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30)
130. 비명을 찾아서(7)
#130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가 내 아버지냐?”
“호오.”
그림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제법 오래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여지를 두는 것만으로도 거지 같아서 저 깊숙한 곳에 묻어 두고 있었을 뿐.
‘그 새끼들의 능력을 쓸 수 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하지만 이쯤 되면 가능성을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로브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이 자신과 지나치게 닮아서만은 아니었다.
만약 가설이 옳다면 상당수의 의문이 해결되었다. 마나를 베는 재능이나 반짝이는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경위 같은 것들. 차를 홀짝이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교주라···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똑바로 말 안 해?”
“내게는 그럴 의무가 없다. 왜 그 사내가 교주일 거라 단언하는 거지?”
“···적어도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잠시 기억을 반추한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그토록 처참한 패배는 처음이었다. 그는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사내와 승부라는 것을 성립시키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강자인 엘시아와 알리브리헤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배신하기 이전에도 심상치 않았지만, 구원자의 힘을 빼앗은 이후로는 기량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자식은 힘도 있었고 야망도 있었어. 그런 새끼들은 병신이 아니고서야 대장 노릇을 하게 되어 있지.”
“흥미로운 추론이군.”
“썅, 말하기 싫으면 때려치워.”
로난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은 고개를 내저어 떨쳐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가족 관계 따위가 아니었다.
그 머리 하얀 놈의 정체가 뭐건 간에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라면 어차피 죽여야 했다. 날개 달린 대머리들을 불러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이마를 짚은 채 배회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딴 걸 왜 보여준 거야?”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기회?”
“그래. 더 나은 선택을 할 기회. 이 저주의 시전자는 네가 스스로의 힘을 영원히 깨닫지 못하길 바랬다.”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인 그림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향기가 강한 꽃에는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니까···하지만 너는 이미 세 개의 저주를 파훼한 걸로 모자라 교단을 적으로 돌렸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강해질수록 운명은 기구해진다는 의미다. 아직도 교단과 맞설 생각이 드나?”
촤아악! 불현듯 그림자의 몸이 넓게 펼쳐졌다. 늘어난 그의 육신 위로 로난과 로브를 쓴 사내의 전투가 눈앞에 펼쳐졌다. 절벽에서의 조우 이후 목이 잘리기까지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시발.’
다시금 절망적인 격차를 느낀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머리가 떨어지는 장면을 3인칭으로 본다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저 사내는 여전히 살아있다. 시간이 흘렀으니 더욱 강해졌을 테고.”
“그렇겠지.”
“네가 해주를 거듭하며 교단과 대적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저 자를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때는 잘린 목이 붙는 행운 따위는 벌어지지 않아.”
로난이 혀를 찼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자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나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해주를 포기하고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라. 정 원한다면 네가 베어야 할 것을 알려 주겠지만,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겠다.”
슈우욱···그림자의 크기가 원래대로 줄어들었다. 영상이 사라지며 원래의 시커먼 몸뚱이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말했다.
“이제 정해라. 네 선택을 존중하되 두 번은 묻지 않겠다.”
“젠장, 겨우 그딴 소리를 하려고 이 지랄을 떤 거였어?”
로난이 픽 웃었다. 결국에는 세크리트가 해주 전에 했던 질문과 같은 말이었다. 위험한 도전보다는 안락한 포기를 종용하는 그런 부류의.
물론 두려운 건 사실이었다. 사내와의 재회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쩌면 그림자의 말마따나 만나자마자 머리가 바닥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좆같네 진짜.’
하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약속을 한 이상 지켜야 했다. 바닥에 침을 뱉은 로난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해주할 방법이나 불어.”
“좋다. 따라와라.”
그림자는 의외로 비아냥대거나 두 번 묻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현관을 빠져나갔다.
로난은 그림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문간을 벗어나는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정원 한복판에 웬 거대한 바위 하나가 솟아나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네가 해주를 위해 베어야 할 존재다.”
참 못생긴 바위였다. 거인이 씹다가 뱉은 것을 천 년 정도 사막에 방치해 놓으면 이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저주의 핵을 실체화시킨 것이지. 네가 품은 잠재력이 발현되지 못하도록 봉인하고 있다.”
“이게?”
“그래. 한번 만져 봐라.”
로난이 바위에 손을 얹었다. 과연 그림자의 말대로였다. 어떤 강력한 기운이 바위 깊숙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다.
‘음?’
다만 뭔가 이상했다. 바위 자체에서도 고유한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감각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자가 말을 이었다.
“이걸 베는 대로 너는 돌아갈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바위가 단단해 봤자지.”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붉게 물든 라만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쏘아진 검격이 바위에 직격했다.
카앙! 사나운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생채기 하나 없는 표면을 본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단단하군.”
“말했잖나.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경도였다. 몇 번을 시도해 봐도 애꿏은 칼날만 상할 뿐 바위는 건재했다. 클클거리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아마 제법 시간을 잡고 단련해야 할 거다. 지금의 네 실력으로는 저 핵을 부술 수 없어.”
“단련?”
“그래. 저 바위를 벨 수 있게 될 때까지.”
딱! 별안간 그림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풍경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님버튼의 모습이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나타난 동아리 구역 훈련장의 모습에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마음에 안 드나? 가장 훈련에 최적화된 환경이라 생각했는데.”
“···계속해 봐.”
