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19)
119. 피는 모래를 적시고(10)
#119
“어차피 나 죽어서 빨간 물 들어가는 거 확정이다. 내가 시간 늘려 보겠다.”
“아니 병신아. 안 들어간다고. 그리고 무슨 수로?”
“잠깐만 기다려라.”
별안간 돌풍이 육면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마구잡이로 누르는 것 같았지만 뭐 아는 것이 없으니 딴죽을 걸 수가 없었다. 그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5분 남았습니다.] [25분···] [보안 시스템 활성화까지 앞으로 42초 남았습니다.]“얌마, 더 줄었잖아.”
“기다려라. 성급한 사람 오래 못 산다.”
“말은 잘해.”
로난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성난 돌풍은 묵묵히 버튼을 눌렀다. 머지않아 기존과는 다른 내용의 안내음이 들려왔다.
[보안 시스템 활성화까지 앞으로 60분 남았습니다. 잦은 변경으로 인해 추가 조작이 제한됩니다.]그것을 마지막으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폭풍우 속에 던져진 듯한 흔들림도 잦아들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 쳤다.
“허. 이게 진짜 되네.”
“미안하다. 더 못 늘릴 것 같다.”
“아냐. 이 정도면 겁나게 선방한 거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3분보다는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타에게 추가적으로 회복을 받은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이제 좀 살 것 같네. 고맙다.”
“뺫!”
“내가 돌아와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알 상태인 너를 강물에 던지지 않은 거야. 그때는 정말 말똥인 줄 알았거든.”
“뺘이?”
로난이 시타를 살살 쓰다듬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단을 올라온 로난은 가장 먼저 테라닐과 유리아의 주검으로 다가갔다.
“···이거, 설마 그 하얀 남자인가.”
“엉. 화려한 최후였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 시체가 이렇게···우웁.”
테라닐의 시체를 본 성난 돌풍이 헛구역질을 했다. 다인하르의 전사가 보기에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체내에서 폭발한 충격파는 그의 몸뚱이를 세상에서 가장 전위적이고 역겨운 꽃병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디 보자···.”
“무, 무슨 짓이냐?”
그때 로난이 테라닐이었던 고깃더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돌풍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기다려 봐. 주교쯤 됐으면 뭐라도 들고 다닐만한데···.”
워낙에 엉망으로 부셔져 있는데다 피가 흥건한 탓에 뭘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로난은 결국 시타가 현장의 혈흔을 모두 흡수하고 나서야 쓸만해 보이는 물건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 이게 있었지.”
찌익- 로난은 넝마가 된 천쪼가리에서 쇳조각 하나를 뜯어냈다. 테라닐의 소매에 달려 있던 칠각성 뱃지였다. 지금껏 만난 조직원들 중 테라닐만 차고 있었던 걸 보면 아무래도 주교를 상징하는 물건 같았다.
“시발···도대체 뭘로 만든 거야?”
뱃지를 살피던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농후한 반짝이 마나가 뱃지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물에 타서 마시면 반짝이는 오줌이 나올 것 같았다.
‘불쾌하군.’
로난은 투덜거리면서도 뱃지를 챙겼다. 분명히 쓸 곳이 생길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뱃지를 제외하면 테라닐에게서 딱히 챙길 만한 것은 없었다. 로난은 토막 난 척추뼈와 함께 널브러져 있는 단검을 집어들었다. 그 난리를 떨었음에도 매끈한 검신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아주 쓸만한데. 도론.”
이미르를 칼집에 꽂은 로난이 픽 웃었다. 라만차에 비해 살상력은 낮았으나 활용성이 뛰어났다. 특히 단검의 위치에서 베낀 오러를 발현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유리아의 채찍을 살피고 있는 슐리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슬렁거리며 다가간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뭐야, 그런 취향이었어?”
“제법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것 같아서 보고 있었을 뿐이다.”
“난 또 우리 누나한테 선물하면서 엉덩이라도 때려달라 할 줄 알았지. 어디 봐봐.”
“네놈은 정말···!”
로난은 시뻘개진 슐리펜을 뒤로 하고 채찍을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소재부터 범상치 않은 것이 만듦새가 상당해 보였다. 일렬로 엮인 백여 개의 금속은 하나하나가 섬세한 가공이 되어 있었다.
‘굉장하군. 하나씩 뜯어서 무기로 써도 지장이 없어.’
무기가 아닌 예술품을 보는 것 같았다. 손잡이 부분을 만지작거리던 와중이었다. 촤르륵! 갑자기 채찍이 제멋대로 줄어들더니 귀족들이 사용할 법한 고급스러운 지팡이의 형태로 변모했다.
“···진짜 대단한데.”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작정하고 살펴도 알아보지 못할 수준의 정교함이었다. 도론 정도의 대장장이가 아니고서야 재현할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누가 만든지는 몰라도 이정도면 대륙에서 손꼽히는 대장장이일 것이 분명했다. 문득 유리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알리브리헤라는 작자가 만든 건가.’
