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25)
125. 비명을 찾아서(2)
#125
“내가···자수한 마을이네.”
분명히 기억에 있는 풍경이었다. 로난이 사람을 죽이고 자수해서 징벌 부대로 끌려간 마을이 바로 이곳이었다.
로난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날에 비가 내렸는지 거리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웅덩이 앞에 쪼그리고 앉은 로난이 자신의 행색을 확인했다.
‘···거지로 착각할 만 하네.’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린 로난이 픽 웃었다. 몸에 걸쳐진 옷가지는 흙탕물을 뒤집어쓴 것이 별다른 결점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헤져 있었다.
방랑 생활을 할 때는 늘 이런 차림이었다. 얼굴이 약간 더 삭은 것이 징벌병으로 입대한 해가 맞는 것 같았다. 설마 주변 환경 뿐만 아니라 몸까지 바꿔 놓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때랑 모든 게 똑같아. 마을 이름이 뭐더라?’
도로도 잘 깔려 있고 행인도 많은 것이 제법 번화한 마을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서도 한참 더 뻗어 있는 대로의 끝에는 성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제도의 황궁과 비교하면 가소로운 수준이었지만 그런 대로 봐줄 만한 성이었다. 망루에 걸린 가문 기를 본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단텔 남작인가 뭔가 하는 놈이 다스리던 곳이었지.’
징벌 부대에 입영할 수속을 밟기 위해 저기까지 끌려 갔던 기억이 났다. 평소에는 노느라 바쁜 남작이 친히 행차해서 로난은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던 장면도.
‘징집관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 자식도 죽여 버렸을 텐데. 추억이군.’
로난이 살해한 사람 중에는 그의 아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에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옛 기억을 되짚던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번에는 뭘 보여주려는 거냐.”
로난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각오를 다지며 심호흡을 했다. 약간 습한 공기 속에는 빵 굽는 냄새가 고소하게 묻어나 있었다.
더 강력한 저주라 그런지 심상 세계도 훨씬 정교하게 구현된 것 같았다. 첫 해주 당시 진입했던 님버튼도 그랬지만 도무지 현실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이, 더럽게 길거리에서 뭘 하는 거야.”
“바지에 똥 지릴 때까지 맞기 싫으면 가던 길 가쇼.”
“히이익···! 이, 이래서 요즘 거지들은···!”
거지꼴인 자신을 바라보는 행인들의 멸시 어린 시선조차 현실감이 넘쳤다. 그때 좌우를 둘러보던 로난의 시선이 한 곳에 멎었다.
“음?”
“히히, 많이 먹어.”
앞치마를 두른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기껏해야 일곱 살에서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쬐깐한 꼬맹이었다.
꺄르륵 웃을 때마다 앞니만 쏙 빠져 있는 이빨이 슬쩍슬쩍 모습을 비췄다. 하지만 로난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앞니 빠진 꼬맹이가 아니었다.
“으음?”
웬 덩치 좋은 개새끼 한 마리가 소녀의 앞에서 머리를 처박은 채 빵을 먹고 있었다. 멋지게 휘어진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저 개를 어디서 봤더라···?”
날렵한 뒤태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소녀가 식사 와중에도 연신 만져대고 있었지만 입질도 하지 않는 걸로 봐서 어지간히도 물러 터진 놈이었다. 그때 빵을 다 먹은 개가 고개를 들었다.
“다 먹었어? 히, 착하다.”
“···어?”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늑대처럼 뾰족한 얼굴에 반쯤 잘려나간 왼쪽 귀. 개의 얼굴에 박혀 있기에는 지나치게 멋진 푸른 눈동자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가 없었다. 입맛을 다시던 개가 소녀의 얼굴을 핥아 대기 시작했다.
“아하하, 간지러워!”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나 벙찐 채 서 있던 로난이 간신히 입을 뗐다.
“···시타.”
“월?”
소녀를 핥던 개가 로난을 돌아보았다. 멍청하니 눈을 끔벅이는 모습을 보는 순간 로난은 저 개새끼가 정말로 시타라는 것을 확신했다.
어깨에 올라타 뺘뺘거리는 시타의 원조.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로난과 방랑길을 함께하다 밀렵꾼들에게 목숨을 잃은, 어찌 보면 로난을 징벌 부대에 입대시킨 원흉 중 하나.
“얌마, 너···”
수십 년 만의 재회였다. 그가 뭐라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저 멀리서 카랑카랑한 여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얘! 카밀라! 심부름 시킬 게 있다니까 거기서 뭐 하는 거니?”
“엑, 지금 가요!”
화들짝 놀란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대로 건너편에서 중년의 여인이 허리에 양손을 짚은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황상 소녀의 어머니나 고용주인 듯했다. 마지막으로 시타를 쓰다듬은 소녀가 대로 쪽으로 달려갔다.