님버튼의 집은 특급 모험 동아리의 건물로 변해 있었다. 못생긴 바위는 널찍한 훈련장의 바닥에 솟아나 있었다. 훈련장에는 단련에 필요한 장비나 도구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구현할 수 있다. 수면이나 식사는 저 건물에서 하면 돼. 너는 바위를 부수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어째 계속 눌러앉아 있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내가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여기서의 열흘은 바깥에서의 한 시간이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바깥에서는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지. 심상 세계에서의 단련은 현실의 육신에도 영향을 미치니 썩 나쁜 제안은 아닐 거다.”
“갑자기 성격이 호의적으로 변하셨군. 뜯어말릴 때와는 영 딴판인걸.”
“네 선택을 존중하라는 것 또한 시전자의 뜻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가능하지.”
훈련장을 죽 둘러보던 그림자가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끼이익- 별안간 동아리 건물의 문이 열리며 재수 없게 생긴 소년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아무 맥락도 없이 등장한 슐리펜의 모습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발, 이건 또 뭐야.”
“오랜만이군. 로난.”
슐리펜이 말했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훈련용 마공학 기사 앞으로 다가간 그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촤악! 날카로운 바람이 훈련장을 가로지름과 동시에 기사 서른 명의 머리가 동시에 떨어졌다. 칼을 다시 집어넣은 그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한 번 대련해 보겠나?”
“허.”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그림자는 단련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구현해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를 반증하듯 동아리 건물의 문이 다시 열렸다.
끼이익- 장신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바람직한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제국군 군복을 차려입은 아데샨은 높은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상병. 그간 잘 지냈나?”
심지어는 대장군 시절의 아데샨이었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로난이 선물로 준 채찍이 메어져 있었다. 또각거리며 다가온 아데샨이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
“···대장군님.”
“혼자 고민할 필요는 없다. 나도 제국의 샛별과 함께 귀관을 돕겠다.”
잿빛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늘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다. 허상인 걸 알면서도 아련한 향수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눈을 질끈 감은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싹 치워.”
“그러지.”
탁.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을 때 슐리펜과 아데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바위를 올려보던 로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솔깃하긴 하네.”
솔직히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조달받을 수 있는 것으로 모자라 대련 상대까지 소환할 수 있었다. 바깥세상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이점인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필요하면 불러라. 바로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단, 이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음?”
부름을 들은 그림자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동시에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붉은 혜성 하나가 그림자를 향해 쏘아졌다.
“무슨···!”
그림자가 다급하게 형체를 일그러트렸다. 허나 이전과 비할 바 없이 빨라진 참격은 그가 피할 틈새를 주지 않았다. 서걱! 그림자의 몸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커억!”
양단된 덩어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림자의 표면이 거품처럼 끓어올랐다. 그는 로난을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나?”
“뭐, 그렇지.”
“흐···연기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림자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본질을 베인 그의 신체는 복구되지 않았다.
스아아···공간을 구성하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동아리 건물, 못생긴 바위, 죽어가는 그림자와 로난의 신체까지. 로난이 턱 끝으로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래에서 나오려고 하는 거, 저주잖아.”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중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바위에 억눌려 있는 것은 로난의 잠재력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해주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저주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들끓고 있었다.
바위는 저주가 더 퍼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만약 저 바위를 파괴했다면 억눌려 있던 저주가 터져 나와 온몸을 잠식했을 터였다. 소멸하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저주라 느껴지지 않게 조처해 놨을 터인데.”
“글쎄다···.”
로난이 말꼬리를 끌었다. 확실히 예전 같았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터였다. 그림자의 말마따나 바위 아래에 도사리는 저주에는 갖가지 위장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기억 여행을 다녀온 직후 그의 감각은 훨씬 예민해져 있었다. 마치 눈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사라진 것 같았다.
또한 못생긴 바위에서는 세니엘의 신상에서 느껴지던 것과 같은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엘프 사란테가 모시던 의지의 덩어리. 그런 존재가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겨먹은 것도 비슷하고.’
로난이 피식 웃었다. 어쨌든 주변의 풍경이 소멸하고 있는 걸로 봐서 목적은 달성한 듯했다. 저주의 근원은 역시 저 그림자였던 것이다.
점점 줄어들던 그림자는 이제 한 줌의 재보다 못한 꼴로 변해 있었다. 의식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세상 속에서 그림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역시···안목이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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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음···.”
로난은 눈을 떴다. 아주 오랜 시간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빙하를 연상케 하는 푸르고 두꺼운 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정체불명의 벽은 로난의 전신을 번데기처럼 감싸고 있었다. 겨우 팔다리를 움직일 만한 공간만 확보되어 있었는데, 도무지 바깥을 볼 수가 없었다.
‘가지가지 하는구만. 설마 아직 심상 세계인가?’
스산한 불길함이 머릿속을 스쳤다. 특유의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낮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손을 뻗은 로난이 벽을 짚었다. 콰장창! 굵직한 균열이 새겨짐과 동시에 벽이 산산이 조각났다.
“씨발, 깜짝이야···!”
로난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쉽게 부서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파편에 다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비로소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파라치오.”
밀폐된 서재에는 책이 가득하게 꽂혀 있었다. 바닥에는 자신이 해주에 돌입할 때 사용했던 마법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문득 로난은 자신의 시야가 부쩍 높아진 것을 눈치챘다. 손발의 크기도 구원자의 몸에 빙의했을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젠장, 얼마나 갇혀 있던 거야?’
막 얼굴에 손을 대 보려는 찰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로난.”