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20)
120. 사계의 언덕(1)
#120
용무를 마친 로난과 슐리펜은 곧장 제도로 귀환했다. 유령마가 아닌 보통 말을 타는 바람에 다인하르까지 올 때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수면과 식사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말 위에서 보낸지도 벌써 아흐레가 지났다. 엉덩이에 버섯이 자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괜히 성질이 난 로난이 배낭 속에서 졸고 있는 시타를 콕콕 찔렀다.
“인마, 너도 이제 내려서 가.”
“뺘!”
도리질한 시타가 배낭 속으로 고개를 폭 집어넣었다. 태도가 영 새침한걸 보아하니 덥기는 더운 모양이었다.
사막을 벗어났음에도 남녘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짧은 풀과 황무지로 이루어진 무미건조한 풍경이 쭉 이어지고 있었다. 점점 액체가 되어가던 로난의 시선이 슐리펜에게 닿았다.
“지독한 새끼···귀족 사타구니는 무슨 강철로 되어 있냐? 아프지도 않아?”
“이 정도는 문제없다.”
그는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은 있었지만 대귀족 특유의 품격은 조금도 마모되지 않았다. 로난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부럽구만. 나도 군인일 때 말이나 많이 타 두는 거였는데.”
“다만 이릴 양의 초상화가 상할까 걱정이군. 속도를 높이지.”
“미친 새끼.”
슐리펜은 십 분에 한 번씩 셔츠 앞주머니에서 이릴의 그림을 꺼내서 보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로난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쏘아지듯 뛰쳐 나간 말이 슐리펜을 앞지르는 순간이었다. 탓! 번개처럼 손을 뻗은 로난이 그가 보고 있던 이릴의 그림을 낚아챘다.
“이, 이놈! 무슨 짓이냐!”
“크하하하, 원래 소중한 건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이지!”
“멈춰라! 그림이 손상되기라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로난은 제국군 기병대라도 된 것처럼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사색이 된 슐리펜이 로난을 뒤쫓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이 바람의 형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뺘웅.”
소란에 잠이 깬 시타가 짜증스레 몸을 뒤척였다. 지천에 만개하는 아지랑이가 늦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정이 보름째 되는 날 제도에 도착했다.
****
제도로 돌아온 로난이 가장 먼저 찾아가려 했던 곳은 세크리트의 집무실 세파라치오였다. 애초에 다인하르 같은 객지까지 다녀온 것도 그에게 해주를 받기 위함이었으니. 믿을 수 없는 답변을 들은 로난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뭐야, 휴가를 갔다고?”
자로딘이 집무실에 없던지라 세파라치오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나 교육진에게 수소문을 해야 했다. 집에서 책을 읽다 불려 나온 아셀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으, 응···그야 방학이니까.”
“젠장, 저주를 다섯 개씩 달고 사는 사람이 갑자기 어딜 갔대?”
“부, 북부에 간다고 하셨던 것 같아. 새로운 저주를 발견하셨다면서. 아마 개학일에 딱 맞춰 올 것 같다고 하시던데···.”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까.”
로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여름방학 중에 해주까지 얼른 해치워 버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았다. 문득 그의 시선이 아셀의 뒤편에 세워져 있는 집에 닿았다.
“참, 이사는 잘 했냐?”
“으응. 덕분에.”
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부모님이 새롭게 이사온 곳은 다름아닌 로난의 옆집이었다. 안전과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을 때 이만한 곳이 없었다.
이사는 로난과 슐리펜이 다인하르에 다녀오는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마르야와 브라움을 비롯한 부원들이 힘을 보탰다. 면목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로난이 말을 이었다.
“덕분에는 무슨. 아무것도 못 도와줬는데···그럼 마르야는 지금 제도에 있는 거지?”
“응.”
“그건 잘 됐군. 받아라.”
“흐약?!”
별안간 로난이 아셀의 주머니에 손을 푹 꽂았다. 화들짝 놀란 아셀이 비명을 질렀다. 주머니에서 손을 뺀 로난이 등을 돌렸다.
“부모님한테 안부 전해드려. 난 간다.”
“로, 로난. 이게 뭐야?”
로난의 손이 빠져나왔음에도 주머니에서는 두툼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셀은 로난이 가고 나서야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건을 빼내 확인했다.
“이건···!”
하얗게 질린 아셀이 뭐라 말하려 했으나 로난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아셀에게 소식을 들은 로난은 곧바로 시장으로 향했다.
“돈 많아서 나쁠 거 없지. 암.”
다인하르에서 챙긴 전리품으로 금전을 마련할 목적이었다. 마르야가 있다는 건 카라벨 상단이 머물고 있다는 소리였으니 적어도 가격을 후려치기 당할 걱정은 없었다.
