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29)
129. 비명을 찾아서(6)
#129
카아앙! 사나운 금속음이 절벽 위에 울려 퍼졌다. 휘청거리던 구원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로브를 쓴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뭐지?”
“윽···!”
세 개의 날붙이가 맞붙은 채 비적이고 있었다. 칼날에 묻어 있던 구원자의 피가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사내는 오른손만을 사용해서 라만차와 이미르를 막아 내고 있었다.
“이 주변의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반면 로난은 온 힘을 다하고 있음에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껏 상대해온 어떤 적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강하다. 정말 강해.’
거대한 탑이 눈앞에 솟아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좌절할 수는 없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로난이 비웃듯이 내뱉었다.
“좆같은 배신자 새끼라는 건 알고 있지.”
“흐음, 처음부터 본 건가.”
과감한 도발에도 사내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검에 가해지는 힘이 더해졌다. 로난의 발꿈치가 뒤로 밀려났다. 옅은 한숨을 내쉰 사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살려둘 수는 없겠군.”
캉! 순간적으로 로난의 검을 뿌리친 사내가 역공에 나섰다. 혜성을 연상케 하는 찌르기가 로난을 향해 쏘아졌다.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쾌검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뭔, 씨발···!’
눈으로 좇는 것이 고작이었다. 새하얀 검끝은 곧장 로난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막거나 쳐내는 건 무리였다. 촤악! 로난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칼날이 그의 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했어?”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아냥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사내가 허리를 뒤로 꺾었다. 쐐액! 참격이 그려낸 호가 사내의 콧잔등 위로 지나갔다.
“젠장.”
“맹수 같은 검이군. 정말 인간인가?”
사내가 로난을 마주 보고 섰다. 지면을 박차고 달려든 로난이 맹공을 퍼부었다. 카가각! 붉게 물든 라만차가 사내의 몸에 닿으려 할 때마다 불씨가 튀어올랐다.
‘닿지 않아.’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마나로 강화한 참격마저도 모조리 막히거나 쳐내지고 있었다. 상처를 비집고 흘러내린 피가 쇄골에 고이고 있었다. 탓! 줄곧 응수만 하던 사내가 뒤로 제비를 넘으며 착지했다. 거리를 벌린 그가 차갑게 읊조렸다.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정체를 알아야겠다.”
쾅! 한순간 사내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서 돌 쪼가리가 튀어오르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쉰 로난이 정신을 집중했다. 시간이 길게 늘어지며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느새 눈앞까지 쇄도해온 그가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쐐애액! 수십 개의 혜성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 방금과 같은 찌르기라는 사실을 눈치챈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니미···!”
로난이 다급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흘려낸 공격들이 몸 곳곳을 핥으며 지나갔다. 푹! 미처 반응하지 못한 두 번의 찌르기가 그의 복부와 왼쪽 어깻죽지를 관통했다.
“커억!”
로난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분명 심상에 불과할 텐데 더럽게 아팠다.
챙그랑! 힘줄이 끊어지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라만차가 떨어졌다. 검로를 분석해낸 로난이 입술을 뒤틀었다.
‘구원자의 검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구원자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기술이었다. 미묘하게 다르기는 했지만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내 진짜 더러워서.’
몸도 몸이었지만 기술의 격차가 너무 많이 났다. 사내가 로난의 다리를 끊어 놓기 위해 재차 검을 휘두르는 찰나였다. 콰직! 시야 바깥에서 날아온 거대한 손아귀가 사내를 움켜쥐었다.
“으음?!”
【■■! 네가 감히!!】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로난이 옆에 있던 바위를 짚고 섰다. 새카만 비늘로 뒤덮인 손은 어지간한 축사보다 거대했다.
로난이 손목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시야를 온통 가릴 정도로 거대한 블랙 드래곤 한 마리가 사내를 움켜쥐고 있었다. 알리브리헤의 본모습이었다. 그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거냐!】
“알리브리헤. 그대도 동의했지 않습니까.”
【다른 길을 찾는 것에 한해서다! 구원자를 뒤에서 찌르다니, 어찌 이런 짓을!!】
“허무하게 낭비될 힘을 양도받았을 뿐입니다.”
사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메마른 어조에서는 화분에 물을 줬다고 말하는 수준의 감정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재차 노호를 터트린 알리브리헤가 사내를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이 자식!】
콰아앙!! 지면이 뒤집히며 절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알리브리헤의 뒤편에서 엘프 여인이 달려 나왔다.