“히히, 난 갈게. 안녀엉!”
그녀는 수많은 마차와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를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입맛을 다시던 시타가 슬그머니 로난의 옆에 와서 앉았다.
“···잘 지냈냐?”
“월.”
“새끼가. 주인은 거지한테 두들겨 맞고 있는데 속 편하게 빵이나 처먹고 말야.”
“월월.”
시타는 못 들은 척 뒷발로 귀를 긁었다.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원래 이런 놈이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방랑길이 적적하여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주종 관계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개인 행동을 하는 격 없는 동반자에 가까웠다. 저런 뻔뻔스러운 자태조차 귀엽게 보이는 걸 보니 그립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마침 푸줏간이 바로 옆에 있었다. 로난은 돼지에게서 뺏은 동전으로 소시지 하나를 사서 시타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할 일은 정해져 있는데 즐기면서 해도 나쁠 건 없었다.
“이거 줄 테니까 나 좀 도와 주라.”
“월!”
시타가 나만 믿으라는 듯이 짖었다. 작대기 하나를 집어든 로난이 동력원을 전환했다. 다행히도 칼만 없지 능력은 그대로였다. 반짝이는 마나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왔다.
“이거랑 같은 냄새가 나는 놈을 찾아.”
“월.”
로난은 시타에게 그 냄새를 맡게 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딴 식으로 추적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냥 이 개새끼랑 같이 있고 싶었다.
로난은 시타와 함께 심상이 만들어낸 마을을 거닐었다. 소시지를 받아먹은 시타는 땅에 코를 처박고 열심히 냄새를 맡고 있었다.
저주의 원흉이라 불릴 만한 존재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시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나저나···니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건데.”
“월?”
불현듯 로난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를 징벌병으로 만든 사건이 바로 이 마을에서 벌어졌다.
“다시 생각해도 좆같군.”
까마득한 과거였음에도 그 기억만은 선명했다. 푸른 소나무의 달 다섯 번째 날. 이 마을에 체류하던 도중 시타와 떨어져서 행동할 때 벌어진 일이었다. 서두는 마차 사고가 일어난 현장을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백 명은 되는 인파가 대로변에 몰려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화려한 사두 마차가 길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핏물에 담궜다 뺀 자루 같은 것을 끌어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아아악! 아아아아아!!
그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로난이 알아차리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발굽에 짓밟힌 아이의 얼굴과 몸뚱이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그 옆에서는 시타가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죽어 있었다. 화살을 쏜 것은 네 명의 남녀였다. 그들은 마차가 더러워졌다며 마부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있는 청년의 옆에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역겨운 대화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 저 개새끼는 갑자기 왜 달려든 거야? 저 아줌마가 기르는 개라도 되나?
– 몰라. 내가 머리에 맞췄으니까 맥주는 니가 사.
구경꾼들 중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급스러운 차림새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청년이 제법 높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로난은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활을 들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눈을 부라렸다.
– 엉? 이 거지는 또 뭐야?
이후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에 시체가 잔뜩 깔려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손에 쥐어진 칼은 완전히 부러져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더는 구경꾼도 보이지 않았다. 청년과 활잡이들의 머리가 발밑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화살을 쏜 연놈들의 몸에는 밀렵 조직 카리볼로를 상징하는 갈고리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 카리볼로···.
로난이 밀렵꾼들을 증오하게 된 것도 그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부터였다. 현장에는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들의 시체도 열 구 정도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갑옷에는 저 멀리 성에 꽂혀 있는 깃발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귀족의 사병이었다. 그제야 로난은 청년이 단텔 남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로난은 청년의 머리를 밟아서 터트린 뒤 시타의 시체를 안아들었다.
시타를 마을 근처의 숲에 묻어 주고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풀숲이 바스락거리더니 마을의 경비병 서너 명이 나타났다. 로난에게 창을 겨눈 그들의 입에서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 움직이지 마라···! 이 괴물!
로난은 미련 없이 칼을 버렸다. 순순히 연행당한 그는 여차저차 재능을 인정받아 사형을 면하고 징벌 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젠장.”
오랜만에 재미없는 이야기를 떠올려 버렸다. 심상 세계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사고가 재현될 가능성이 컸다.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작정하고 돌아다닌다면 사고를 막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해주지 지나간 과거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처럼 적당히 돌아다니다가 원흉을 발견하면 찾아서 베면 될 일이었다. 시타야 소시지로 꼬드기면서 계속 붙어 다니면 되고.
‘현실에서도 안 죽을 거야. 미래가 바뀌었으니.’