“자, 자, 얼음입니다! 8서클 얼음 마법사가 방금 막 얼려낸 꽉 찬 돌얼음입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양산 다섯 개에 은화 단 한 닢!”
녹아내릴 듯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시장 특유의 왁자지껄함은 가라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거진 한달간 보아온 황무지와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로난이 한창 상단을 찾아 헤매는 와중, 익숙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엥?”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도저히 평소의 모습을 연상할 수 없는 풀어진 차림새였지만, 특유의 구릿빛 피부와 자기주장이 강한 몸매 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인은 어느 노점상 앞에서 빵에 끼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녀가 빵까지 모두 해치우는 것을 본 상인이 두 손을 모은 채 입을 열었다.
“거, 검성이여···입에 좀 맞으십니까?”
“전대 검성이다. 하나 더 부탁하지.”
상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동전을 지불한 여인이 새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가까이 다가간 로난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비로제 교관님!”
“로난? 간만이군.”
“못 알아볼 뻔 했어요. 옷을···굉장히 자유롭게 입으시네요.”
나비로제는 하얀 민소매 블라우스에 새카만 와이드 팬츠를 입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어깨가 행인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참으로 전위적인, 두 세기 정도가 지나면 인정받을 지도 모르는 차림새였다.
“무슨 상관이냐. 나만 편하면 됐지.”
“그건 맞죠. 저는 교관님의 그런 면이 좋아요.”
“마침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이리 와라.”
“네?”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문 나비로제가 로난에게 손짓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접근하는 순간이었다. 콱!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날아온 나비로제의 손이 로난의 귀를 붙잡아 비틀었다.
“갸아아악! 왜, 왜 이러는 거에요?!”
“왜라니. 방학 전에 스승에게 인사 한번 안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데샨, 아데샨 선배한테 들었을 거 아녜요!”
“말이라는 건 직접 해야 의미가 있는 법이지. 괘씸한 것.”
로난은 시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귀를 비트는 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정말로 서운했던 것 같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거나 말거나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속죄하고 싶다면 지금 바로 갈레리온 관으로 가라. 아데샨이 너한테 보여주겠답시고 매일같이 훈련에만 매진하고 있으니까.”
“뭐야, 선배가 벌써 돌아왔어요?”
“그래.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상냥하게 대해 줘라. 알았나.”
“알았어요. 젠장, 갈 테니까 이제 좀 놔요!”
로난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나비로제가 손에 힘을 풀었다. 가슴 위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닦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기량이 향상된 게 눈에 보여. 칼을 가져왔으면 대련이라도 해 보는 건데 말이지.”
“빌어먹을···그래도 교관님 주려고 선물까지 가져왔는데 이러면 곤란해요.”
“선물?”
“자, 받아요.”
로난은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덥썩 쥐어 주었다.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다인하르에서만 나는 검은 마석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걸 어디서 난 거냐?”
“그냥 받아요. 앞으로도 신세질 것 같으니까. 그럼 저는 이만!”
“잠깐, 기다려라···!”
로난의 모습은 이미 군중 사이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만사를 발동해서라도 잡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마석을 만지작거리던 나비로제가 헛웃음을 쳤다.
“···도대체가.”
****
로난은 마르야가 있는 카라벨 상단에 다인하르 마석 열 개를 팔아치운 뒤 돌아왔다. 집에 백 개가 넘게 남아 있었지만 상단 측에서 당장 지불할 대금이 부족했던 탓에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카라벨 부녀가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지는 모습은 제법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정말 다인하르 마석이군요. 그것도 최상급의···어떻게 구했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겠지요?”
“뭐, 그렇죠.”
“알겠습니다···갈 길이 바쁘시다 하니 정산금은 댁으로 보내 드리지요. 혹시 나중에 제 딸아이와 함께 카라벨 상단을 이끌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아빠, 제발!”
얼굴이 새빨개진 마르야가 두온에게 달려들었다. 로난은 뒤늦게야 그것이 마르야와의 결혼을 종용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로난은 어디를 때려야 효과적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한 뒤에 발걸음을 옮겼다. 고급스러운 지팡이 하나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목적지는 갈레리온 관. 나비로제의 수업이 평소에 이루어지는 제 1투기장이었다.
-캉! 카가각!
-퍼억!
투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문을 열자 마공학 기사 두 명과 싸우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난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 키가 더 커진 거 같네···.”
여자들이 키가 빨리 큰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아데샨은 로난이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말총처럼 묶은 머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하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기사들의 맹공을 가뿐하게 피하는 아데샨의 모습은 눈이 다섯 개쯤 달린 사람 같았다.
타고난 반응속도와 동체 시력으로 회피에 임하는 로난과는 달리, 그녀는 특유의 통찰력을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다. 아데샨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석궁을 본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흠···상대가 안 좋은데.”