“구, 구원자님!”
“크···으으으···.”
엘시아가 구원자를 부축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으나 칼에 찔린 자리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울걱울걱 샘솟고 있었다. 상처를 지혈하던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 일어나세요. 네? 돌아가시면 안 돼요.”
매사에 얼음장 같던 평소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붉은 눈동자 아래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원자를 힐긋 돌아본 알리브리헤가 이를 악물었다.
【서둘러 옮겨야 한다. 놈의 검에 찔린 상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낫지 않아.】
“네, 네···!”
엘시아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주문을 영창했다. 인근의 마나가 회오리치듯 모여들며 저 높은 하늘에 기하학적인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 가장 빠르고 강한 아이로···!”
이윽고 절벽 위를 온통 뒤덮을 정도의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푸르게 빛나는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접으며 강하했다. 거진 알리브리헤의 절반 정도 되는 덩치였다. 웅장한 자태를 본 로난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이란···!’
필레온에서 배운 적이 있다. 폭풍의 황태자라 불리는 최상급 바람 정령 하이란. 저걸 실제로 현현시킬 수 있는 정령사가 존재할 줄은 몰랐다.
하이란이 날갯짓을 하며 그녀의 앞에 착지했다. 콰아아아! 불어닥친 강풍이 인근의 불과 연기를 모조리 날려 버렸다. 구원자는 어느새 소환된 원숭이 정령에게 두 팔로 안겨 있었다.
“부탁해요 하이란. 이 사람을 제 거처로 옮겨 주세요.”
하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자를 짊어진 원숭이 정령이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다시 날개를 펼친 하이란이 날아오르려는 찰나였다. 알리브리헤의 손바닥 아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안 됩니다.”
【뭣이···!】
알리브리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서걱. 그의 손목 위로 붉은 선이 그어짐과 동시에 그림자 하나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촤아악! 붉은 선 위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 착지한 그림자가 구원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힘을 다 양도받지 못했습니다.”
【크하아아아악!!】
알리브리헤가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몸이 뒤로 물러났음에도 그의 왼손은 여전히 사내를 찍어누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아, 안 돼···!”
엘시아가 새하얗게 질렸다. 어깨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낸 사내가 유감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의수의 달인이라 다행이군요. 하나 만들어서 붙이면 되니까.”
【네놈이···!】
“하, 하이란!!”
엘시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곧바로 날아오른 하이란이 절벽을 벗어났다. 위대한 정령은 단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벌렸다.
“흠.”
하이란은 푸른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내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쐐애액! 검로를 따라 구현된 수십 개의 초승달이 하이란을 향해 쏘아졌다.
“무슨···!”
지켜보던 로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족히 길이가 9m는 될 법한 초승달은 하나하나가 검기였다. 개수도, 크기도, 사정 거리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이란이 전장 한복판을 가로지르던 와중이었다. 손을 뻗어 하이란을 겨냥하던 사내가 별안간 주먹을 쥐었다. 콱! 느닷없이 나타난 기괴한 장막이 하이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엘시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벼, 별의 가호를 저렇게 멀리···!”
“퓌요?!”
진로가 틀어막힌 하이란이 급정지했다. 끝끝내 따라온 검기 하나가 그의 왼쪽 날개에 적중했다. 서걱! 날개를 잃은 하이란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엘시아가 손을 뻗으며 절규했다.
“아, 안 돼!!”
“퓌요오오오···!”
곧바로 날아온 검기가 원숭이를 두 동강 냈다. 구원자가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그들의 모습은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 아아아···!”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혀를 찼다. 엘시아는 곧바로 절벽 가장자리로 달려갔으나 구원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층 거세진 불길이 전장을 휘감고 있었다. 사내를 돌아본 그녀가 격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
우웅! 크고 작은 마법진 수십 개가 사내를 둘러싸듯 생성되었다. 거대한 짐승들이 포효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전부 상급 이상의 정령이었다.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시아. 마나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네가, 네가 구원자님을···!”
정령들이 사납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사내의 몸이 크게 회전했다. 원형의 참격이 정령들을 가르며 지나갔다.
촤아아악! 찢겨나간 마나가 물보라처럼 튀어 올랐다. 수십 마리의 상급 정령이 일격에 소멸했다. 절망한 엘시아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
“제게 마법은 안 통한다는 걸 알잖습니까.”
사내가 그녀의 뒷목을 칼자루로 내리쳤다. 털썩. 의식을 잃은 엘시아가 힘없이 쓰러졌다.