로난이 회귀한 이후의 제국은 결코 작지 않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패악질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귀족계도 대규모 물갈이를 겪었다.
단텔 남작처럼 무능한 인간들은 열 중 아홉이 영주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사고란 우연이 겹쳐서 벌어지는 일이니 소녀가 죽을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나랑은 상관 없어.’
그리 되뇌인 로난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파란 하늘 아래 세워진 마을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빵 굽는 냄새가 한층 짙어져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정확히 열 발자국을 걸어간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에이, 씨발.”
밑창에 아교가 들러붙은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기분이 더러워서라도 사고부터 막아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장소는 대충 기억이 나는데 오늘 날짜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뼈만 남아 걸어 다니는 것이 꼭 소금쟁이를 연상케 했다. 로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하.”
그에게 두들겨 맞은 돼지와 한패였던 소년이었다. 살금살금 다가간 로난이 소년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얌마.”
“히에에엑! 너, 너는!”
소금쟁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도망치기 위해 힘껏 발버둥쳤지만 로난의 구속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로난이 팔을 조이며 으르렁거렸다.
“닥쳐. 아까 그 돼지새끼처럼 쳐맞기 싫으면 똑바로 대답해. 오늘이 며칠이냐?”
“케엑···가, 갑자기 그게 무슨···.”
“며칠이냐고.”
“커어억···! 푸, 푸른 소나무의 달 다섯 번째 날이야! 응! 맞을 거야!”
“뭐?”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고가 벌어졌던 바로 그 날이었다.
‘설마.’
최악의 각본이 뇌리를 스쳤다.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시타에게 빵을 주던 소녀의 체구는 여인이 안고 있던 핏덩이와 비슷해 보였다.
‘그럼 이 새끼가 달려든 이유도···.’
시타는 싸가지가 없었지만 받은 은혜는 갚는 놈이었다. 문득 로난은 소녀를 부른 여인의 윤곽이 오열하던 여인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리 읊조린 로난이 시타의 앞에 남아 있는 소시지를 죄다 던졌다.
“여기서 기다려.”
“월.”
시타는 얌전히 자리에 착석해서 소시지를 먹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재미없는 전개였다. 곧바로 몸을 돌린 로난이 사고가 벌어졌던 장소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저주라도 그렇지···!”
다행히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로난이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대로의 모습이 펼쳐짐과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위, 위험해!”
거대한 사두 마차가 대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다른 마차들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모자를 푹 눌러 쓴 마부가 행인들을 향해 침을 뱉어대고 있었다.
“으하하!”
“씨발.”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는다. 대로의 한복판. 마차와 직선으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조금 전에 봤던 소녀가 땅에 널브러진 빵들을 주워담고 있었다.
“하나···둘···.”
마차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뒤늦게 발굽 소리를 들은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어?”
느닷없이 불거진 그림자가 소녀의 얼굴을 덮었다. 달리는 말들이 만들어낸 그림자였다.
“이 애새끼는 뭐야?”
마부는 귀찮은 돌부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당연히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막 대로변까지 다다른 로난이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빌어먹을, 멈춰라!”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인파가 내지르는 비명에 삼켜져 소멸해 버렸다. 직접 구하기에는 늦었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로난이 발밑을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엉?”
빠악! 일직선으로 날아간 돌멩이가 마부의 머리에 적중했다. 의식을 잃은 마부가 마차에서 떨어졌다. 와그작. 뼈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삐가 당겨지며 마차의 진로가 틀어졌다.
“히히히히힝!”
“피해!”
놀란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속도가 다소 늦춰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녀를 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번에도 못 구하는 건가. 로난이 입술을 짓씹는 차였다. 잽싸게 뛰쳐나온 그림자 하나가 그의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시타?”
“월!”
바람처럼 달려간 시타는 순식간에 소녀에게 도달했다. 말발굽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소녀의 목덜미를 물어챈 시타가 그녀를 대로변으로 내던졌다. 퍼억! 말에 들이받힌 시타가 저 멀리 날아갔다.
“······!”
로난의 눈이 커졌다. 날아가던 개의 몸뚱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소녀가 시타에게 달려갔다.
“멍멍아!”
“끼잉···끼이이잉···.”
바닥에 누워 껄떡이는 시타의 아래로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난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너···.”
간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이렇게 된다. 뱃속에서 역청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마차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객실 안쪽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멈춰? 무슨 일이야?”
끼이익- 화려한 문짝이 열리며 웬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여자치고는 굉장히 키가 컸다. 마차에 묻은 피를 본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더럽게.”
벌레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로난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무슨···.”
“쯧, 저 거지는 또 뭐야?”
로난과 눈이 마주친 여인이 혀를 찼다. 검은 생머리는 허리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다. 복장은 달랐지만 자신이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로난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