의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든다고 했었다. 그리고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 마공학 의수는 기술의 집약체라 불러도 좋을 물건이었다.
“쯧.”
로난이 혀를 찼다. 이런 뛰어난 장인이 그따위 광신도들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채찍을 챙긴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상과 달리 마석을 챙기기 위해서는 그리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이것만 챙겨도 평생 놀고 먹겠네.”
바닥에는 검은 수정이 한가득 널려 있었다. 유리아가 조종하던 괴물들이 품고 있던 마석들이었다. 검은 돌을 삼켰다는 돌풍의 증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흥미롭군. 마석을 동력원 삼아 움직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좋은 걸 처먹으니까 그 지랄을 떨었지.”
외투를 벗어 보따리를 만든 로난이 마석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마석만 골랐음에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세크리트가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해주를 천 번쯤 하고도 남을 터였다.
로난은 슐리펜의 외투까지 벗겨서 보따리를 싸맸다. 그는 떠나기 전에 시타에게 원주민들이 흘린 피를 모조리 흡수하고 가지런히 눕혀 놓을 것을 부탁했다. 시체를 처리하기 용이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일렬로 늘어선 시신들을 둘러보던 돌풍이 천천히 입을 뗐다.
“···고맙다.”
“됐어. 잘 묻어주기나 해.”
“다들 좋아할 거다. 너희 덕에 전사들 죽어서도 웃는다.”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비밀을 끝내 실토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 명예로운 침묵. 고개를 살짝 숙인 로난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좋은 곳으로 가쇼.”
동료를 떠나보내는 건 참 좆같은 일이다. 그것이 명예롭게 죽은 놈들이라면 더더욱.
짧게 묵념한 세 사람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올 때만큼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돌풍을 따라 걷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다. 생존자 찾는 것도 도와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괜찮다.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아셀이라고 복구 작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하는 놈 있는데, 나중에 불러줄까?”
“아니다. 우리끼리 할 수 있다. 바위는 바람에 깎일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돌풍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로난은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애써 강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 잘 보였다.
유리아와 테라닐의 기질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 더 이상의 생존자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성난 돌풍 또한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도착해갈 무렵, 저 멀리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이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로난이 돌풍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저거 니 동생 아니냐?”
“으음?”
돌풍의 동생인 꿈꾸는 천둥이었다. 일행을 알아본 그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세상에, 형님! 모두들!”
“잘 있었냐?”
로난이 손을 흔들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천둥이 돌풍 앞에 멈춰섰다. 그는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허억···안 돌아와서 죽은 줄 알았다. 헉, 모두 걱정 많이 했다···!”
“미안하다. 그런데 은인들 아니었으면 정말로 죽었다.”
“어쨌든 안 죽어서 다행이다. 얼른 와라. 형님 보여줄 거 있다.”
“보여줄 거라니?”
“아마 깜짝 놀랄 거다. 다들 따라와라!”
꿈꾸는 천둥이 촐싹거리며 앞서 나갔다. 세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뒤따랐다. 머지않아 펼쳐진 동굴의 전경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형님. 우리 부족 안 망했다. 아직 이만큼이나 살아 있었다.”
족히 이백 명은 되어 보이는 원주민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돌풍과 로난 일행을 발견한 사람들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저길 봐, 성난 돌풍이 돌아왔다!”
“은인들도 무사하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순식간에 몰려온 원주민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성난 돌풍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닌 거 같은데.”
“꿈이라도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성난 돌풍은 부족민들의 얼굴을 한 명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전부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부족을 재건하기에도 충분한 인원이었다. 천둥이 시타를 가리키며 통쾌하게 웃었다.
“꿈 아니다. 저 새가 사람들 있는 곳 알려줬다. 붉은 길 따라가니까 피 흘리는 사람들 나왔다.”
돌풍의 눈이 커졌다. 로난과 슐리펜이 격전을 치를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구조는 원주민들이 부상자를 찾아서 데려오면 시타가 치유를 해 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뺘잇! 로난의 머리 위에 웅크리고 있던 시타가 어떠냐는 듯이 깃털을 부풀렸다.
“이건···정말로···나는···.”
한순간 돌풍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넓찍한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덩치도 산만한게 질질 짜기는.”
로난이 낄낄거렸다.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닦은 돌풍이 다시 로난을 돌아보았다. 숨을 몰아쉬던 그가 로난에게 허리를 숙였다.
“고맙다! 절대 잊지 않겠다!”
“됐으니까 나중에 족장 되면 한턱 내.”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우리는 영원히 너희들의 벗이자 동맹으로 남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돌풍이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여인의 목소리가 굴 속에 울려 퍼졌다.