곧바로 몸을 돌린 사내는 알리브리헤를 겨냥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웅! 하이란을 가로막았던 것과 같은 방어막이 알리브리헤를 뒤덮었다.
【빌어먹을! 당장 풀어라!】
“머리라도 식히고 계십시오.”
막 브레스를 내뿜으려던 알리브리헤가 노성을 터트렸다. 허나 그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별의 가호에는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사내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조금 조용해졌군.”
“···미친 새끼.”
로난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바위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진짜 위험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상처가 안 낫느니 어쩌니 하던 알리브리헤의 말이 사실인 듯햇다.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에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사내가 로난의 앞에 섰다.
“다시 묻지, 너는 누구냐.”
“니 엄마다.”
“말하지 않겠다면 죽이겠다.”
“그러시던지.”
퉷! 로난이 침을 뱉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핏덩이가 사내의 발치에 떨어졌다. 가만히 로난을 훑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이제 보니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뭐?”
“너, 어머니가 누구지?”
“그건 또 무슨 좆 빠는 소리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더욱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크윽!”
“머리 색을 제외하면 정말로 닮았군. 흐음···.”
그는 면상을 바짝 들이댄 채 로난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숨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이 새끼···호모냐?”
“가만히 있어.”
무슨 지랄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상당히 더러웠다. 이미르를 쥐고 있는 로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지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피와 함께 빠져나갔던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지간한 도발도 먹히지 않는 놈이니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 방법이라면.’
순간 제법 괜찮은 계획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주저할 시간은 없었다. 사내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린 그가 입을 열었다.
“구원자님, 살아 있었네요?”
“무슨···!”
작전은 먹혔다. 일순 경직된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허나 그곳에는 타오르는 풍경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사내는 속은 것을 깨닫고는 다시 로난을 돌아보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이미르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 힘은···!”
반짝이는 마나를 본 사내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황금색 빛무리가 로난의 양팔을 뒤덮고 있었다. 완력을 증폭시키는 바렌의 오러였다.
“···갈수록 나를 놀래키는군.”
사내가 입을 둥글게 말며 감탄했다. 처음에 겨룰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는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며 들어 올렸다. 두 개의 검신이 맞닿기 직전이었다. 로난이 외쳤다.
“뒈져라!!”
파아아···! 남아 있는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 나가며 이미르의 검신이 더욱 강한 빛을 발했다. 콰아아앙! 이미르의 칼등 부분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주교 테라닐의 기술이었다. 찰나 수십 배로 가속된 참격이 사내의 검을 튕겨냈다.
“뭣···!”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도 해 보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대로 쏘아진 검격이 사내의 얼굴 위로 기다란 선을 그렸다. 촤아악! 피가 솟구치며 로브가 떨어져 나갔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허무한 감각에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비장의 일격은 실패였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던 그가 다시 목을 바로 세웠다. 쭉 가려져 있던 사내의 얼굴이 마침내 드러났다.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
“상처가···!”
기다란 자상이 사내의 콧잔등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다지 깊지는 않았지만 피를 내기에는 충분했다.
사내가 당황하며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에 흥건하게 묻어난 피를 본 그가 격분하며 외쳤다.
“네놈!”
사내가 검을 휘둘렀다. 허나 충격에 빠진 로난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사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썹과 딱 붙어 있는 눈동자는 노을과 같은 주홍빛을 띠었다. 날렵한 턱선은 베일 듯이 날카로웠다.
휘이잉···때마침 불어온 열풍이 사내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설원을 연상케 하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 색을 제외한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자신과 닮아 있었다. 서걱. 예리한 칼날이 로난의 목울대를 가르며 지나갔다.
‘···뭐지?’
번갯불이 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그 와중에도 로난의 머릿속은 사내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시야가 암전되며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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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로난은 눈을 떴다. 낡아빠진 나무 천장이 익숙했다.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몽롱해서 정신을 차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목에 손을 가져다 댄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졌나.’
상처는 없었지만 감각은 선명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소박한 농가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지않아 이곳이 고향 님버튼의 집임을 눈치챘다. 별안간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행은 즐거웠나.”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무정형의 그림자가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입이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마시고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간 로난이 그의 앞에 앉았다.
“나한테 뭘 보여준 거야.”
“과거의 일을 재현했을 뿐이다.”
“구원자는 정말로 죽었어?”
“글쎄. 나야 모르지.”
그림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교주가 내 아버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