활대부터 밧줄까지 모두 새카만 석궁은 그녀가 도론에게서 받은 신무기였다. 로난이 생각하기에도 썩 괜찮은 무기였다. 사격만 제대로 할 줄 안다면 상대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아데샨의 능력과 어마어마한 상승 효과를 일으킬 테니까.
다만 이번에는 영 상대가 좋지 않았다. 생물이 아닌 마공학 기사에게 그림자의 마나는 통하지 않았다.
후웅! 그때 아데샨의 뒤편에 있던 기사가 수직으로 검을 내려 벴다. 아데샨은 황급히 측면으로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캉! 바닥과 충돌한 칼 끝에서 불똥이 튀었다.
“크읏···!”
다급히 몸을 일으킨 아데샨이 내려베기를 한 기사를 조준했다. 아직 검을 들어올리고 있는지라 빈틈이 발생하고 있었다.
침착하게 머리를 겨냥한 그녀가 석궁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대로 격발된 쇠뇌가 마공학 기사의 머리에 명중했다. 콰앙! 작은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기사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쿵! 눈구멍 사이로 연기를 내뿜으며 쓰러진 기사가 기계적인 음성을 내뱉었다.
[일정량 이상의 피해 확인. 기능 정지.]“좋았어···!”
기사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데샨이 주먹을 움켜쥐며 쾌재를 불렀다. 그 순간 그녀의 사각에 서 있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아···!”
승리에 도취되서 차마 보지 못했다. 칼날은 이미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도저히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거리였다. 아데샨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캉!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마공학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능 정지.]“···응?”
아데샨이 조심스레 눈을 떴다. 쿵! 비틀거리던 기사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새하얀 단검 한 자루가 목과 몸통을 잇는 가느다란 이음새에 박혀 있었다.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아, 로난!”
아데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로난이 기사에게 박혀 있던 이미르를 뽑아 들었다. 그는 아데샨이 쓰러트린 기사를 돌아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좀 쏘던데요? 깜짝 놀랐어요.”
“으음···아직 부족해. 방금도 꼼짝없이 당할 뻔 했잖아.”
“아니,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로난이 기사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아데샨이 쏜 쇠뇌는 정확히 기사의 눈구멍에 박혀 있었다. 기껏해야 손가락만한 넓이의 틈새. 정자세로 쏴도 맞추기 힘든 일인데, 이런 난전에서 해낸 것은 단순히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새카맣게 탔네. 개구쟁이 같아.”
“좀 더웠거든요. 그래도 거기 사는 놈들에 비하면 눈사람이나 다름없죠.”
“맞아, 다친 곳은 없어? 정말로 다인하르까지 다녀온 거야?”
별안간 아데샨이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숨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면밀히 로난의 안색을 살피던 그녀가 당황하며 물러섰다.
“핫···! 미안해. 땀 냄새 날 텐데···!”
“괜찮아요. 그나저나 시간 좀 있어요? 혹시 내가 방해한 건가?”
“아냐, 나도 막 쉬려는 참이었어.”
“잘됐네요. 받아요.”
고개를 끄덕인 로난이 지팡이를 내밀었다. 귀족들이나 사용할 것처럼 고급스러운 모양새였다.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청 비싸 보인다···갑자기 이걸 왜···?”
“선물이에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써야 하는 무기라서. 한번 손잡이 부분을 꽉 쥐어 볼래요?”
“응?”
아데샨은 그렇게 했다. 촤르르륵! 별안간 매끈하던 표면 위에 이음새가 드러나며 지팡이가 길게 늘어났다. 2m는 거뜬하게 넘어가는, 강철로 된 뱀과 같은 모습을 본 아데샨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채, 채찍? 설마 이거 채찍이야?”
“역시 내 예상이 맞군. 한번 세게 휘두르면서 ‘이 더러운 돼지!’ 라고 해 볼래요?”
“으으으응···?”
“엄청 잘 어울려요. 입소문만 퍼지면 아마 일부러 맞으러 오는 놈들도 있을걸요.”
아데샨이 당혹스레 신음했다. 로난이 굳이 그녀에게 채찍을 준 이유는 단순히 지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신에다 도도한 인상의 미녀는 채찍을 휘둘러야 했다. 긴 가죽 부츠까지 신으면 더할 나위 없고. 벙쪄서 채찍을 만지작거리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의미는 모르겠지만···정말 잘 쓸게. 고마워.”
“됐어요. 그럼 훈련이나 마저 할까요? 저도 몸이 영 찌뿌둥해서.”
“응, 좋아. 그런데 그 전에 나랑 잠깐 어디 좀 다녀오지 않을래? 교내에 있어서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거야.”
“엉? 어디를요?”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사계의 언덕. 네게 할 이야기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