오더니 추락했다. 아는 생물인가?”
“알긴 아는데···.”
그러고 보니 잠결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불과 쉰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웬 거대하고 시커먼 새 한 마리가 엎어져 있었다. 익폭이 6m는 되어 보이는 것이 거의 와이번에 근접한 크기였다.
로난은 그 생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다인하르에만 서식하는 괴조(怪鳥) 로크 버드였다. 고개를 저어 졸음을 떨쳐낸 로난이 입을 열었다.
“가보자.”
두 사람은 황급히 로크 버드를 향해 달려갔다. 뒤늦게 잠에서 깬 시타가 뒤를 따랐다. 가장 먼저 도착한 로난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죽었어.”
로크 버드는 이미 목이 부러져서 죽어 있었다. 시커먼 날개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여기까지 기어나온 거야?”
로크 버드는 평생을 다인하르 안에서만 살아가는 생물이었다. 전생에서 이놈들에게 뒤쫒기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로난이 시체를 천천히 뜯어보던 와중이었다.
“으···으으으···.”
별안간 날개 밑에서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왔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재빠르게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다가간 그가 날개를 양팔로 들어 올렸다.
“이런 젠장.”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웬 소년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벗은 웃통에는 다섯 종류는 되어 보이는 문신들이 새겨져 있었다.
“으아···으으으···다, 다···!”
“빨리 빼내.”
행색을 보아하니 다인하르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이었다. 슐리펜이 소년을 안아 들었다. 날개를 내려놓은 로난이 소년에게 물었다.
“얌마, 정신 차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다···죽었어.”
그리 읊조린 소년이 의식을 잃었다. 로난은 아무래도 일이 단단히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