[60분이 경과했습니다. 보안 시스템 재가동. 강한 진동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허, 벌써 이렇게 됐나.”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쿠구구구구! 별안간 동굴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원주민들이 웅성거렸다. 눈물을 마저 닦아낸 성난 돌풍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진정해라! 금방 지나가는 지진이다! 여자와 아이를 중심으로 모아라!”
굵직한 목소리에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이성을 되찾은 사람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모여들었다.
방금 전까지 질질 짜던 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동생인 꿈꾸는 천둥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겁에 질린 사람들을 인도했다.
“이리 와라. 안 넘어지게 조심해라.”
“제법인데.”
로난이 웃었다. 족장은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정말로 기대를 걸어도 될 것 같았다.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 작업에 앞서 스캔을 실시합니다. 식별 코드가 없는 대상자는 자동으로 추방됩니다.]파앙! 그 순간 출처 모를 곳에서 터져 나온 마나의 파장이 굴에 있던 사람 전원을 훑으며 지나갔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저건···.”
원주민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변화가 없는 것은 그와 슐리펜, 시타 뿐이었다. 저게 식별 코드인가. 로난이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미 식별자 3인 확인되었습니다. 대상을 추방합니다.]우웅! 별안간 눈앞에 나타난 푸른 빛무리가 로난과 슐리펜을 집어 삼켰다. 다급히 날아오른 시타 또한 얄짤 없이 삼켜졌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원주민들이 경악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쿠구구구구···! 진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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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악! 뭐야?!”
“음···!”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앞머리를 젖히는 건조한 바람에는 고운 모래알이 분진처럼 섞여 있었다.
“여긴···.”
로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높으면서도 맑은 하늘이 머리 위로 드리워 있었다. 불그스름한 사구들이 지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사구에 박힌 채 바동거리던 시타가 가까스로 머리를 빼냈다.
“뻬엣! 뻿뻿!”
“이건 예상치 못했군. 공간 마법의 일종인가.”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시타는 연신 도리질을 하며 모래를 뱉어냈다. 그들은 붉은모래 사막의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저 멀리 왕관처럼 솟아오른 다인하르가 보였다.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족히 이틀은 가야 할 거리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거대한 로크 버드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바싹 말라 붙어가는 괴조의 옆구리에는 어디서 많이 본 쇠붙이가 박혀 있었다.
유리아의 짐승들이 쏘아대던 작살. 이것이 천둥이 타고 왔던 놈이라는 것을 알아본 로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유령이 귓볼을 씹는 기분이구만···.”
추방된다 고지를 듣기는 했지만 정말 이렇게 쫒겨나니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챙겨 온 물건들은 모조리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뭐, 그럼 돌아갈까.”
로난이 막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쿠구구구! 별안간 사막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겪은 것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의 지진이었다. 문득 다인하르에 시선이 닿은 로난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 저건?”
콰과과과! 다인하르가 움직이고 있었다. 불길처럼 유기적인 형태를 띤 바위산들이 겹겹이 솟아나고 있었다. 땅을 파헤치고 올라온 지저의 금속들이 다인하르를 휘감고 있었다.
자로딘 수준의 대지 마법사 백 명이 있어도 연출하지 못할 장관이었다. 문득 다인하르에서 들었던 안내음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보안 시스템···?”
그제야 로난은 바위산들의 형체가 자연스럽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애초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지진은 수십 분이 지나서야 잦아들었다. 변형을 마친 다인하르는 규모가 세 배 정도로 커져 있었다. 하늘을 찢어발길 기세로 솟아난 바위산의 군집은 꼭 거대한 요새를 연상케 했다. 벙쪄 있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저래서는 아무도 못 들어가겠는데.”
“그럴 것 같군. 지형 전체를 방어막이 감싸고 있다”
“뭐?”
“그것도 굉장히 강력한 방어막이다. 제국군도 돌파하기 힘들겠군.”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자 과연 푸르스름한 마나 장벽이 다인하르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무언가를 대비한 요새와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슐리펜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로난. 약속을 지켜라.”
“약속?”
슐리펜은 대답하는 대신 물끄러미 로난을 바라보았다.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의도를 파악한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하여튼 너는 제정신이 아니야.”
로난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손바닥만한 종이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이릴이 그려져 있었다. 슐리펜의 목소리가 벌벌 떨려왔다.
“이···이것이···.”
“액자에 넣어서 보관해. 이상한 짓 하기만 해봐.”
슐리펜은 황제의 칙령이라도 받드는 사람처럼 양손으로 그림을 받아들었다. 가만히 그림을 응시하던 슐리펜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보로 삼겠다.”
“미친놈.”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폭풍검을 각성했을 때보다 삼만 배 정도 격한 반응이었다. 바람결을 따라 사구에 새겨지는 물결무늬가 모험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그들은 왔던 길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에 흥건하게 묻어 있던 도적들의 핏자국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